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그렇게 다음 날 아침, 녹스의 얼굴은 그저 차분하기만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녹스는 할리드가 일어나는 시간에 맞추어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어 놓았다. 주인이 부르면 언제든지 응해야 하니까.
실제로 이른 오전이 되자 마를렌이 그를 찾아왔다.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아, 네.”
녹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 할리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 복도를 지나자 곧 할리드의 집무실이 보였다.
똑똑-
“공작님, 녹스가 왔습니다.”
“들어와.”
마를렌이 문을 열어 주자 녹스는 그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집무실 가운데 할리드의 집무 책상이 있었고 양옆으로 책상 두 개씩, 총 네 명의 부관들이 보였다.
녹스는 천천히 할리드에게 다가갔다. 할리드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녹스에게 명령했다.
“내 뒤로 서.”
녹스가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바로 할리드가 앉아 있는 의자 왼쪽 뒤편으로 가 몇 발자국 떨어져 섰다.
할리드는 서류에 꽤 집중한 얼굴이었다. 살짝 일그러진 미간이 녹스가 선 자리에서도 보였다. 녹스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려 그가 살피고 있는 서류의 내용을 읽었다.
‘빈센 영지에 관한 서류인가.’
본디 라이네리오가 관리하던 영지. 지금은 아무래도 할리드의 손으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녹스는 서류의 내용이 영지의 겨울나기에 대한 것이라는 걸 파악했다. 확실히, 빈센 영지는 광산을 중심으로 발전한 곳이라 겨울 물자 지원이 필수였다.
녹스는 서류에 적힌 물자 양을 확인했다. 부관의 확인을 한 번 거친 후 할리드에게 올라오는 모양인지 위쪽에 작은 사인이 남아 있었다. 녹스는 부관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한 번씩은 얼굴을 보았던 자들이다.
‘전부 수준이 나쁘진 않은데.’
할리드가 용병 출신이라 이런 면에 약한 만큼 그가 성장할 때까지 받쳐 줄 보좌관들은 필수였다. 녹스는 할리드가 빈센 영지에 관련된 서류에 사인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 장 한 장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할리드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리라.
‘빈센 영지는 괜찮아. 그런데….’
빈센 영지의 서류가 올라왔다면 꼭 딸려 오는 영지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데이턴 영지. 실제로 그다음 서류가 바로 그곳에 관한 내용이었다. 데이턴은 빈센 영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옆으로는 센느 라는 큰 강이 흘렀고 빈센과 데이턴 사이에는 커다란 산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흔히 착각하는 것들 중 하나가…….
“주인님.”
녹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할리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데이턴 영지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고 곧장 사인하려 했던 할리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녹스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할리드를 못마땅하게 만들 거라는 것도 알았다. 할리드는 제게 다리를 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을 거라고 녹스에게 말했으니까.
하지만 녹스는 뭔가 할 것이 필요했다. 자신을 잃지 않는 최소한의 방법으로. 그리고 할리드가 공작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이고 앉아 후회하지 않고 차근차근 배워 나가기를 바랐다. 제게 버려진 아이가 이 이상 불행해지길 바라지는 않으니까.
“뭐지?”
“데이턴에 그만한 물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 할리드는 물론 방 안에 있던 모든 부관이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할리드만을 바라보았다. 제 말을 들을지 말지는 그의 선택에 달려 있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의 부관들도 귀를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누군가는 옅은 짜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감히 노예가 자신들이 살펴 올린 보고서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녹스는 차근차근 할리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 시작했다.
“빈센 영지는 양옆에 산이 자리 잡고 있는 땅입니다. 겨울이 되면 물자 지원은 필수죠.”
“가까운 곳에 있는 데이턴과는 무엇이 다르지?”
할리드는 의외로 차분하게 물어왔다. 녹스는 할리드의 눈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진지했다. 녹스의 조언을 들을 마음이 있어 보였다. 녹스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할리드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고 더 배우려 한다는 것에 대해서.
“데이턴 옆으론 큰 강이 흐릅니다. 그리고 그 강은 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대도시인 글라함과 이어져 있습니다.”
할리드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는 건 겨울나기에 글라함이 데이턴에게 도움을 준다는 말인가?”
“도움을 준다기보단 도시 사이의 무역이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강이 커 겨울에도 얼지 않거든요.”
할리드가 이해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가 가볍게 덧붙였다.
