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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26화 (26/158)

제26화

그렇게 녹스는 처음 보는 남자가 건넨 외투를 두른 채 테라스에 서 있었다. 시간은 흘렀고 마음껏 연회를 즐기던 자들은 하나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불이 꺼지고 고요가 찾아올 때. 그들이 남겨 놓은 음식과 떨어뜨린 부채 따위만이 바닥을 뒹굴 때. 누군가 다시 한번 녹스를 찾았다.

“공작님과 황제 폐하께서 부르신다.”

그를 찾은 것은 황제의 시종이었다. 녹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공작, 할리드가 부른다는 건 잘 알겠는데 거기에 황제 폐하께선 왜 끼시는 건지. 녹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황제의 시종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커튼을 걷자 휑하니 비어 있는 홀이 보였다.

황제의 시종은 그곳을 가로질러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녹스는 얼굴을 찌푸리는 대신 얌전히 그 마차에 올라탔다. 황제의 시종은 다리를 꼬고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아라.”

“예…?”

“반항하지 말고.”

“그게 무슨….”

“네까짓 게 불편하게 할 분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겠지.”

“…….”

녹스는 지금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황제가 할리드와 있으면서 자신을 불러냈다는 것 정도는 파악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이 늦은 시각에 자신을 부른 건진 모르겠지만 연회에서 했던 말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할리드를 명실상부한 공작으로 만들어 두라고 했던가. 녹스는 어쩐지 기분이 한 층 들뜨는 것을 느꼈다.

‘할 일이, 생길 수도 있나.’

그저 가라앉아 있는 것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녹스는 속에 응어리져 있는 무언가가 조금 녹아내리는 듯했다.

마차는 곧 황제의 궁 앞에서 멈추었다. 황제의 궁 안에 있는 가장 큰 성. 제국의 최정점이 기거하는 곳. 귀족일 적 방문해 본 적은 있지만 노예로서는 처음 밟는 땅. 녹스는 마차에서 내려 황제의 시종을 따라나섰다. 시종은 계단을 오르고 올라 복도를 걸었다. 녹스는 이상함을 느꼈다. 이곳으로 가면 나오는 건 분명.

“폐하의 침소다.”

“…….”

녹스는 기묘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리석은 녹스는 그럼에도 그 불안감을 애써 외면했다. 황제의 침소란 침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곳이니까. 가장 비밀스러운 정보가 오가는 곳. 그러니,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했다.

“폐하, 공작님의 노예가 도착했습니다.”

시종이 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녹스의 도착을 알렸다. 곧바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이거라.”

“예.”

시종이 곧 녹스를 향해 눈짓했다. 녹스는 외투를 꾹 잡은 손 그대로 황제의 침소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화려한 테이블 양옆으로 할리드와 펠티온이 앉아 있었다. 녹스는 홀로 그 방 안으로 들어가 중간 자리에 섰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황제는 편한 셔츠를 걸치고 있었고 할리드는 저택에서 입고 온 옷 그대로였다. 테이블 옆으로 넓게 펼쳐진 침대는 녹스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황제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술병을 들어 손수 뚜껑을 땄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야.”

이어 할리드의 잔에도 술을 직접 채웠다. 느른한 손짓엔 여유가 보였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녹스와는 다르게. 황제는 상냥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이 밤중에, 노예를 그것도 공작의 애첩을 왜 불렀을 거라고 생각하나?”

녹스는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당장, 옷 벗어.”

녹스는 짧게 헐떡였다.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저, 같은 게….”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

황제는 상냥했고 또 단호했다. 녹스는 외투를 여며 쥔 손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할리드는 녹스의 손에 쥐여 있는 외투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사내의 것인데 저건 또 어디서 났단 말인가.

“내가 없는 사이 다른 사내를 홀렸나 보지?”

“아, 아닙, 아닙니다….”

“뭐, 그건 모를 일이지.”

황제가 짓궂게 말했다. 녹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즐겁다는 듯 미소를 띠고 다시 한번 녹스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내가 선택했고 네 주인이 허락했으니 앞으로 일어날 일에 최선을 다한다.”

황제는 잔을 들어 술로 목을 가볍게 축였다.

“그것이 네가 맡은 바이지.”

황제의 시선이 녹스의 벌어진 외투 틈으로 가 닿았다.

“한 번만 더 말하지. 옷 벗어.”

녹스는 그 말에 반항할 수 없었다. 그래서 흔들리는 눈동자로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녹스가 아무리 애타게 그를 바라보아도 할리드는 읽을 수 없는 무표정으로 녹스를 방치했다. 녹스는 숨을 들이켜려 했다. 하지만 호흡이 잘되지 않았다.

