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
그러다 문득 녹스는 할리드와 눈이 마주쳤다. 할리드는 귀족들 사이에서 녹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녹스는 그와 시선이 마주친 시간이 아주 길다고 느꼈으나 사실은 아주 찰나였을 뿐이었다. 녹스는 그의 시선에서 벗어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와 눈을 맞춘 순간 호흡을 멈춘 것은 제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잘하고 있군. 네 덕인가?”
녹스가 돌아보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뒤에서부터 녹스의 턱 아래를 감싸 당겼다.
뒤로 기우뚱 기운 녹스의 몸이 누군가의 어깨에 닿았다. 녹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이제 제국의 단 하나뿐인 황족이자 황제. 펠티온 안드라스 다이달론츠. 그였다.
“…황제 폐하.”
“그리 부르지 않아도 내가 황제란 건 잘 알고 있어.”
황제는 싱긋 웃는 얼굴로 녹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턱 아래를 감싼 손은 떼어 내지 않은 채였다. 녹스는 그의 손안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생각보다 단단히 턱 아래를 붙잡은 손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그렇지?”
황제는 녹스와 눈을 맞추며 눈매를 휘었다. 녹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열여덟 살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펠티온과 녹스가 처음 눈을 마주했던 그때를.
* * *
황태자의 탄신 연이었다. 귀족들은 저마다 잔뜩 치장을 하고 황태자와 황후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값비싼 선물들을 들고 연회에 참석했다. 황제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황태자의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녹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황제가 황태자를 마땅치 않아 했다는 것을.
“황후께서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그러게요, 황제 폐하께서 참석하질 않았는데.”
“이유를 아는 분이 계실까요?”
귀족들은 저들끼리 모여 속닥거렸다. 녹스는 오늘 어떤 ‘소문’을 듣고 이 연회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을 아는 자는 아무래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는 라이네리오가 아버지의 손안에 스러져가고 있다고 해도 아직은 건재하다는 의미기도 했다. 녹스는 검푸른 정장을 입고 허리를 바르게 편 채 연회 홀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귀족들이 저마다 눈짓하며 저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녹스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꼿꼿이 존재할 뿐이었다. 귀족들은 저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녹스를 못마땅해하면서도 함부로 말을 걸진 않았다. 그 ‘라이네리오’가문이다. 지금 정점을 찍고 있는 황태자와 황후를 미는 가장 큰 가문. 만약 이변이 없다면 황제 자리에 앉을 황태자의 오른팔. 녹스가 원하지 않더래도 아버지의 행보 탓에 그의 가문은 그리 알려져 있었다.
귀족들은 저들끼리 떠들었다. 공식 자리가 아니면 얼굴도 비추지 않는 녹스 라이네리오가 이 자리에 나왔다는 사실은 라이네리오 가문이 완벽히 황태자를 지지한다는 증거라고. 하지만 녹스가 기다리는 것은 황태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제2황자. 펠티온 안드라스 다이달론츠께서 드십니다!”
2황자인 펠티온이었다. 그의 등장에 모두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권력이라고는 조금도 쥐지 못한 2황자의 등장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황태자의 탄신 연회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작년 2황자의 탄신 연회는 황후의 패악에 전부 망가졌다지. 자그마한 속삭임들이 오갔다.
“어서 오세요. 2황자.”
황후가 화사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황후는 펠티온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웃으며 맞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이렇게 직접 축하하러 올 줄 알았습니다.”
녹스는 황후의 그 말에 펠티온이 강제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황제가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황후의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제2황자 펠티온은 황후의 웃음에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형님의 탄신 연에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펠티온은 조금의 불만도 없는 사람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황후는 그런 그를 대놓고 비웃었다.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살살 부치며 그를 위하는 척 말했다.
“형제간의 사이가 좋아 어찌나 마음이 놓이는지 모릅니다. 황태자를 위해 그 어떤 권력도 손에 넣지 않고 얌전히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빈털터리 황자. 황후는 그것을 꼬집으며 그를 모욕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펠티온에겐 그 모욕에 대응할 권력이 없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쥐지 못한 황족. 그것이 펠티온이었다. 녹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펠티온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황태자를 못마땅해한다면 아마 제2황자인 펠티온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을 터.’
하지만 황제는 아직까지 아무런 행동이 없었다. 녹스가 보기에도 지금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황태자와 황후의 권력이 너무나 굳건하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소유한 다이아몬드 광산을 황후의 외척이 탐낸다는 소문도 있던데. 무시할 게 못 되겠군.’
녹스는 지나가던 하인에게서 샴페인을 한 잔 받아 들고서 가볍게 몇 모금을 넘겼다. 황후는 아직도 펠티온의 앞에 서서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태자, 이리 오세요. 아우가 왔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무엇합니까.”
