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그랬건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집사는 녹스가 할리드를 찾는다는 사실을 곧바로 올가, 녹스의 어머니에게 보고했다. 어쩌면 올가가 미리 지시해 놓은 상황일 수도 있었다. 아니,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침실에 누워 계셨던 어머니께서는 어디까지 내다 보고 있었던 걸까.
어머니의 말마따나 그 어린아이에게 홀린 남자가 집안에 둘이나 있었으니 얼마나 꼴 보기가 싫었을까.
그렇게 녹스가 할리드를 찾기를 부탁했던 날 밤, 어머니는 녹스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녹스는 불안감에 휩싸인 채로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이제 침대에서 누군가 일으켜 주기 전까지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눈, 그 눈빛만큼은 언제나 생생하고 날카로웠다. 이제 막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녹스는 생각했다. 자신은 어머니를 닮지 않았다고. 어쩌면 어머니의 말대로 그 더러운 아버지를 닮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녹스는 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부르셨습니까.”
“내가 너를 왜 불렀는지 아느냐.”
녹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모르는 체했다.
“모르겠습니다.”
“앎에도 모르는 척하는 것만큼 웃긴 것도 없지. 지금 나와 연극을 하자는 의미더냐.”
“…….”
“그 애를 찾아달라 했다지?”
“어머니, 그 애는….”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올가의 입에서 먼저 말소리가 들렸다.
“나도 그 애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쫓겨나고 몇 개월이 지난 후 행적이 묘연해졌더구나.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상처를 돌봐줬다 하더라도 어린아이가 혼자 살아남기엔 그리 좋은 땅은 아니니.”
그 말에 녹스의 가슴이 턱 하니 막혀 왔다. 어머니는 자신이 할리드에게 어떻게 해 줬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르는 척하며 한 번의 기회를 준 것이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선을 녹스가 넘어 버렸다. 그 애를 찾는 것, 그것이 올가가 그은 마지막 선이었을 것이다.
“그 애가…. 죽었을 리 없습, 니다.”
그 애가 죽었을 수도 있다는 말에는 저도 모르게 반박했다. 치료도 해 주었고 돈도 쥐여 주었다. 추천장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어느 귀족가에 취직해 먼 영지로 갔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녹스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 애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녹스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올가는 그 손끝을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보며 헛웃음을 쳤다.
“오늘은 그 어린놈 이야기를 하려 부른 게 아니다.”
“그게 아니시라면….”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인 네가 이상한 곳에 홀려 있으니 어미로서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니?”
녹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하녀장, 마에타가 채찍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애를 때렸던 그 매. 녹스는 그녀를 돌아보며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의 하인들이 녹스의 양옆에 섰다.
“어머니…!”
“정신 상태를 뜯어고쳐 주마. 감히, 고작 일 년 지났다고 다시금 그 애를 찾으려 들어? 넌 불량품이어서는 안 된다. 내가 더 이상 후계를 낳을 수 없게 된 지금! 너는 완벽해야 해. 그딴 사내아이에게 홀려 있으면 안 된단 말이다.”
하인들은 곧장 녹스의 팔을 붙잡고 바닥에 무릎 꿇렸다. 올가는 침대에 앉은 채로 하녀장에게 눈짓했다. 하녀장 마에타는 떨리는 손으로 결국 매를 들었다. 그리고 올가가 원하는 대로 채찍을 내리쳤다.
짜악-!
“큿…!”
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등이 화끈거렸다. 마치 불로 지진 듯한 통증이었다. 단 한 대만으로도 피부에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계속하거라.”
짜악, 짝-!
마에타는 쉴 새 없이 매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녹스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아랫입술을 꽉 물고 피가 새어 나올 때까지 참고 또 참았다. 올가는 냉정한 표정으로 녹스를 내려다보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녹스는 어머니 올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의지 그것 하나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녹스는 웃고 싶었다. 하지만 웃을 수 없었다. 등을 내리치는 매는 마치 지져지는 듯한 고통을 주었고 옷의 등판은 점점 찢어져 피부가 드러나게 했다.
허억, 끅. 식은땀이 바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녹스는 자신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것이 식은땀인지 아니면 피인지 구분되지 않기 시작했다. 하지만 올가는 매를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짜악, 짜악-!
옷의 등 쪽이 찢기고 그 아래 피부도 전부 찢어져 벌건 속살이 드러났음에도 올가는 꿋꿋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녹스는 무릎을 꿇은 채로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가 무너지면 곁에 선 하인들이 그의 팔을 붙잡고 다시 허리를 세우게끔 했다. 등은 더 이상 내리칠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마치 등의 피부가 전부 벗겨진 것만 같았다.
