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25화 (25/158)

제25화

발티아스 데론은 자신의 방에 처박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황제의 부름을 받들어 연회에 참석해야 했지만 할리드가 그의 노예를 데려온다고 했을 때 그는 연회 참석을 포기해야만 했다. 녹스 라이네리오, 자신이 빼앗은 공의 진짜 주인.

“후작님, 정말 오늘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셔도….”

발티아스는 곧장 손에 잡히는 책을 집사 쪽으로 집어 던졌다. 퍼억! 책에 얻어맞은 집사는 비틀거리다 이내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입을 다문 채 허리를 숙였다.

“시, 시끄러워. 생각 중이니까.”

“죄송합니다. 생각이 있으셨을 텐데.”

발티아스는 그렇게 손톱을 물어뜯다가 따끔거리는 고통에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엄지손톱이 반쯤 파먹혀 피가 나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구기며 곧 검지 손톱을 입에 물었다. 그는 불안했다. 녹스 라이네리오가 자신이 가로챈 공에 대해 이야기할까 봐. 이제 노예가 된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줄 자는 없겠으나 혹여나 황제 폐하께서 그 사실을 알아챌까 봐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입을 다물게 만들어야 해….”

그의 검지에도 금세 피가 비쳤다. 하지만 그는 손톱을 물어뜯는 걸 멈추지 않으며 골몰했다. 녹스 라이네리오의 입이 어떻게 해야 열리지 않을지.

발티아스는 라이네리오 가문에서 첩자 노릇을 할 때 녹스의 손에서 나온 정보를 물어다 펠티온에게 전달했다. 차분한 눈빛. 가문의 중요한 문서를 빼돌림에도 침착하던 손끝. 덜덜 손을 떨며 서류를 받아 내던 자신과는 달랐던 인물.

발티아스 데론은 녹스 라이네리오에게 지독한 질투를 느꼈다.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인물. 그래서, 그렇기에 그는 녹스의 공을 가로챘다. 어차피 모든 걸 가지고 있었잖아. 바닥을 기어 본 적 없는 자가 바닥을 기어 보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처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도 날아볼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는 합리화하고 또 합리화했다.

“어, 어떻게 입을 다물게 만들지?”

그의 눈이 어두운 방 안에서 번뜩였다. 그의 머릿속은 녹스로 가득했다. 녹스, 녹스 라이네리오. 어떻게 해야 그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까. 발티아스 데론은 정답 없는 문제를 풀기 위해 골몰했다.

그리고 그 시각, 황제는 자신을 찾아온 할리드를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그래, 네 노예에게 손끝 좀 댔다고 따지러 왔나?”

“…….”

“딱 맞혔군. 아무리 그대의 것이라고는 하나 결국엔 내가 내린 것이지 않나. 어째 이놈이고 저놈이고 말을 안 들어. 그렇지 않나 바이스?”

“그러게나 말입니다. 데론 후작도 오늘 갑작스럽게 아프다며 연회에 참석하지 않더니 이쪽은 자기 노예에게 손을 댔다고 감히 폐하께 따지러 오다니요. 죽을죄입니다. 아주.”

“그렇게 말하니까 또 죽을죄는 아닌 것 같군. 자네는 과장하는 경향이 있어.”

“그렇습니까?”

할리드는 농담 따 먹기 하듯 이야기하는 두 남자 사이에 끼어 머리를 짚었다.

그는 지금 황제에게 인사한 후 녹스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었다. 돌아가면 녹스를 방에 처박아 놓고 한동안 찾지 말아야지. 그리고 아주 잠깐이나마 들었던, 그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모조리 내동댕이쳐야지.

할리드는 다시 한번 그에 관한 생각이 나자 낮게 씨근덕거렸다. 그리고 그 행동으로 제 기사의 속이 불편하다는 걸 알아챈 펠티온이 낮게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왜, 그대의 노예가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을 했나 보지?”

“…아닙니다.”

“아니기는.”

황제는 자신의 형제와도 같은 할리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그에게 낮게 속삭였다.

“그를 데리고 내 침소로 올 텐가?”

“…….”

“자네는 노예를 대하는 방법을 몰라. 그대의 심성이 고운 탓인지 아니면 내가 날 적부터 황족이기 때문에 그런 건진 몰라도 말이야.”

그는 자신의 형제에게 충고하듯 이야기했다.

“내가 알려 줄 수 있어. 그것을 대하는 방법이나, 태도를.”

할리드는 이를 악물었다. 노예를 대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그 얼토당토않은 감정을 내다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자신의 품 안에서 떠는 그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역겨운 자신 또한 지울 수 있게 되는 것인가. 할리드는 이를 아득 문 채로 황제에게 물었다.

