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6화 (16/158)

제16화

“그다지 유쾌한 기억은 아니군.”

황제는 애매하게 답했다. 할리드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그를 직시하자 그는 가벼운 웃음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뭐, 그때의 그는 안색이 좋지 않았지. 그런데도 허리를 꼿꼿이 펴고 뒷짐을 지고 있더군. 그 누구보다도 귀족다워 보였어. 물론 그 아비가 하던 짓거리를 생각해 보면 그다지 깨끗한 자는 아니겠지만.”

“…….”

할리드의 얼굴이 야차처럼 구겨졌다. 그의 아비가 하던 짓거리는 그 누구보다 할리드 비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릴 때의 기억은 다행히 몸이 강건해지며 떨쳐 냈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그리고 그 기억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딸려오는 기억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괜찮아, 어디 가지 않아.’

자신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주던 팔과 다정한 목소리. 할리드는 이를 악물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황제에게 인사했다.

“가는 것도 자기 맘대로군.”

“더 이상 폐하의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확실히, 말이 늘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내 형제 같은 놈이니 더 뭐라 하기도 뭣하군. 잘 가게.”

할리드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그가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오자 그의 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곧장 저택으로 간다.”

“예.”

“녹스를 대기시켜 놓아라.”

“알겠습니다.”

할리드는 곧바로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에 도착한 마차가 멈추자 그는 손수 문을 열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마중 나오는 하인들을 둘러보다 미간을 찡그렸다.

“내 노예는 어딜 갔지?”

“아, 전달은 했습니다만 아직….”

“하.”

이런 식으로 반항을 하겠다는 건가. 그는 어이가 없어 직접 녹스의 방으로 향했다. 그 뒤로 하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저들끼리 주고받는 시선에 약간의 불만이 어려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위 맞추기 힘든 주인인데 그의 심기를 건드리다니. 그런 의미가 담뿍 담긴 시선들을 지켜보던 마를렌이 미간을 묘하게 구기며 손뼉을 쳤다.

“전부 제자리로 복귀.”

“네에.”

“예.”

그렇게 하인들이 흩어지고 제 기사들과 함께 녹스의 방에 도착한 할리드는 어떠한 고민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

“…….”

그리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제 막 씻고 나온 듯한 녹스가 가운을 벗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리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와락 구기고 기사들에게 짓씹듯 명령했다.

“눈.”

기사들은 아무런 말 없이 눈을 바닥으로 깔았다. 할리드는 그런 기사들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할리드와 단둘이 남겨진 녹스는 손에 쥔 가운을 놓지도 입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였지만 온몸에 난 잇자국은 가릴 수도 없었다. 할리드는 그런 녹스의 몸을 어깨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음미하듯 시선으로 쓸어내렸다.

“주인의 부름에 늦는 노예 따윈 없어.”

그 말에 녹스가 천천히 가운을 놓고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셔츠를 집었다. 그리고 그 셔츠를 걸치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준비를, 하느라.”

준비, 라는 말에 할리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이제 막 단추를 잠그기 시작한 녹스의 뒤로 걸어가 그의 턱을 감싸 쥐고 뒤로 젖혔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준비라, 어떤 준비를 말하는 거지?”

“그건….”

녹스가 대답하지 못하자 할리드가 설핏 웃었다. 그리고 아직 겨우 셔츠만 걸친 몸을 제 몸에 딱 붙여 안고서 손을 아래로 내렸다. 허리를 단단히 쥔 채라 녹스는 도망가지도 못한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의 손이 밀부를 건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주저 없이 밀어 넣었다. 움찔, 떨리는 녹스의 몸이 딱 붙은 할리드의 몸에 전해져 왔다.

“…확실히, 이런 준비라면 늦을 수밖에 없었겠어.”

그는 손가락을 더 밀어 넣으며 내벽을 거칠게 비벼 댔다. 녹스의 몸이 쉬지 않고 움찔대며 그의 팔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할리드는 녹스의 이런 모습이 좋았다. 무능력하게 제 손안에서 떨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손가락을…….”

“바라는 게 있으면 똑바로 말을 해.”

녹스는 그의 품 안에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다는 듯 무릎을 모았지만 구멍 안으로 파고든 손가락은 내벽을 손끝으로 긁어 댔다. 흠칫, 튀어 오르는 어깨.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 할리드 비아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을 상상하며 그의 귀 끝을 물었다.

“읏…….”

