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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24화 (24/158)

제24화

땡그랑.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반지가 바닥에 떨어졌고 펠티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황후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펠티온은 가만히 녹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녹스는 떨어진 반지에 시선을 주다 곧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잠시 손이 미끄러졌군요.”

녹스는 그를 모욕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니 실제로 모욕하고 있었다. 펠티온이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녹스는 다시 한번 속으로 속삭였다.

‘인내하십시오. 당신이 기꺼이 앞으로의 굴욕을 참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십시오.’

“뭐 하나요. 2황자?”

황후가 깔깔거리며 펠티온을 부추겼다.

“귀한 라이네리오의 반지가 떨어졌는데 어서 주워 주지 않고요.”

황후는 녹스를 향해 만족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녹스는 황후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는 펠티온의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녹스는 곧 반지를 주워 몸을 일으키는 펠티온 쪽으로 상체를 조금 숙였다. 그리고 황후와 황태자에게 보이지 않게끔 속삭였다.

“사람을 시켜 제 가문으로 보내시지요.”

그리고 곧 허리를 펴고 걸음을 돌렸다. 펠티온은 주운 녹스의 반지를 꾹 쥐었다.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분노로 뜨여진 눈은 쉽사리 감기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인내해 냈다. 녹스 라이네리오에게 모욕받았음에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저 정도면 괜찮겠어.’

녹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연회 홀을 벗어났다. 이 자리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가문으로 사람을 보내라고 언질해 두었으니 아마 제2황자는 그 말에 대해 고민하다 떠보듯 제게 사람을 보낼 거다. 그때 자신의 의사를 밝히면 된다. 저는 아버지와 뜻이 다르다고. 그대의 힘이 되겠다고.

그렇게 녹스는 저택으로 돌아갔고 펠티온에게선 한참 동안 소식이 없었다. 반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후 발티아스 데론이 가문 안으로 잠입했다. 녹스는 그 사실을 기민하게 눈치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펠티온의 뜻을 알아차렸다고 생각했다.

‘나와의 관계를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정보만 주고받자는 건가.’

조심스러운 것은 나쁘지 않다. 특히 라이네리오 가문이 황태자를 지지한다고 알려져 있는 지금,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녹스는 기꺼이 그의 뜻에 응했다.

이후 펠티온에게 이리 철저히 이용당해 버려질 줄도 모르고.

* * *

녹스는 예전의 기억에서 벗어났다. 황제는 아직 녹스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펠티온도 아주 오래전의 그 일을 떠올렸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은 사람처럼 이어 말했다.

“할리드는 내 형제 같은 놈이지. 귀족 사회에 쉽게 섞일 수 없는 성격이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네가 있으면 꽤 어렵지 않게 섞여 들 수 있겠어.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놈을 골라. 그리고 명실상부한 공작으로 만들어 놔. 할 수 있겠지?”

황제의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명백한 명령이었다. 녹스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황제는 녹스를 말 잘 듣는 고양이 취급을 하며 머리카락에 잠시 코를 묻어 입을 맞추고는 손을 떼어 냈다. 녹스는 그제야 똑바로 설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너무 등 뒤로 바짝 다가와 있는 터라 함부로 돌아볼 수가 없었다. 황제는 녹스의 등 뒤에 선 채로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가 할리드의 노예가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

“그래, 내 형제가 침대 위에서 네게 다정하게 대해 주던?”

황제는 그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

“할리드는 자네에게 꽤 이를 갈아 왔어. 물론 나도 자네를 꽤 미워하고 있고 말이야.”

“저는….”

“쉿,”

황제는 설핏 웃으며 그에게 조언했다.

“네가 할 것은 할리드의 분노를 받아 내는 것밖에 없어. 변명은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 좋아. 그럴수록 가증스러워질 뿐이니.”

“그래, 자신의 하인이었던 자에게 다리를 벌리는 건 즐거웠나?”

녹스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대답해야지. 노예가 황제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녹스는 목이 메이는 것을 느꼈다. 하나 경고처럼 내려진 펠티온의 말에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녹스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즐거, 웠, 습니다.”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황제는 그런 대답을 강요해 놓고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곧 그의 등 뒤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황제는 언제 그의 뒤에 섰냐는 듯 멀어졌다. 녹스가 뒤돌아봤을 땐 엘러딘 바이스와 함께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발티아스 데론은 어딜 갔나?”

“아프답니다.”

“아프기는 무슨. 그럴 줄 알았지.”

황제와 엘러딘 바이스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녹스는 잠시 귀 한쪽을 손으로 막았다. 펠티온의 속삭임이 아직 귓가에 남은 것 같았다. 녹스는 멍청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팔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자가 있었다. 할리드, 그였다. 녹스는 잠시 비틀거리다 겨우 바로 서며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와 무슨 말을 했지?”

“……그리 중요한 말은. 읏.”