“알게 되면, 바뀌는 것이 있습니까?”

“무엇이든, 자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황제는 두 팔을 벌렸다. 그 모습은 자비로워 보였으나 그 누군가에게는 지옥과 다름이 없으리라. 그래, 녹스 라이네리오. 그에게는.

“만약 노예를 다루는 법을 알게 된다면….”

할리드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하지만 그 건조한 목소리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혼란을 펠티온은 놓치지 않았다.

“그를 사랑스럽다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하, 자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황제는 진정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입술만이 벌어져 가짜 미소를 만들어 냈다. 펠티온은 할리드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노예란 물건이야.”

“…….”

“그대는 테이블을 사랑스럽다고 느끼나?”

펠티온은 할리드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할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는 말이므로. 그 누구도 테이블을 사랑스러워하진 않는다. 펠티온은 녹스라는 존재가 그 테이블과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네는 노예를 다루는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어.”

“…….”

할리드는 말이 없었다. 그의 머리가 찬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불행해져야 함이 옳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만큼 고통에 허덕여야 함이 옳다.

할리드는 그를 그리 만들고 싶었다. 그를 사랑스러워하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리하여 할리드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알려 주십시오. …노예를 다루는 방법을.”

할리드는 녹스를 고통의 구렁텅이로 집어넣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할리드 비아는 녹스 라이네리오를 지독하게 증오해야 마땅하니까.

* * *

녹스는 그렇게 테라스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는 방치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막상 녹스는 별다른 생각 없이 테라스에 있는 벤치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단추가 다 나간 셔츠를 여미고 있었다.

연회장 안에선 연신 음악 소리가 들렸으며 누군가의 가벼운 웃음소리, 발소리, 떠드는 소리가 이어졌다. 녹스는 그 옆에 있는 수조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푸른 수조 속, 머리끝까지 차오른 물 안에 잠긴 기분. 동화 속에 나오는 인어가 된 기분. 그러나 너무나도 추해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는 그런 인어.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녹스는 마음껏 잠겨 있을 수 있었다. 누군가 그의 수조에 침범하지만 않았다면 그는 계속해서 잠겨 있었을 테다. 누군가 커튼을 걷고 테라스 안으로 들어오다 멈칫, 멈추어 섰다.

“아, 선객이 있었군요.”

“…아.”

녹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여기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노예다. 그렇다면 자신이 테라스를 벗어나는 게 맞았지만 할리드가 아무런 명령도 없이 가 버린 지금, 자신은 그가 내버리고 간 자리에 얌전히 서 있어야 했다.

“…제가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상대방은 녹스를 알아본 것 같았다. 그리고 꽤 친절하게 나왔다. 녹스는 이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잠시 녹스를 훑어보았다. 기분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그저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피는 느낌. 녹스는 여미고 있던 셔츠를 더 꾹 잡아 쥐었다. 자세히 보면 자신의 몰골이 보일 터였다.

“저는 곧 돌아갈 생각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녹스는 잠시 그가 자신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곧 자기 외투를 벗어 녹스에게 내밀었다.

“그러니 이걸 걸치고 계십시오.”

“아, 그러실, 필요 없습….”

“그리 비싼 물건도 아닙니다.”

“…….”

확실히 그의 말대로 그가 내미는 외투는 유명 의상실의 것도 화려한 장식이 달린 것도 아니었다. 녹스는 그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을 알았다. 적만 남은 이 연회 홀에서 자신에게 유일하게 호의를 베푸는 남자를 만난 기분은 생각보다…. 그래,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녹스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말씨로 대답했다.

“…언젠가 꼭 돌려드리겠습니다.”

“쓰고 버리셔도 상관없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한 뒤 녹스에게 다가와 외투를 쥐여 주었다. 녹스는 그 외투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남자는 녹스에게 외투를 전달한 후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바로 테라스를 나가려 했다. 그런 그를 녹스가 잡았다.

“혹시, 이름이라도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자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하다 이내 대답했다.

“에스테리온 론더입니다.”

론더, 론더 가문이라면 녹스도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오 년 전쯤 가주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버린 가문이었다. 흔하디흔한 몰락 귀족. 하지만 자신의 처지와 비교할 것은 못 되었다. 녹스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꼭…. 갚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남자는 무뚝뚝하게 대꾸하곤 그대로 테라스를 나갔다. 녹스는 그렇게 외투를 쥔 채 다시 테라스에 혼자 남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아무 생각 없이 베푼 호의에 녹스는 조금이나마 숨쉬기가 편해졌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수조 안에 숨을 불어 넣어 준 기분이었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