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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41화 (41/158)

제41화

멋대로 주인을 등지고 움직였다. 그 사실이 머릿속에 들어와 걸음을 멈췄을 때는 이미 그곳에서 많이 떨어진 후였다. 아, 돌아가야지. 또 멋대로 도망가면 할리드가, 주인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테니까. 녹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보았다.

타박, 타박.

그자를 발견한 녹스는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자의 모습이 낯익었다. 그자는.

“발티아스 데론.”

녹스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발티아스 데론은 그 소리를 듣고 비웃음을 걸었다.

“어느 가문의 노예가 감히 귀족의 이름을 함부로 올리는가 했더니.”

녹스는 미간을 와락 찡그리는 대신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서 정보를 받아 가던 첩자. 자신을 이용했던 그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녹스는 가장 처음, 자신이 그 화려한 홀에서 무릎 꿇려졌을 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발티아스 데론, 네가 날 이용한 것이냐고. 난 처음부터 버려질 예정이었냐고.

하지만 이제 와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신은 노예가 되었으며 이젠 아무런 발언권도, 권한도 갖지 못한 자가 되었다. 심지어 조금의 배려도 필요하지 않은 짐승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제 와 따진들 무엇이 상관이 있겠는가. 그저 어리석게 그들의 말을 고스란히 믿었던 자신의 죄이자 어리석음이지.

발티아스 데론과 녹스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예인 녹스를 안내할 궁인 따위는 없었으며 발티아스 데론은 마치 홀로 궁에 숨어들기라도 한듯 아무도 데리고 있지 않았다.

녹스는 그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아무리 황제의 측근이라지만 안내하는 궁인 한 명 없이 돌아다니는 후작이라니.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발티아스 데론이 곧장 녹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주인은 어쩌고 여기 홀로 서 있지?”

“…찾아가던 중이었습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대귀족에게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노예 따위는 없는 법이다. 녹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발티아스 데론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짚었다. 녹스는 그가 자신에게 어째서 일부러 접근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그의 귓가에 발티아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 어미를 닮았구나.”

뒷걸음질 치려던 걸음이 뚝 멈추었다. 가까워진 숨소리가 불편했지만 그것보다 더욱 불쾌한 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발티아스는 그를 더욱더 불쾌하게 만들겠다는 듯 입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눈이 많이 닮았어.”

그의 속삭임은 뱀과 같았다. 그의 손이 녹스의 어깨부터 팔뚝까지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녹스는 일부러 잊고 있었던 어미의 존재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만 같았다.

“죽어 갈 때 날 똑바로 바라보던 눈빛이 너무나 닮았어.”

호흡이 멈추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을지 정도는. 병든 몸으로 길거리에 내던져지느니 죽음을 택했을 어머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죽음을 직접 귀로 듣자 귓가가 뜨거워졌다. 머리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맞다.”

그의 음성은 녹스를 마음껏 조롱하고 있었다.

“네 어미는 내가 죽였어.”

녹스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예상하는 것과 직접 듣는 것의 차이는 크다. 지금 녹스의 눈앞이 새빨갛게 변한 것 같다고 느끼는 것과 같이.

“병든 자였으나 살려는 의지는 대단했다. 바닥을 기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참 웃기더군.”

“…대체, 무슨, 말을.”

“살려 달라고 비는 꼴은 공작 부인 같지 않았어. 마치…….”

어머니를 죽였다는 말과 그 노골적이고 원초적인 조롱에 녹스의 속이 덜컥, 한 번 뒤틀렸다. 녹스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비록 자신에겐 강압적인 어머니였으나 그녀는 귀족다운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의 마지막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발티아스 데론 후작은 기어코 마지막 문장을 내뱉었다.

“마치 벌레 같더구나.”

순간 귓속에서 이명이 들렸다. 삐이, 이명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모욕받았을 때엔 조금도 반응하지 않던 무언가가 어머니를 건듦으로 인해 날뛰는 것 같았다. 속이 뒤틀렸다. 무언가 올라오는 듯했다. 숨이 거칠어지고 눈앞이 핑 돌았다. 눈앞이 붉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엔.

“아…….”

발티아스의 뺨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녹스는 자신이 저도 모르는 사이 발티아스의 뺨을 내리친 것을 알았다. 손바닥 안쪽이 홧홧했다. 발티아스는 어째서인지 미소 짓고 있었다. 노예에게 뺨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노예 주제에 귀족의 뺨을 치다니.”