녹스는 저도 모르게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자 황제의 눈썹 끝이 치켜 올라갔다. 녹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러선 거리만큼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외투를 벗었다. 떨어진 외투 아래 가려져 있던 다 해진 조끼와 셔츠가 보였다.

녹스는 헤집어진 조끼와 셔츠를 벗고 이내 하의에 손을 대었다. 펠티온은 녹스의 손끝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는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의 입술에 즐겁다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언젠가 당당히 내 눈을 쳐다보던 형님의 하수인이 내 앞에서 옷을 벗고 있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군. 그렇지 않나. 할리드?”

“……그렇습니까.”

할리드는 녹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표정은 그저 무심했으나 사실 속은 엉망진창이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옷을 벗고 있는 녹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만들어 낸 상황임에도. 그가 그 명령을 받들지 않을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앎에도. 이 모든 것이 자신이 그를 사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마저도.

할리드는 인내했다. 그가 무슨 수치를 받더라도, 그는 노예이기에 어떤 취급을 받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차피 그는 노예니까. 존중해 줄 가치가 없는 인물이니까.

녹스가 속옷까지 다 벗고 나자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흰 몸이 비쳤다. 그의 몸에 남은 것은 그가 노예임을 증명하는 볼로 타이 하나뿐이었다. 이 상황에도 굽지 않은 그의 곧은 몸은 보는 남자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있었다.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올곧이 명령을 따르는, 노예임에도 귀족적인 이 남자를 꺾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들었다. 황제는 그가 사내의 정복욕을 자극한다고 생각했다. 이어 펠티온은 술잔을 내려놓고 의자를 테이블에서 쭉 밀어 앉았다. 끼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 뒤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명령했다.

“여기까지.”

황제의 턱 끝이 제 다리 사이의 바닥을 가리켰다.

“네발로 기어 와.”

녹스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여전히 숨이 들이마셔지지 않았다. 녹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숨을 애써 뱉어 내는 것밖에 없었다. 녹스는 그렇게 호흡을 정리하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항상 꼿꼿이 서 있던 몸이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곧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무릎과 손바닥에 부드러운 카펫이 만져졌다. 녹스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바닥을 기었다.

곧은 척추 선과 어깨로 사내들의 시선이 닿아 왔다. 그 시선 아래 녹스는 바닥을 기었다. 보이지 않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녹스는 부러 위를 바라보지 않았다. 붉은 카펫만을 보며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어 기었다. 그의 자존심을 부수기에 충분했다. 사내들은 어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녹스는 자신조차 남아 있는 줄 몰랐던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없을 경험. 타인의 앞에서 맨몸으로 바닥을 기는 이 수치감. 녹스는 황제가 가리킨 바닥. 테이블 아래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리고 있는 녹스의 턱을 잡아 저와 억지로 눈을 맞췄다.

“역시….”

황제의 느른한 미소는 녹스에게 악마와도 같았다.

“사내를 동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다니까. 그렇지? 할리드 비아.”

“…….”

“그러니 이렇게.”

황제의 다른 손이 그의 목덜미와 목울대에 남은 자국들을 쓰다듬었다. 녹스는 고개를 쳐들고 펠티온이 목울대를 쓰다듬는 손길을 얌전히 받아 내야 했다.

“잔뜩 사랑받은 자국이 남아 있겠지.”

황제는 녹스의 머리채를 잡아 그의 얼굴을 자기 하의 앞섶에 대었다.

“공작에게 사내의 것을 빠는 방법 정도는 배웠겠지.”

녹스가 입술을 달싹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그의 머리채를 놓아주고는 고양이를 쓰다듬듯 한 번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얌전히 정리되어 있던 머리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이 그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일이었는지 황제가 느슨하게 미소 지었다.

녹스는 천천히 손을 올려 황제의 앞섶에 손을 대었다. 아니 대려 했다. 미소 짓던 황제가 단번에 미간을 찡그렸다.

“씁.”

황제는 그의 목에 걸려 있는 볼로 타이를 빼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의 손을 부드럽게 등 뒤로 보냈다.

“어느 짐승이 손을 쓰나.”

황제는 앉은 채로 손수 허리를 숙여 그의 두 손을 등 뒤로 묶었다. 노예임을 증명하는 볼로 타이가 그의 손목을 꽉 옥죄었다. 황제는 그러고 나서야 허리를 세웠다.

“자, 다시 해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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