손아귀가 팔을 꽉 조여 왔다. 둔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녹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할리드는 그런 그를 고요히 내려다보다 이내 그를 끌고 테라스로 향했다. 그의 거침없는 걸음에 녹스는 감히 버틸 생각도 하지 못했고 귀족들은 길을 내주었다. 귀족들은 서로 눈웃음을 주고받으며 녹스를 노골적으로 훑어 댔다.

‘새 공작님의 애첩이라더니.’

‘황제 폐하께 수작 거는 것을 보았나요? 주제도 모르고.’

‘본디 저런 자였겠죠.’

‘원수에게도 다리를 벌려 살아남는 그런?’

‘맞습니다.’

아하하하, 누군가의 의미 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녹스는 곧장 테라스로 처박혔다. 그리고 자신을 난간 사이에 끼운 채 셔츠를 헤집어 뜯는 할리드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주인, 주인님 여기서는….”

“닥쳐.”

할리드의 손이 녹스의 둔부를 강하게 쥐어 왔다. 녹스는 자연히 허리에 바싹 들어가는 힘에 몸을 굳혔다. 헤집어진 셔츠 사이로 할리드는 제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로 얇은 피부를 물어뜯었다.

“아…!”

녹스의 작은 신음에 할리드는 더 흥분한 듯 배어 나온 피를 핥으며 피부를 빨아 댔다. 흐윽, 아. 녹스는 신음을 목 안으로 삼키며 난간을 꽉 쥐었다. 할리드는 입술을 떼어 내고 자신의 잇자국이 진하게 남은 목덜미를 살피며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물어 놓은 상처 위를 손톱 끝으로 꾹 누르며 짓씹듯 하나하나 발음했다.

“넌 내 소유야.”

“알고, 있습니다.”

“넌 내 거야.”

녹스는 할리드가 어떤 지점에서 화가 났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황제에게 아양이라도 떠는 것처럼 보였을까. 녹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그런 것이었다. 녹스는 난간을 꽉 쥐고 있던 손을 올려 할리드의 목에 팔을 걸었다. 일단, 이곳에서 곤욕을 치르지 않기 위해선 그를 달래야 했다.

“…전 주인님의 것입니다.”

녹스의 팔이 할리드의 목을 감싸자 할리드의 몸이 멈칫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녹스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전 주인님의 소유입니다.”

“…그래,”

으르렁거리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할리드는 그의 허리를 끌어당기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울대 위로 이를 세웠다. 그 위를 꽉 무니 목 안에서 울리던 고통의 신음이 옅게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피가 나도록 피부 위를 물자 팔 안에서 흠칫대는 몸이 느껴졌다.

그를 두 번이나 안았지만, 아직 그가 완전한 제 소유라는 사실이 와닿지 않았다. 십여 년 동안 갈망하고 원망해 왔던 자가 제 아래 깔려 있어도 마치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이 느껴져 녹스를 항상 한계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지금 그가 직접 입으로 말한 것에. 비로소 그가 제 손안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할리드는 그것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마치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 짐승 같은 꼴을 한 녹스. 그것이 할리드의 굶주림을 충족시켜 주었다. 할리드는 자신이 물어 낸 상처의 피를 핥았다. 피 맛이 감도는 피부는 매끄러웠고 그 팔 안에 수그린 짐승 같은 태도는 그저 사랑스럽기만 해서….

“허.”

할리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녹스는 갑작스러운 할리드의 반응에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할리드는 잠시 그를 품에서 떼어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사랑스럽다니. 녹스 라이네리오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니.’

자신을 버린 그가, 자신을 배신한 그가. 할리드는 미간을 구긴 채로 몇 발자국 더 그에게서 멀어졌다. 난간에 기대어 선 녹스가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불렀다.

“…주인님?”

자신을 주인이라 부르는 그 목소리까지도 할리드에겐 달았다. 드디어 제 손에 들어온 녹스라는 존재는 말 그대로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할리드는 되새겼다. 그가 자신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배신했는지. 그는 되새기고 되새겼다. 마치 억지로 잊지 않으려는 것처럼.

할리드는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손 틈새로 녹스의 모습을 보았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불행해야 한다. 그를 사랑스럽게 여기면 안 된다. 그는 자신의 안에서 고통스럽고 불행해져야 했다. 자신이 꿈꾸던 것은 그런 것이다. 자신이 괴로웠던 만큼 그 또한 괴로워지는 것이 자신의 소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할리드는 곧 녹스를 등지고 서둘러 테라스를 벗어났다. 마치 도망치듯이. 녹스 라이네리오라는 존재에게 사랑스러움을 느껴 버린 자신을 부정하듯이.

“…아.”

녹스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할리드를 보며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나. 녹스는 단추가 다 뜯어진 셔츠와 조끼를 만지작거렸다. 할리드가 테라스를 나설 때 짝 걷힌 커튼 사이로 황금색 빛이 테라스를 잠시 비췄다 사라졌다. 녹스는 푸른 빛만 어른거리는 테라스에 홀로 남았다. 셔츠를 여미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또 물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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