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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36화 (36/158)

제36화

“돌란스 백작을 제압하는 데 있어 필요한 물자들을 돌란스 백작 주변의 영지를 지닌 자들에게 걷어 주십시오. 3할은 제 쪽에서 대겠습니다만 그 이상은 그들이 책임져야 함이 옳겠습니다.”

황제가 웃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녹스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러자 누군가 나서 소리쳤다.

“돌란스 백작은 지금 현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저희 영지로 약탈을 오는 상황입니다.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폐하!”

“약탈을 당하는 상황이라는 말이지?”

황제가 말하자 할리드가 이어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내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상황이겠군.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그 일에 끼고 싶지 않네. 어차피 그쪽 영지들이 뭉쳐 돌란스 백작을 친다면 무리 없이 그를 치워 낼 수 있을 거야. 그대들은 약탈을 당했으니 명분마저 있지.”

“그건….”

“그런데 거기 내가 나서야 한다면 당연히 도움은 줘야지. 내가 공작이 아니라 그대의 가신으로 보이는가?”

할리드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그의 눈빛에 한 마디 하려 나선 자는 꼬리를 말고 어깨를 수그렸다.

“아니, 아닙니다. 공작님.”

“그리고 폐하.”

할리드가 황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제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할리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당당히 말했다. 정확히는 녹스가 말해 주었던 바를 또박또박 전달했다.

“돌란스 백작을 제압한 뒤, 그 땅을 제가 안정시키고 싶습니다.”

“아하하!”

황제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손잡이를 팍팍 치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커다란 개 같던 할리드를 완전히 여우로 만들어 놓았군그래. 황제는 가려진 손가락 사이로 녹스를 바라보며 생각했고 녹스는 자신의 주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저, 전하!”

돌란스 백작 근방의 귀족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쓰러지면 영지를 갈가리 찢어 나눠 가질 생각을 하고 있던 그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황제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직접 정리한 당사자가 안정을 시키겠다는데 무슨 반대가 있나?”

“그, 그 지역은 저희 쪽에서도 충분히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영지민들이 의미 없는 무력 시위에 고통받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들이 무슨 명분으로 그 지역을 안정시키나?”

“그야 저희와 가까운 땅이므로….”

“그 땅이 수도에서 아주 멀었다면야 모르겠지만 마차로 하루면 가는 곳이네. 비아 공작에게 맡겨도 무리 없을 거리야. 아니지, 오히려 그가 돌란스 백작을 밀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에게 하사해도 무리 없을 땅이지.”

황제가 노골적으로 할리드의 편을 들자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황제는 참 짓궂게도. 이 상황에서 한 번 더 물었다.

“지금이라도 나설 자가 있나?”

그러자 앞서 손을 들지 않았던 귀족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새로운 영지가 생긴다니. 그것은 손해를 감수하고도 아니, 손해를 충분히 메꾸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것을 보며 할리드가 비스듬하게 웃었다. 그의 미간은 잔뜩 찡그려져 있었으며 목 안으로는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아직도 할리드 비아 공작을 용병쯤으로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골치 아픈 일에 써먹고 자신들이 하기에 곤란한 일을 떠맡기고. 할리드도 그 무의식적인 메시지를 읽었기에 대놓고 으르렁거리며 테이블을 쾅! 소리가 나게 쳤다. 웅성거리던 회의실 안이 순식간에 침묵으로 가득 찼다.

“먹을 것이 나타나니 한꺼번에 나서는 꼴이 참 웃기는군. 그대들은 내가 아직도 용병 따위로 보이나?”

“그, 그것이 아니오라.”

“공작님, 저희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그게 아니라면 지금 돌아가는 꼴이 왜 이렇지?”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목을 긁어내는 듯 거칠었다. 마치 짐승의 그르렁거리는 울음소리 같았다. 사냥 바로 직전의 맹수처럼.

녹스는 지금 이 상황에서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흥분하는 것은 귀족답지 않은 행동이다. 녹스는 다시 한번 할리드의 곁으로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주인님.”

그의 목소리는 할리드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지만, 그가 주목 당하는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을 모두가 볼 수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녹스의 손이 팔걸이에 얹어져 있는 할리드의 손등을 간지럽게 쓰다듬었다. 황제는 그것을 보며 눈매를 좁게 떴다. 할리드는 움찔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녹스의 손톱 끝이 할리드의 손등 위를 가볍게 세 번 두드렸다.

“지금 흥분하셔서는 안 됩니다.”