“그게 어렵나?”

녹스는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말을 내뱉었다.

“주인님…. 손가락을 물러 주십…. 흑!”

그가 손가락을 물러 달라고 말할 때, 할리드는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그의 구멍은 어제 그렇게 쑤셔졌음에도 빡빡했다. 하지만 분명 끊을 듯 조여 물던 어제와는 달랐다. 적당히 손가락으로 풀어 준 구멍은 빡빡하지만 확실히 부드럽게 손가락을 조여 물고 있었다.

“혼자서 풀었나?”

“네, 네….”

녹스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싫었다. 할리드에게 붙들려 짐승이 검사받듯 구멍이 헤집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녹스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어깨를 뒤틀다 곧 뒤에서 들리는 낮은 으르렁거림에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가 움직임을 멈추자 낮은 으르렁거림은 곧 가라앉았다.

“읏, 하…! 큽.”

손가락이 더욱 안쪽으로 밀고 들어와 어느 부분을 누르자 몸이 화드득 굳었다. 할리드는 만족스럽게 목 안을 울리며 그 부분을 집요하게 눌러 댔다. 녹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할리드를 위해 입술을 깨물었지만, 목 안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을 다 삼킬 수가 없었다.

할리드는 당장 녹스를 침대 위에 엎어 놓고 싶었다. 그리고 어제처럼 억지로 저 몸 안에 파고 들어가 목이 쉴 때까지 잔뜩 울리고 싶었다. 목을 조르고 뺨을 때리고 헐떡이는 그가 아픔에 반응할 새도 없이 느끼는 부분을 찔러, 속절없이 신음하는 그를 창부 같은 새끼라며 매도하고 싶었다. 할리드는 자신의 가학심을 잘 알고 있었고 녹스를 대할 때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는 밀부를 찌걱이며 만져 대던 손가락을 빼내고 이내 녹스를 놓아주었다. 녹스는 그대로 주저앉을 뻔한 걸 면하고 겨우겨우 탁자를 짚고 섰다.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올라와.”

“……예.”

할리드는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 버렸고 녹스는 홀로 남겨졌다.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제 고작 그의 노예가 된 지 이틀. 아직 전부를 받아들이기엔 힘에 부친 시간이었다. 하지만 녹스는 천천히 다시 셔츠의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고 셔츠 가터 위로 매끄러운 바지를 걸쳤다. 셔츠 위로 조끼를 잠그고 구두까지 전부 신은 후 볼로 타이를 매면 그는 어느 모로 보나 누군가의 어여쁜 노예였다.

“…….”

녹스는 거울 안의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곧게 선 허리와 반듯하게 편 어깨 그리고 바르게 선 자세는 귀족가에서 칭하는 가장 완벽한 자세였지만 그 자세와 다르게 자신은 그저 노예일 뿐이었으니…. 거기서 오는 괴리감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곧 거울 안의 자신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어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할리드, 그가 있을 최상층을 향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하인들마다 그를 보고 소곤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그는 예상할 수조차 없었다. 예상하고 싶지도 않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귀족이었던 자신을 향한 조롱인지 혹은 동정인지. 그 어느 것도 반갑지 않았으나 이것이 그의 현실이었다.

그의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지만 할리드의 방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똑똑-

녹스가 할리드의 방문에 노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녹스는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십 분, 그리고 이십 분, 오랜 시간 동안 답이 없었다. 그사이에 자리를 비운 것도 아닐 텐데.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구태여 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냥 그 자리에 하릴없이 서 있었다.

달칵-

그러던 중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이제 막 씻고 나온 듯한 할리드가 미간을 조금 찡그린 채 녹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서 있었지?”

“20분 전입니다.”

“…그렇군. 들어와.”

녹스는 그의 명령대로 그의 방 안에 발을 들였다. 방 안의 커튼은 모두 쳐져 있어 어두웠으며 안을 밝히는 건 마력 수정구밖에 없었다. 희미한 푸른 빛 사이에서 녹스는 침대 위에 걸터앉는 할리드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할리드가 발끝으로 자신의 앞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리 와.”

녹스는 느리게 걸어 그의 앞으로 가 섰다. 할리드는 그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녹스는 잠시 망설이다 그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할리드의 다리 사이에 꿇어앉은 녹스는 그를 올려다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고 고개를 들자마자 그의 큰 손에 뒷머리를 붙잡혔다.

“윽….”

“입 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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