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조곤조곤 현실을 알려 주는 마를렌의 음성에 녹스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녀가 안내해 준 방은 1층 손님방 중 하나였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방. 마를렌은 그를 방까지 안내해 준 후 등을 돌렸다.
“여기서 대기하시다가 공작님께서 부르시면 곧장 준비를 마치시고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녹스는 생각했다. 준비라는 건 어떤 준비를 말하는 건지. 그저 단정하게 옷을 입고 찾아가면 되는 건지 아니면…. 녹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마를렌의 뒷모습을 보다가 방문을 열었다.
달칵.
이윽고 문이 닫혔다.
한편, 황궁으로 간 할리드는 황제를 알현하고 있었다. 황제의 집무실에 모인 자들은 황태자의 힘에 짓눌리지 않고 2황자의 힘이 되어 준 인물들로서 이번 새로운 제국의 권력의 중심지라고 할 만했다. 모인 자들은 총 여섯으로 그중 단연 돋보이는 이는 직접 나서 황태자의 목을 베어 온 할리드 비아와 2황자의 곁에서 책사 노릇을 한 엘러딘 바이스. 그리고…….
“누가 뭐래도 그대의 몫이 크오.”
“아, 아닙니다. 황제 폐하.”
2황자, 아니 이제 황제가 된 펠티온은 그 말에 미소를 올렸다.
“발티아스, 그대가 라이네리오 저택에 잠입하여 그날 밤, 습격이 있을 거라는 정보를 알려 주지 않았으면 전부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오.”
“가, 감읍할 뿐이옵니다.”
바로 발티아스 데론, 그는 황태자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라이네리오 공작 저택에 하인으로 위장 취업해 들어간 사람이었다. 고작 남작 작위인 데다가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사교계에 알려지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건만 그는 노련한 첩자처럼 수많은 정보를 2황자에게 가져다주었다.
발티아스 데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만하지 않고 황제의 말에 고개만 끄덕거렸다. 다 좋은데 저 소심한 성격만 어떻게 할 수 없는지.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후작이 되어 권력의 중추가 될 인물 중 하나인데 저렇게 소심해서야.”
펠티온이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그는 움찔거리더니 곧 고개를 들고 말했다.
“어, 어떻게든 고쳐 보겠습니다.”
“아니, 무리하라는 뜻은 아니네. 그저 걱정이 된다는 거지.”
“거, 걱정하실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이번에 라이네리오 가문에서도 훌륭하게 성공한 걸 보면 그대가 만만치는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네.”
“……예.”
그는 그 말에 다시금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 와중에 할리드 비아는 그가 라이네리오 공작저에서 지냈다는 말에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녹스 라이네리오. 이젠 성을 잃고 녹스가 된 자신의 노예에 관해서였다. 그의 등엔 오래된 채찍 자국이 가득했다. 자신보다도 더. 할리드는 그에 관해 입을 열었다.
“혹시 그곳에서 지낼 때….”
녹스 라이네리오가 채찍을 맞을 일이 있었나? 하지만 그 말은 끝까지 내뱉어지지 않았다.
“예, 예?”
발티아스가 놀란 듯 고개를 휙 들었다. 그 동그란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할리드는 자신이 무엇을 물어보려 한 것인지 깨달았다.
‘허, 그것을 알아서 어쩌게.’
그 사실을 함께 안타까워해 줄 것인가? 아니면 가여워해 줄 것인가. 그는 자신을 비웃었다. 자신을 배신한 자가 어떻게 지냈든, 어떤 상처가 있든 그걸 궁금해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은 오로지 배신당한 마음을 그의 몸으로 달래면 될 일이다.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예, 예….”
“그보다,”
그때 황제가 빙글빙글 웃으며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온화해 보이는군, 할리드 비아 공작.”
“……그렇습니까.”
할리드 비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말을 꺼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황제는 예전부터 농담을 받아 주지 않는 할리드에게 매번 농담을 꺼내 그를 곤란하게 만들곤 했으니까.
“녹스 라이네리오라. 그대가 그를 원한다 했을 때, 내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그러셨습니까.”
할리드 비아가 콧잔등을 찡그린 채로 대답했다. 펠티온은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길들이기 귀찮은 인물일 텐데.”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렇지. 무력으로 그대를 이길 자는 아니니까. 하지만 분명 라이네리오 기사단의 기사단장이기도 했던 자야. 방심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사교계와 정치판에 잘 등장하지 않아서 도통 무슨 속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자이기도 하지. 능력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모두는 아비와 한통속인 뱀 같은 자라고 말하지만…. 그 둘 사이가 그렇게 좋아 보이진 않았단 말이야.”