속삭이듯 다시 한번 목소리가 떨어졌다. 할리드는 그가 속삭이는 귓가가 지나치게 간지러웠다. 목덜미엔 소름마저 돋았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얌전히 따랐다. 녹스는 그의 목 안에서 으르렁거림이 그치자 다시 얌전히 물러섰다. 귀족들의 눈짓이 오갔다. 공작의 노예가 공작의 화를 풀었다. 그 사실이 확실하게 각인 된 것이다.

‘얼마나 아끼는 노예면 단박에 화를 푼단 말인가.’

‘저 노예가 공작을 쥐락펴락하는군요.’

황제는 실실 웃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그래서 비아 공작. 어떻게 하기를 바란다고?”

“돌란스 백작을 쓰러뜨리는데 드는 물자의 칠 할을 주변 영지에서 조달할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엉망이 된 돌란스 백작의 영지를 제가 안정시켜 보겠습니다.”

“좋아. 허락하지. 반대하는 자가 있나?”

한 번 할리드의 분노를 맛보았던 자들은 불만이 있어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그렇게 그 건은 할리드가 출전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그 뒤는 비어 버린 귀족들의 자리를 자신의 친인척들로 채우기 위한 귀족들의 싸움이 펼쳐졌다.

할리드는 친인척은커녕 가족도 없었기에 그에게는 그다지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녹스가 다시 한번 귓속말로 물었다.

“용병 시절 가깝게 지낸 이들은 없습니까?”

“있기야 하지만 귀족 놀음에 낄 정도는 아니야.”

“가신 가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기존 귀족들 중 줄을 잃은 자들을 하나둘 포섭해도 되지만 진짜 믿을 수 있는 가문은 몇 만들어 두는 게 좋습니다.”

“그건….”

할리드가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정말 떠오르는 자가 없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지. 아마 오늘 안에 이 건이 정리될 것 같진 않으니.”

“알겠습니다.”

주변 귀족들은 아닌 척 귓속말을 주고받는 녹스와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처소에까지 들락날락한다더니 정말 능력이 좋은 놈인가 봅니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건 할리드 비아 공작의 것입니까. 아니면 저 노예의 것입니까. 사람들은 모르는 척 눈빛만을 계속해서 주고받았다.

녹스 라이네리오. 공식 자리에도 그다지 많이 나서지 않았던 그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아마 이렇게 노예가 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의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었을 테다.

그렇게 하나둘 안건들이 지나가며 정리가 되어 가는 와중에 황제는 무언가 불편한 듯 웃는 낯을 조금 찡그리고 있었다. 귀족들이 눈치를 보는 가운데 황제는 녹스를 한 번 바라보았다. 녹스는 여전히 할리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거참, 황제의 눈길엔 조금도 관심이 없다니.’

그는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시종이 그 표시를 보곤 곧이어 말했다.

“오늘 회의는 이것을 파하겠습니다.”

그 말에 따라 현 안건을 정리하고 모든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황제가 말했다.

“할리드 비아 공작은 좀 남게. 온실에서 잠시 티타임이나 가지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귀족들이 오른쪽 출구로 우르르 몰려나가며 오늘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해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누군가 그곳에 끼어 회의장을 나서다 이내 궁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즈음 엘러딘 바이스가 자리에서 자료를 챙기며 물었다.

“저도 남습니까?”

“아니, 그대는 돌아가…. 아, 아니면.”

황제가 고개를 기울이며 짓궂게 물었다.

“그대도 그가 궁금하면 끼워 주도록 하지.”

그 말을 곧바로 알아들은 엘러딘 바이스는 냉큼 자리를 벗어났다. 대답도 없었다. 황제는 그 뒷모습에 대고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고얀 놈. 대답도 없이 가 버리다니. 하지만 그는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지 별다른 덧붙임 없이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녹스는 잠시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

“폐하.”

녹스는 그대로 침묵했고 할리드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도 그것이 황제가 발기해 있었기 때문이다. 왼쪽으로 묵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윤곽이 보였다. 황제는 웃으며 망토를 여몄다.

“그러게, 회의 중에 왜 그런 짓을 하나.”

황제는 녹스에게 말하고 있었다. 녹스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할리드를 바라보았고 할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또 쯧, 혀를 찼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황제에게 대답을 안 하는군. 이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딱히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회의 중에 그렇게 사내의 손등을 쓸어 대니 내 어쩔 도리가 없었지.”

“아.”

녹스는 자신이 할리드의 손등을 건드렸던 걸 기억해 냈다. 고작 그것으로 발기하다니. 칭찬하자면 정력이 좋아 좋겠습니다. 라는 말 밖에 나오질 않았다. 심지어 자신에겐 딱히 좋은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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