제14화
“왜?”
용병 중 한 명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우리 어차피 여기에 새로운 인원 찾으러 온 거 아니야?”
“그건 그렇긴 한데. 너 설마….”
“맞아.”
용병 한 명이 씨익 웃었다. 그의 이름은 도타, 이제 막 4년째를 찍은 스물넷의 용병이었다.
“눈빛이 쓸 만하던걸.”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다만. 단장이 어디서 이런 거지새끼를 주워 왔냐고 물을걸?”
“깡 좋게 우리한테 덤볐다고 하면 되지. 단장 그런 거 좋아하잖아.”
“뭐, 깡 좋은 놈들을 좋아하시긴 하지.”
용병들은 두 눈을 맞추고 고민하다 바닥에 쓰러진 할리드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뭐 해, 안 업고?”
“뭐? 내가 업어야 해?”
“그럼 내가 업어?”
먼저 제안했던 용병 도타가 얼른 업으라는 듯 할리드의 곁으로 가 양 겨드랑이를 잡아 올렸다. 다른 용병, 7년 차의 베이드는 한숨을 내쉬며 결국 제 등을 내어 주었다. 할리드는 축 늘어진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보면 한참 굶은 것 같은데.”
“그 상태로 우리한테 덤비려 했다니 그것도 대단하다.”
“그래, 그러니까 용병시킬 만하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해라.”
그렇게 두 용병은 할리드를 업은 채 용병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할리드가 눈을 떴을 땐, 용병단이 쓰고 있는 여관의 구석 방이었다.
* * *
이른 새벽이었다. 할리드는 저택 그 누구보다도 먼저 눈을 떴다.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버릇이었다. 그래, 녹스의 하인으로 있을 때 생긴 이 빌어먹을 버릇은 끝끝내 고쳐지지 않았다.
할리드는 침대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기분이 더러워져 콧잔등을 찡그렸다. 거기에 그다지 반갑지 않은 꿈까지 꾸었으니. 녹스에게서 버려지고 추천장을 빼앗기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그때의 날들. 만약 그때 용병단이 자신을 주워가지 않았다면 그대로 굶어 죽었을 수도 있었다.
할리드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자신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어제 끝내 기절해 버린 녹스가 침대 위에 있었다. 늘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는 엉망이었고 아직도 빨간 눈가는 눈물로 짓물러 있었다. 그는 그 얼굴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다 이내 그가 덮고 있는 이불을 걷었다.
“…왜.”
제게 등을 돌리고 누운 녹스의 등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그 등엔 채찍 자국이 가득했다. 공작가 도련님의 몸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오래된 자국이 거기 있었다.
“왜 이런 게 네 몸에 있지?”
할리드는 생각했다. 그렇게나 널 사랑했던 날 버렸으면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았어야 할 그가 아닌가. 어째서 귀족가의 도련님에게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이런 상처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지, 아냐.”
할리드는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없던 때 네가 불행했다면 그 무엇보다도 제게 좋은 소식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알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동정하지 마.”
할리드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저 상처가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내 것인 몸에 남이 새긴 상처가 있다는 사실이…. 할리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노예와 함께 아침을 맞는 주인은 없는 법이다.
할리드는 사용인들을 불러 목욕을 준비했고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녹스를 한 번 돌아본 후 욕실 안으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목욕을 끝내고 나온 할리드는 사용인의 시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복도로 나가 자신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황궁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할리드는 이제 익숙해진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명령하고 곧바로 1층으로 가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마차에 앉아 잠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제 방에 기절해 있을 녹스가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원수, 자신을 배신하고 버렸던 존재. 이제 자신에겐 손톱만큼도 영향을 줄 수 없는 인간. 하지만 그럼에도 바랐던 존재. 할리드는 서늘한 눈으로 자신의 방 창문을 올려보다 이내 마차 창의 커튼을 닫았다.
할리드의 마차가 저택을 출발할 때쯤, 녹스가 느리게 잠에서 깨었다. 온몸이 삐거덕거렸고, 허리 아래는 마비가 된 것처럼 감각이 둔했다. 녹스는 손으로 시트를 짚고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체에서부터 올라오는 뭉근한 통증에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다시 한번 물었다. 너무나 낯선 통증이다.
똑똑-
그리고 그때쯤 누군가 문을 두드려 왔다. 녹스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들어오라고 수락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녹스가 대답하지 않자 문 너머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
녹스는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온몸에 잇자국이 있는 꼴은 타인에게 보여 줄 만한 게 못되었으니까. 방으로 들어온 하녀는 배에 두 손을 얹고 그에게 인사했다.
