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아, 죄송, 합니다!”
“…뭐, 괜찮네.”
그의 품으로 넘어진 여인이 새빨간 얼굴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할리드는 잠시 팔 안에 들어왔던 여인의 무게에 할 말을 잃었다. 귀족 여인네들은 다 이런가? 작은 소동물이 팔에 잠시 앉았다 떨어진 것 같은 감각이 남아 있었다.
할리드는 그렇게 가벼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좀 더 단단하고 묵직한 것. 얼마든지 세게 쥐어 당길 수 있는…. 할리드는 문득 녹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보고 싶지 않다 생각한 모습이 눈앞에 절로 그려졌다. 할리드는 녹스가 자신이 찾으러 가기 전까지 인형처럼 홀로 방 안에 남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럼 난 가 보지.”
“아, 예, 예! 조심히 돌아가시길.”
여인이 드레스 자락을 쥐고 새털처럼 가벼운 인사를 올렸다. 할리드는 그녀를 등지고 기둥 사이를 지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간 방에, 녹스는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찾아 떠난 것 같은데. 할리드는 자신이 온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의 복도를 바라보았다. 정원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녹스를 보지 못했으니 아마 반대편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할리드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어슬렁거리며 녹스를 찾던 할리드는 곧 어느 모퉁이에 닿았고 모퉁이를 도는 순간 알 수 없는 소음을 들었다.
짜악!
마치 누군가의 뺨을 내려쳤을 때 나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발티아스 데론.”
뺨을 맞은 발티아스의 모습이 보였다. 할리드는 눈을 크게 떴다. 대체 누가 황궁에서 황제의 측근인 후작의 뺨을 내리친단 말인가. 할리드는 자신에게 등을 보인 자가 누구인지를 바라보았다.
“……허.”
그리고 헛웃음 쳤다. 자신의 노예, 녹스의 등이 보였다. 휘둘러진 듯 보이는 손바닥 안쪽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분노라도 한 것처럼. 할리드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 서서 잠시 지켜보았다. 천천히 녹스가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할리드는 그 순간에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 * *
할리드의 그 짧은 부름에 발티아스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예, 비아 공작 각하.”
“방금 내가 본 것이 맞나?”
“안타깝게도.”
발티아스 데론은 마치 노래하듯 말했다. 터벅터벅, 걸음이 녹스를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할리드의 손이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녹스는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짜악-!
녹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입 안에선 순식간에 피 맛이 감돌았고 그것을 채 느끼기도 전에 다시 한번 손이 날아왔다. 짜악, 고작 두 대 맞았을 뿐인데 입 안이 터져 버렸다. 녹스가 비틀거리자 할리드가 그의 멱살을 쥐었다. 녹스의 입가로 피가 흘렀다. 할리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녹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궁 안에서 노예가 후작의 뺨을 때렸다라. 어이가 없군.”
이것은 녹스에게 내려진 사적인 벌이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벌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할리드가 녹스의 멱살을 쥐고 있는 사이 발티아스가 궁인을 불러 황제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녹스는 할리드의 손에서 벗어나 다른 궁인들에게 억압되었다. 뒤로 묶인 손이 아프다 못해 부러질 것만 같았다. 녹스는 화끈거리는 입 안을 느끼며 바닥만을 바라보았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곧장 그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나란히 붉은 뺨을 하고 있는 두 남자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원래 같았으면 손목을 자르는 것이 맞는 일이나 황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을 꿇은 녹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피가 흐른 턱과 붉어진 뺨만이 언뜻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발티아스 데론은 보라는 듯 치료도 받지 않고 붉어진 뺨으로 황제 앞에 서 있었다.
“그래서 왜 그랬지?”
황제는 이래저래 녹스의 성정을 잘 알았기에 녹스에게 먼저 물었다. 그러자 발티아스 데론이 먼저 순순히 자신의 행동을 인정했다.
“제가 지나친 말을 한 탓이지요.”
“무슨 말?”
발티아스는 그저 웃음 지었고 녹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런 꼴로 죽어 갔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도 강건하던 어머니다. 병에 걸렸어도 아무리 연약해졌어도 그럴 리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어머니를 직접 죽인 자에게 들은 말은 충격적이다 못해 그에게 아득함을 선사했다. 황제는 대답하지 않는 둘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혀를 찼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던 할리드는 차가운 눈빛으로 녹스를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몸을 섞던 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는 손수 한쪽 무릎을 꿇어 녹스의 뒷머리채를 잡아 목을 젖혔다.