매를 때리던 하녀장, 마에타가 머뭇거리고 있자 올가가 말했다.
“끝끝내 잘못했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구나.”
“… 허억, 헉.”
“끝내 잘못을 인정하질 않아….”
올가는 이를 아득 물었다. 녹스는 반쯤 눈이 돌아가 있었다. 기절할 것 같은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가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냉정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앞으로 등의 상처가 아물 때마다 한 번씩 들르거라.”
그녀의 음성은 오기로 똘똘 뭉쳐 있었다.
“내, 네가 잘못했다는 소리를 들어야겠구나.”
녹스는 그 말을 듣고 그대로 기절했다. 하인들이 그를 받쳐 안았다. 그의 등에서 흘러나온 피가 카펫을 적셨다. 하인들은 다급하게 그를 들쳐 안고 가문 안의 치료사에게 향했다.
“도련님, 어쩌죠?”
“마님은 정말 앞으로 상처가 아물 때마다 매질을 하실 거래요?”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신데 어떻게 이런 일을.”
“공작님께 알려야 할까요?”
“…공작님께선 마님 앞에서 한마디도 못 하실 텐데.”
녹스는 열이 오르는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들이 속삭이는 말을 들었다. 맞다. 아버지는 어머니께서 이리 누운 상황에서도 그녀의 앞에서 기 한번 못 폈다. 그리고 녹스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녹스는 치료사에게 가 등을 치료받았다. 그리고 상처가 아물 때마다 한 번씩 올가의 명령 아래 매를 맞았다.
잘못했다고 그녀에게 빌 때까지. 하지만 그는 올가가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질 때까지도 그녀에게 빌어 본 적이 없었다.
진실로.
단 한 번도.
* * *
덜컹.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추었다. 녹스는 생각에 잠겨 있다 문득 깨어나며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렸다.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물처럼 가득 차 있던 녹스의 생각이 그대로 쏟아졌다. 그리고 곧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는 마부가 열어 준 마차에서 스스로 내렸다.
화려한 연회 홀.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던 곳. 그 외에도 수많은 귀족이 죽어 나갔으며 자신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곳.
녹스가 마차에서 내리자 주변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녹스는 명령받은 것이 없었기에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드물게 사교계에 나서면 주변에 삼삼오오 몰려들던 자들. 하지만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아니, 입술을 가리고 조롱하듯 웃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네요.”
“공작가 후계자에서 노예라니….”
“새 공작의 애첩이라죠?”
“차라리 혀 깨물고 죽고 말지.”
그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야 했지만 녹스는 어쩐지 화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익숙해져야 할 일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그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그는 아무런 명령도 받지 않은 노예답게 잠시 중앙 길에서 물러서 자리를 지키고 섰다. 저와 비슷한 처지의 시종들이 주변에 몇 명 보였다. 하지만 녹스는 시종이 아닌 노예였다. 모두가 그의 목에 달린 볼로 타이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생각했다. 아, 이제부터는 이게 내 얼굴이 되겠구나.
그는 한참 동안 다른 귀족들의 수군거림 사이에 있어야 했다. 그들은 지나가며 녹스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바라보거나 위아래로 훑었다. 설핏 비웃는 자들은 열쯤 세다 포기했다. 녹스는 뒷짐을 진 채 정면을 보고 서 있었다. 누군가 비웃더라도 누군가 혀를 차더라도 시선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다가온 남자의 가슴에는 황제의 시종들만이 찰 수 있는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공작님께서 부르신다.”
“아, 예.”
대답에 시종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별다른 반응 없이 곧바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녹스는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동시에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걷는 길 사이사이로 사람들의 시선이 진득하게 눌어붙었다. 부채로 입술을 가리고 웃는 자들, 대놓고 미간을 찡그리는 자들. 하지만 목 아래 붙은 볼로 타이 탓에 함부로 말을 걸지는 않는 작자들. 황태자의 목을 자르고 새롭게 공작 위에 오른 할리드에게 납작 엎드릴 줄만 아는 자들의 비난은 녹스로서도 딱히 감흥이 없었다. 아니, 감흥이 없어야 한다.
금으로 장식된 문을 지나 황금으로 지은 듯한 홀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녹스에게 이 공간은 아주 익숙한 곳이었으나 이제부터 가장 낯선 세계가 될 곳이었다. 라이네리오 공작가의 외동아들이 아닌 누군가의 노예로서 내딛는 첫발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