그는 즐거워 보였다. 눈매를 잔뜩 휜 채 붉어진 뺨을 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녹스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선명히 닿아 왔다. 노예가 귀족의 뺨을 때렸다. 그것은 그 손을 잘라도 사해지지 않을 죄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리고 그때, 녹스의 뒤에서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스는 그것이 할리드의 것임을 알아차리고는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여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할리드가 그 무엇보다도 차가워 보이는 표정을 한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 * *

할리드 비아는 녹스를 놓고 나온 욕실을 잠시 뒤돌아보았다. 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황제의 손에 붙잡혀 결국 쾌락에 굴복하고 말았던 그 몸뚱이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이를 아득 물었다. 그것이 제 고집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억지로 들쑤셔지는 몸이 제 뜻대로 제어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할리드는 그에게 묘한 기대를 안고 있었다. 나만이 특별하다고 해 줘. 오로지 나만이.

하지만 그것은 그저 대단한 착각일 뿐이었다. 녹스는 말 그대로 노예일 뿐이었다. 그 누구의 손에서든 놀아날 수밖에 없는. 그 사실이 할리드의 이성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그는 당장 녹스의 모습을 오래 눈에 담고 싶지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다시 한번 그를 탐했지만 오로지 쾌락의 노예가 된 것 같은 그의 모습을 긁어 내고 싶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할리드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방 밖으로 나왔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복도를 따라 그대로 걸어가자 곧 거대한 기둥들이 줄줄이 이어진 곳이 보였다. 기둥 밖으로는 정성껏 길러진 정원이 보였다.

할리드는 바람을 따라 걸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에 도련님과 정원을 거닐었듯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자 사내의 정액 냄새에 익숙해졌던 코에 싱그러운 풀잎 냄새가 닿았다. 그는 잠시 정원 가운데 서서 찬찬히, 자기 자신을 다스렸다.

“어머, 비아 공작님 아니신가요?”

하지만 그런 그의 시간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황궁의 정원을 거닐던 여인. 아무리 보아도 귀족처럼 보이는 여인은 스스로 그를 부른 것에 깜짝 놀랐는지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할리드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모르는 얼굴이다. 할리드가 물었다.

“누구지?”

“아, 죄송합니다. 공작님. 저는 아리아드 베란체라고 합니다.”

“베란체라면….”

“예, 베란체 백작님께서 제 아버지 되십니다.”

할리드는 베란체 백작을 기억해 냈다. 저번 연회 때 분명 녹스가 알려 주었던 자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금광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나.

할리드는 자신이 귀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예 손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레이디를 대할 때는 어떻게 하랬더라. 할리드는 어설프게 배워 놓은 예의를 차리려 애썼다. 일단, 여자를 대할 땐 미소를 지으라고 했지.

여기서부터가 난관이었다. 할리드는 녹스 라이네리오의 손에 쫓겨난 이후 즐겁게 웃어 본 기억이 없었다. 할리드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그 모습이 어찌 보였는지 백작가 영애의 얼굴이 살짝 파르스름해졌다. 아무래도 보기 좋은 모양은 아닌가 보지.

할리드는 느릿하게 입꼬리를 내리고 미소라는 것의 모양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도끼를 휘두르던 잭슨처럼 호탕하게 웃어서도 안 되고 쌍검을 다루던 앨리엇처럼 굴어서도 안 됐다. 자신이 아는 가장 귀족적인 미소는.

할리드는 저도 모르게 녹스 라이네리오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노예가 된 뒤로 한 번도 웃지 않은 녹스가 아니라 자신만 보면 미소를 짓던 도련님 녹스 라이네리오를 말이다.

“아….”

아무래도 이번엔 성공한 모양이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를 따라 올린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베란체 백작 영애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 마주 웃었다.

“이, 이곳엔 어쩐 일이실까요?”

용병 출신이면 어떠랴. 지금 명실상부한 황제의 오른팔. 거기에 깎아 만든 듯한 외모는 이제 막 결혼 적령기에 든 여인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물음에 할리드가 무심히 대답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거칠고 낮은 목소리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폐하의 부름이 있었다.”

“그러시군요. 호,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다음 저희 저택에서 열리는 연회에도 참석해 주실 수….”

여인이 할리드 쪽으로 한 발짝을 내밀었다. 그리고 발을 잘못 디딘 듯 곧 기우뚱 기울었다. 할리드는 그것을 내버려 둬야 하나 고민하다 이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팔을 뻗었다. 찰나에 이루어진 일이라 그가 망설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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