“물론 겨울 물자가 아예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순 없으나 지금 서류에 적힌 것의 3분의 2만을 준비하셔도 무리 없을 걸로 생각됩니다.”
“…그렇군.”
“수도와 먼 곳에 있는 영지들이라 직접 가 볼 일이 없어 누구나 쉽게 하는 실수들이니 기억해 두시면 좋습니다.”
그렇게 말을 끝낸 녹스는 조용히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할리드는 조용히 그 서류를 옆으로 밀었다. 아마 부관들도 녹스의 설명을 들었으니 서류를 다시 작성해 올릴 것이다. 녹스는 다시 뒤로 물러나 뒷짐을 지고 섰다. 시선은 바닥에 깔린 채였다.
할리드는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녹스에 대해 가만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으로 내게 조언을 한 걸까. 물론 파티장에서도 그에게 조언받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당하고 난 후, 그래. 그 추잡스러운 짓거리에 유린당하고 난 후 제게 조언이라니.
할리드는 녹스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자신을. 할리드라는 나 개인을.
그는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묘하게 기뻤다. 그렇기에 조용히 다음 장의 서류를 당겨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은 영지 관리에 아직 서투르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용병으로서 전투에 임할 줄만 알던 자신이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훌륭한 공작이 되는 것은 무리다.
그런데 그런 자신 옆에 녹스가 있었다. 그것도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조용히 조언하는 그가. 할리드는 저도 모르게 서류를 꽉 쥐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세뇌하듯 말했다.
사랑스러워해선 안 된다. 사랑스러워해선 안 된다. 그가, 이 노예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속삭임과는 반대로 입술이 움직였다.
“앞으로도 잘못된 것이 보이면 조언해도 상관없어.”
“…예?”
“네 조언을 듣겠다고.”
“아.”
녹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한 번 부서졌던 기대가 아무는 게 느껴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오로지 노예로서 그의 명령대로 다리를 벌리는 일 외에 자신의 자아를 지킬 수 있는 그런.
“…감사, 합니다.”
목이 조금 멨다. 녹스의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리드는 대답하지 않은 채 서류를 들여다보며 사각거리는 펜 소리만 낼 뿐이었다. 녹스는 남모르게 천천히 심호흡했다.
아이가, 그가. 날 필요로 해 준다면 자신은 언제든지 손 내밀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뒤 짤막한 조언이 몇 번 더 오갔다. 할리드는 녹스의 조곤조곤한 설명에 귀 기울이며 서류를 고쳐 나갔고 그렇게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났다.
할리드는 후, 숨을 내쉬며 잠시 의자에 기대 미간을 찡그렸다. 하루 동안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량이 너무 많았다. 할리드는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녹스가 했던 말을 찬찬히 되새겼다.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도 올리라 할까요.”
녹스가 물었다.
“아니, 됐어. 오늘은 이만 끝낼 테니까.”
벌써 9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확실히 아직 서류 작업에 익숙지 않은 할리드에겐 머리 아플 시간이었다. 초기엔 적당히 배워 가며 천천히 진행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할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부관들도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녹스는 할리드를 따라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할리드에게선 다른 명령이 없었다. 그렇기에 녹스는 그의 뒤를 세 발자국 정도를 남겨 놓고 따랐다. 할리드가 향한 곳은 아주 자연스럽게도 자신의 방이었다. 녹스는 천천히 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할리드는 그에게 들어오라는 소리조차 따로 하지 않았다. 녹스가 따라 들어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양 문을 열어 놓고 안으로 들어섰다. 녹스가 조금 더 느리게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할리드는 천천히 제 목에 걸려 있던 크라바트를 풀며 녹스를 돌아보았다.
“누워.”
녹스는 그의 명령에 따라 침대 위에 누웠다. 할리드는 자신의 셔츠를 대충 풀어 넘겨 던진 뒤 녹스의 몸 위로 육식의 짐승처럼 느른하게 타고 올랐다. 그리고 툭, 툭 녹스의 조끼를 풀어 젖히고 허리를 숙였다.
“읏…!”
할리드가 얇은 셔츠를 사이에 두고서 녹스의 유륜을 깨물었다.
할리드는 제 몸 안에서 떠는 녹스를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사랑스럽더라도 사랑스러워해선 안 된다. 그는 사랑스럽지 않다. 이건 그저 제가 주는 쾌락에 무너지고 우는 모습에서부터 느껴지는 충족감일 뿐이라고.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