“제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그건 맞는 말이지. 이젠 가문도 지위도 다 잃어버린 노예일 뿐이니.”
그렇게 말한 펠티온이 할리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만약 길들이기 힘들다면 좀 도와줄까?”
그의 뼈 있는 말에 할리드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황제는 그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다간 황제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제 기사의 칼에 맞아 죽겠군!”
“폐하!”
“아하하, 농담일세. 농담이야. 비아 공작, 제 노예를 아낀다는 사실을 너무 티 내는 것 아닌가.”
“…그런 적 없습니다.”
“없기는.”
펠티온은 곧 손을 휘휘 저어 보이며 원래 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남쪽에서 아직도 무력으로 버티고 선 돌란스 백작의 처리에 관해선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엘러딘 바이스가 발언했다.
“버티고 있긴 하지만 이미 한계일 겁니다. 황태자가 죽은 지금은 명목도 없고요. 할리드 비아 공작을 보내어 위협만 좀 한다면 금세 숙이고 나올 겁니다.”
그때 할리드가 말했다.
“기각.”
“왜 자네가 기각을 하나.”
“그딴 일에 내가 나설 수는 없다.”
“이제 막 손에 쥔 노예 하나를 두고 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엘러딘이 크게 비아냥거렸고 할리드는 다리를 꼰 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맞아.”
“…그렇게 인정하면 내가 할 말이 없지.”
“할 말 없으라고 한 거야. 어쨌든 난 한동안 출전하지 않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펠티온은 싱글싱글 웃는 낯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여태 가장 고생한 건 할리드 비아 공작인데 이런 소소한 일에 그를 나서게 할 순 없지. 어찌나 고생했는지 황제인 나보다 더 고생을 한 것 같단 말이야. 암, 그렇고말고. 애첩 하나 끼고 뒹굴 시간은 있어야지.”
“그냥 곱게 출전하라고 말씀하시옵소서.”
엘러딘이 질렸다는 듯 말했고 할리드도 얼굴을 찌푸렸다. 황제는 하하 웃으며 손뼉을 짝짝 쳤다. 황제의 농담엔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황제가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이젠 한 명도 웃어 주질 않는군.”
“발언 하나하나가 중요하실 때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래서 출전하라는 말씀이십니까?”
할리드가 대놓고 싫다는 듯 말했다.
“바로 당장은 아니야. 식량과 기운을 빼놓기 위해 얼마간은 지켜봐야지. 아, 주변을 약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곧장 막아야겠지만.”
“알겠습니다.”
할리드 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엔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긴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용병 출신이었던 그는 이번에 나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해야 했다.
할리드가 수락하니 그 이후 일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새로 작위를 얻은 자들과 강등당한 자들의 처리. 그리고 노예로 추락한 자들의 처리와 죽어 없는 자리를 새로 채우는 일 등.
할리드가 딱히 의견을 내고 싶지 않은 것들에 관한 일들이 진행되었다.
“아주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이군.”
“제가 그랬습니까?”
“모르는 척도 아주 수준급이야.”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젠 농담도 받아 칠 줄 아는군.”
“폐하 곁에서 몇 년을 지냈는데요.”
“그래, 이제야 좀 재밌어지려 하는군. 공작이 됐다고 벌써 능글거리려 그러나? 머리가 아파 죽겠어.”
황제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만 이 모임을 파하자는 의미였다. 그의 수하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할리드 비아만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인사를 하고 우르르 빠져나가자 황제가 물었다.
“왜 안 나가고 있나?”
“여쭤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 말입니다.”
“무엇인가?”
“…….”
할리드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여기서 이것을 묻는 게 옳은가에 대한 생각. 하지만 그는 고민과 다르게 먼저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냈다. 머리보다 몸이 더 먼저 반응한 것이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건 갑자기 왜?”
그는 자신도 왜 이런 것을 황제에게 묻는지 몰랐다. 그저, 이제 자신의 것이니까. 그의 과거까지 알고 싶다는 욕망이 물밀듯 차올랐을 뿐이다.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말대로라면 녹스 라이네리오는 사교계에 크게 발 담그지 않아 알려진 게 많이 없다는 것 같았다.
“공식 일정 외에는 참여하는 법이 없었지. 스스로 라이네리오 가문의 기사 단장직을 맡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게 정말 없는 남자였어.”
“그렇습니까.”
“아 딱 한 번 그를 가까이서 볼 일이 있기는 했는데.”
황제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할리드가 황제를 바라보았다.
“열여덟 즈음이었을까.”
말 그대로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란 뜻이었다. 황제는 그때를 떠올리는 것처럼 잠시 입을 다물더니 곧 비스듬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