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아침부터 저택이 소란스러웠다. 할리드가 회의에 참석하러 황궁으로 가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후 정식으로 열리는 귀족 회의 자리는 황제가 전 황태자의 머리를 잘랐던 날 받쳐 주었던 가문뿐 아니라 백작위 이상의 귀족들이 모두 참여하는 대회의였다.
할리드는 아침부터 귀찮다는 얼굴로 옷시중을 받았다. 하녀들이 부지런한 손길로 그의 머리를 만졌다. 하녀들은 머리 손질을 끝낸 후 당연하게 그의 얼굴에 옅은 화장을 했다. 옅은 화장은 남녀를 통틀어 가장 기본적인 예의 중 하나였다.
녹스는 그의 곁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노예이기에 화장을 할 필요가 없었고 어여쁜 옷으로 치장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단정한 옷차림으로 그의 곁에 서 있는 것. 그가 할 일은 그것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랬을 테다
녹스는 오늘 대회의에서 할리드를 최대한으로 보조할 생각이었다. 할리드는 아직 귀족 사이의 정치적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다. 녹스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번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예전의 규모와 비교하면 조금 작겠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숫자이다. 녹스는 살아남은 귀족들을 하나둘 떠올리기 시작했다.
“할 말이 있나?”
그렇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녹스에게 할리드가 물었다. 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 회의장에 데리고 들어가 주실 수 있습니까.”
“왜.”
“필요하시다면 도움을 드려야 하니까요.”
“…….”
할리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녹스는 이제 그의 침묵이 일종의 허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장을 마친 할리드는 곧 녹스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가 마차에 올랐다. 할리드는 녹스를 자신과 같은 마차에 태웠고 녹스는 할리드의 뜻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할리드는 곧게 앉아 있는 녹스의 모습을 보며 황궁으로 가는 지루한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마차 창밖을 보는 옆 태, 곧게 선 허리. 차분히 모은 두 다리. 할리드는 자신에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목마름을 안다. 지금도, 황궁으로 향하는 이 짧은 순간에조차 그의 다리를 벌리고 제 허리를 집어넣고 싶었으니.
음란한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할리드와 녹스 사이에는 침묵이 있었고 그에 관해 전혀 짐작할 길 없는 녹스가 차분히 침묵을 깼다.
“아마, 오늘 가장 먼저 올라올 안건은 돌란스 백작에 관한 내용일 겁니다.”
“아직도 버티고 섰다니 그 땅이 그렇게 여유가 많았던가.”
“글쎄요. 저도 정확히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으나 짐작하기론 민가에서 억지로 끌어다 쓰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황민을 위해서라도 빠르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지요.”
“그래서?”
“아마 주인님께서 가장 먼저 화두에 오르실 겁니다.”
“그건 어차피 이미 황제 폐하께 들었다.”
“예.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회의에선 순순히 가겠다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 말에 할리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째서?”
“득 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가지 않아야 하나? 황제 폐하의 명일진대.”
“가시되 충분한 대가를 받으시면 됩니다.”
“대가라면….”
녹스가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
“돌란스 백작이 소유하고 있던 영지들 정도면 만족스럽겠죠.”
“돌란스 백작을 제압하는 대가로 그가 가지고 있던 영지를 달라 하라?”
“예, 어차피 영지란 정복한 자의 것입니다. 특히 공작님께선 새로이 공작위에 오르셨기 때문에 영지 몇 개가 늘어난다고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겁니다.”
녹스가 잠시 말을 멈췄다 다시 이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땐 아까보다는 조금 건조한 투였다.
“혼인하게 되신다면 아들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작위가 늘어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할리드가 단숨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결혼, 그래. 확실히 지금 새로운 공작이 된 그에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청혼장이 쇄도하고 있었다. 그가 무도한 용병 출신이라는 것은 미리 말했듯 중요하지 않았다.
무려 황제의 곁에서 전 황태자의 목을 벤 자다. 황제의 오른팔이며 그의 형제와 같은 자. 명실상부한 중앙의 권력자.
할리드는 곧장 손을 뻗었다.
그리고 녹스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할리드는 녹스의 턱 아래 목울대를 물었다. 여전히 잇자국이 남아 있는 피부 위에 새로운 자국을 남기는 것뿐이었다. 녹스는 미간만 찡그릴 뿐 작은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할리드는 그 부분을 잘근잘근 깨물다 제 성에 찼을 때쯤 놓아주었다. 할리드의 입술에 옅은 핏자국이 묻어났다. 녹스는 검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상처가 남은 자신의 턱 아래를 문지르기보단 할리드의 입술에 묻은 핏자국을 엄지로 닦아 냈다. 할리드의 몸이 멈칫거렸다.