그러자 황태자가 천천히 황후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아, 미안하군. 내가 볼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잠시 너를 잊었어.”
“…아닙니다. 바쁘시니 당연히 그럴 수 있지요.”
“이해해 줘서 고맙군. 너도 오래간만에 나온 김에 연회를 즐겼으면 좋겠어. 전 탄신일에 아무것도 즐기지 못했으니.”
황후가 직접 깽판을 놓은 것을 알면서도 황태자는 그렇게 말하며 두 팔을 벌렸다. 마치 무언가를 베풀어 주는 듯한 태도였다. 펠티온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저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쉽게 제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군.’
녹스는 펠티온을 살피며 그렇게 생각했다. 과시하기 좋아하고 남을 내리누르기 좋아하는 황태자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째서 황제가 황태자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제2황자인 펠티온이 눈에 들어온 거겠지. 소문에 의하면 제2황자인 펠티온은 자신의 궁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안쪽으로 더 파고들면 다른 이야기들이 있었다. 아마 다른 귀족들은 모를 이야기.
‘제왕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의 수준이 황태자와 비교도 안 된다고 했었지.’
녹스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마 그러니 황후가 저리 견제하지 못해 안달인 거겠지. 특히 2년 전, 황태자와 펠티온이 선보인 검투전에서 펠티온이 승리한 이후 자신만만했던 황후의 태도가 바뀌었다.
펠티온을 낳은 어미는 펠티온을 낳다 죽은 데다가 한미했던 가문 출신인지라 외척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황후는 처음엔 그를 크게 견제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대로 된 세력도 없는 2황자가 제 아들의 자리를 위협할 일은 없을 테니.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펠티온의 특출난 능력이 드러났고 황후는 그러면 그럴수록 그를 밟지 못해 안달이 났다. 아마 오늘도 그를 밟아 놓기 위한 준비를 했겠지. 그때였다. 황태자가 펠티온에게 샴페인을 건네었다.
“한 잔 들지?”
“아, 감사….”
펠티온은 한 손을 내밀어 샴페인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문득 황태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샴페인 잔을 잡으려는 펠티온의 손을 피해 샴페인을 그의 머리에 쏟아부었다.
“어머.”
“세상에….”
귀족들이 저마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입가를 가렸다. 황태자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펠티온을 향해 이죽거렸다.
“어디서 내가 주는 잔을 한 손으로 받으려 하지?”
“…….”
펠티온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샴페인이 그의 머리카락과 턱을 타고 흘렀다. 황태자는 빈 잔을 다시 한번 펠티온에게 내밀었다. 그의 뜻은 투명했고 펠티온은 그걸 거부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렇게 펠티온은 빈 잔을 두 손으로 받아야 했다. 그제야 황태자의 얼굴이 펴졌다. 황후 또한 그 장면을 즐거이 바라보고 있었다. 녹스는 이 재미없는 짓거리에 짧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녹스는 펠티온의 입매가 가볍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아마 이 굴욕을 감당하기가 힘든 거겠지. 하지만.
‘아직 이를 드러낼 때가 아니야.’
녹스는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속삭였다.
‘인내해, 지금은 인내해야 해.’
황후와 황태자는 펠티온이 잔을 받은 후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연회를 충분히 즐기고 갔으면 좋겠군.”
그것은 샴페인을 뒤집어쓴 꼴을 하고도 연회장을 떠나지 말라는 일종의 명령이었다. 펠티온은 대답하지 못했고 황태자와 황후는 상관없다는 듯 뒤돌아 그를 떠났다. 황후와 황태자에게로 귀족들이 우르르 몰렸다. 제2황자, 권력 없는 펠티온에게 관심을 주는 귀족들은 없었다. 녹스는 귀족들이 황후와 황태자 쪽으로 몰린 것을 보고 천천히 펠티온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
괜찮다고 대답하려던 펠티온은 녹스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녹스 라이네리오. 황태자를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가문. 아마 그렇게 생각했겠지, 녹스는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부터 할 일은 그에게 잔인한 것이며 그를 시험하기 위한 일이니까.
“황태자께서 짓궂으셨습니다.”
“…그런가.”
제2황자는 방금의 굴욕이 꽤 큰 타격이었다는 듯 목소리가 한 박자씩 늦었다. 펠티온과 녹스가 대화하기 시작하자 귀족들은 물론 황태자와 황후의 시선도 둘에게로 몰렸다. 펠티온은 녹스를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녹스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불편하신가 봅니다.”
“…그렇지 않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녹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빼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손에 닿았다. 녹스는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서 그 반지를 빼냈다. 그리고 곧 그것을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