“하녀장, 마를렌이라고 합니다.”
“…….”
“호칭은 하녀장이라 하시면 됩니다.”
“왜 내게….”
존대하지? 라고 묻고 싶은 녹스의 의중을 눈치챘는지 마를렌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존대를 하는 것도 지금뿐입니다. 앞으론 공작님의 노예로서 공작님과 함께해야 하니 그렇게 아시면 됩니다.”
“공작이라….”
“예, 할리드 비아 공작. 그분이 이 저택의 주인님이십니다.”
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2황자의 옆, 선두에서 공을 세웠다면 공작 위도 불가능하진 않으리라. 특히 2황자의 형제가 남지 않은 지금이라면 더더욱. 녹스에게서 대답이 없자 마를렌은 자신이 해야 할 이야기를 이었다.
“욕실에 물을 받아 놓았습니다. 공작님의 밤 시중을 드시면 공작님의 욕실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날에는 안내받을 방에 딸린 욕실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밤 시중, 이라는 말에 녹스는 저도 모르게 어젯밤을 떠올렸다. 그래, 밤 시중이군. 밤 시중. 녹스는 설핏 웃었다. 어쩌다 제 꼴이 이렇게 되었나 싶다가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게 다행인가 싶었다. 그런데, 정말 다행인가?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그리고 물음의 답을 찾기도 전에 마를렌이 이어 말했다.
“씻고 나오시면 앞으로 지내실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알았습니다.”
마를렌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귀족, 그것도 공작가 출신이었던 남자가 아무리 노예로 전락했다 하더라도 고작 하녀장에게 존대를 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녹스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침대 끝에 걸려 있는 가운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걸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
혼자서 안에 든 것을 빼내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걸 혼자 하지, 남의 손을 빌릴 걸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녹스는 쓸데없는 생각을 물리고 물기를 말린 뒤 밖으로 나갔다. 문득 자신이 씻고 나오면 꼼꼼하게 머리를 말려 주던 할리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그녀가 내민 건 하인, 아니 시종의 옷처럼 보였다. 검은 조끼와 바지는 매끄럽고 셔츠는 보드라워 보였다. 녹스가 그 옷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마를렌이 설명했다.
“앞으로 공작님의 대외 활동에도 참여하실 예정입니다. 그러니 여기.”
마를렌이 내민 것은 셔츠에 매는 볼로 타이였다. 은색으로 장식되어 화려하나 녹스는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았다. 대귀족의 노예, 어여쁘나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자. 그리고 애첩. 노예들은 이 볼로 타이를 받는 것을 영광으로 아나 본디 대귀족의 자리에 서 있던 녹스로서는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얌전히 받았다. 벌써부터 목이 가볍게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이제 나를 나로 보이지 않게 해 줄 것. 오로지 누군가의 소유로만 보이게 해 줄 물건. 아니, 나 자신이 물건이 되는 것,
“그럼, 갈아입고 나오십시오.”
“…예.”
마를렌이 방 밖으로 나가고 홀로 남은 녹스는 가운을 벗었다. 그리고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있는 전신 거울에 비친 나신을 보았다.
어깨, 목덜미, 가슴, 팔뚝, 허리, 허벅지 어느 곳을 콕 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남은 잇자국들은 시간이 지나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건드리면 고통이 느껴졌다.
녹스는 한숨을 내쉬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마 앞으로 몸이 성할 날은 많이 없을 것 같았다.
슥, 사락. 천천히 옷을 걸치고 볼로 타이를 매자 그는 완벽한 노예 같아 보였다. 적어도 녹스의 눈에는 그랬다. 고귀한 공작가의 핏줄이었던 사실이 벌써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 같았다.
녹스는 문을 열고 나갔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를렌이 그를 향해 눈짓했다. 녹스는 그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귀족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레이디와의 속도를 맞추는 걸음이었다. 마를렌은 그런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둘은 걸어 본관 1층의 손님방 쪽으로 향했다. 녹스가 물었다.
“제가 본관에서 지냅니까.”
“공작님께서 부르시면 곧바로 나와야 하기에 이런 결정을 했습니다. 공작님의 승인을 받은 일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니, 걱정이라기보단….”
취급이 생각보다 괜찮아서였다. 자신은 다른 하인들과 아니, 다른 하인들보다 못한 취급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마를렌이 조용히 속삭여 왔다.
“공작님의 애첩을 그리 취급할 리가 없지요.”
“…그렇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