녹스는 그의 입술에 묻은 핏자국을 닦은 후에 손을 떼어 냈다.
덜컹.
그리고 할리드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마차가 멈추었다. 할리드는 녹스를 가만히 바라보다 먼저 마차에서 내렸고 그 뒤를 녹스가 따라 내렸다. 녹스는 구겨진 셔츠 깃을 매만져 폈다. 주변에서 시시각각 시선이 붙어 왔다. 할리드와 녹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할리드는 앞만 보고 걸었으며 녹스는 그런 그의 뒷모습만을 보고 걸었다.
‘기어코 저 노예를 회의까지 데리고 오네요.’
‘뭐, 얼마나 아양을 떨어 대면 저러겠습니까.’
‘궁금하긴 하네요. 황제 폐하의 처소에까지 들어갔다죠?’
마지막 말이 할리드의 귀에 들어갔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으르렁거렸다. 마지막 말을 뱉은 어느 남자 귀족은 할리드의 얼굴이 찡그려지자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녹스는 할리드에게 다가가 그의 소매 쪽을 가볍게 잡았다.
“주인님.”
그리고 속삭였다.
“흥분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할리드의 으르렁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녹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녹스는 의미 없이 그 시선에 시선으로 화답했다. 그의 눈엔 자신을 비하한 자에 대한 원망도 분노도 수치심도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둘 뿐. 아무런 감정도 자리에 고여 있지 않았다.
할리드는 자신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인지 아니면 녹스의 태도가 이상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답하는 대신 다시금 다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대회의실에 도착한 할리드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황제가 앉을 가장 상석의 바로 옆자리. 그곳이 바로 그의 자리였다. 녹스는 다른 귀족들의 보좌관들처럼 그의 뒷자리에 뒷짐을 지고 섰다. 그러고 보니, 시종이 없는 것도 아닌데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이 신기했다.
물론 녹스는 자신이 그 어떤 보좌관보다 괜찮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지금 위치는 노예일 뿐이었기에 구태여 자신을 선택해 데리고 온 할리드의 행동이 약간의 기행처럼 느껴졌다.
이어 시간이 흐르고 모든 귀족이 자리에 들어찼다. 그리고 곧이어. 문이 활짝 열리며 망토를 두른 황제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두 명의 시종이 그의 뒤에 있었다. 그는 가장 상석에 당당히 가 앉더니 다리를 꼰 뒤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괴었다. 생글생글 웃는 낯짝은 그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 첫 번째 안건이 뭐지?”
그 말에 할리드의 반대쪽에 앉은 엘러딘 바이스 공작이 말했다.
“돌란스 백작의 무력 시위 제압에 관한 안건입니다.”
“그래, 한번 묻지. 직접 나설 자가 있나?”
정적,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할리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고 엘러딘은 헛기침을 했다. 여기저기 눈치를 보던 귀족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 행동에 황제가 과장스럽게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래, 비톨란 백작. 그대가 나서겠나?”
“그것이 아니오라. 이런 일엔 비아 공작님께서 나서시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황제는 단박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한다는 게 자신보다 높은 상급자를 밀어 추천하는 꼴이라니. 한심해도 여간 한심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남들보다 솔직한 축에 속했다. 다른 귀족들은 눈빛으로 동의를 표하며 황제를 쳐다본 것이 다이니까.
“그래, 뭐. 가만히 앉아 있는 치들보다야 용기 있게 나서서 말이라도 하는 자가 낫다는 건 나도 잘 아네만. 이건 좀 웃기는군.”
황제의 노골적인 말에 몇 귀족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녹스는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빠진 눈매가 귀족들을 한 번씩 훑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할리드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엘러딘 바이스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떤 자인지 궁금했는데.’
그는 녹스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녹스가 귀족들을 살필 때, 할리드 비아가 입을 열었다.
“갈 수는 있습니다만.”
할리드는 황제와 비슷한 자세로 턱 끝을 한 번 까딱이곤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보상을 내리실 줄로 압니다.”
“오호.”
황제는 웃었다. 그저 시키면 알겠습니다. 하고 가던 할리드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러딘은 그의 뒤에 선 녹스를 바라보았다. 이미, 입을 맞춰 놓고 나왔다 이거지.
“그렇지. 돌란스 백작이 무가로 유명한 만큼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야. 그리고 돌아와서도 마찬가지겠지.”
황제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때 녹스가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 할리드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할리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