“윽….”
“왜 그랬느냐고 묻잖아.”
“저는….”
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녹스는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며 눈을 똑바로 뜬 채 말했다. 비록 자신은 노예이지만 어머니는 공작 부인인 채로 죽었다. 그러니, 그러니까.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옳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 말에 황제도 할리드도 헛웃음을 쳤다. 발티아스 데론만이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을 뿐이다.
사실 황제와 할리드는 지금 꽤, 아니 아주 많이 불쾌한 상태였다. 발티아스 데론은 함께 사지를 헤쳐 온 동료이자 친우였다. 그런 그가 전 황태자의 앞잡이였던 노예에게 뺨을 맞았다는 사실은 당연히 유쾌하지 못했다.
“폐하.”
“말하게.”
“제가 확실히 벌을 내리겠습니다.”
“어떻게?”
“주제를 알려 줘야지요.”
할리드는 이를 악문 채로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최근 녹스에게 너무 유했다는 생각을 했다. 노예는 노예일 뿐. 아무런 감정도 들어서는안 되는 거였는데.
“제 잘못을 빌 때까지.”
그의 잔혹한 눈빛이 녹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에 물건처럼 처박혀 있다 보면 주제를 알겠지요.”
“뭐, 그 정도면 나쁘지 않군.”
황제는 녹스의 어여쁜 몸에 상처가 남길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에 발티아스가 그 정도에 타협하기를 바랐다. 겁이 많고 눈치가 빠른 발티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녹스 라이네리오에게 적당한 타격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말을 잘 듣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은 노예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면 그가 후에 다른 말을 했을 때도 믿어 주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사실 가장 좋은 건 혀를 자르는 거였는데.’
어차피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이 후작이고 또 그가 노예인 이상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 여겼다. 지금은 공작과 황제가 녹스를 싸고도는 경향이 있지만 곧 그의 몸에 질려 버려질 거라는 건 뻔할 뻔 자였다. 발티아스 데론은 웃으며 이쯤에서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다만.”
발티아스는 여기서 확인받기를 원했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그의 눈이 번뜩였다. 황제로서도 처음 보는 단호한 모습이었다.
“제가 직접 나서 그의 신체를 절단하겠습니다.”
황제가 용인했다.
“그러도록 하지.”
발티아스 데론이 그렇게 황제의 앞을 떠나고 할리드와 바닥에 무릎 꿇려진 녹스만이 남았을 때 황제가 말했다.
“제대로 길을 들여놨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면목 없습니다. 폐하.”
“아니야. 어차피 앞으로 받을 벌이 남아 있으니.”
황제가 차가운 눈으로 녹스를 내려다보았다. 녹스는 황제에게 어여쁜 고양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무리 어여쁜 짐승이라도 가족이라 여기는 자에게 발톱을 세워 상처를 낸다면 더 이상 어여쁘게 여겨 줄 수는 없는 법이다.
“알아서 잘 길들일 거라 믿네.”
“예.”
그렇게 녹스는 곧바로 할리드의 저택으로 끌려갔다.
녹스의 팔뚝을 쥐고 질질 끌고 가는 그의 모습에서는 배려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녹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그렇게 여겼기에 잘못했다고 빌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녹스의 고집을 아는 듯 할리드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곧장 지하실 가장 깊은 창고에 처박으라 명령했다.
“스스로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문을 열어 주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아직까지도 네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나?”
녹스는 덤덤히 그리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군. 가둬라.”
그렇게 녹스는 하인들의 손에 질질 끌려가 지하의 아무것도 없는 창고에 갇히게 되었다.
차가운 돌바닥, 습하고 어두운 지하 방은 창문 하나 나 있는 것이 없었다. 끼이익 문이 닫히자 당장 자신의 손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녹스는 자신의 정신력을 믿었다.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자신의 어머니는, 그녀는 그래도 귀족으로서의 존중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아버지처럼 더럽혀지게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차차 흐르자 어둠 속에서 눈은 익숙해져 갔다. 겨우 손의 윤곽만 보일 정도였지만 녹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녹스는 어두운 곳에 가만히 앉아 계속해서 생각했다. 어머니의 시체는 어떻게 되었을까. 들판에 버려져 개들의 먹잇감이 되었을까. 아니면 목이 베여 성문에 걸린 채 썩어 갔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엉켜 드는 기분이었다. 머리 한구석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네가 스물이 되도록 채찍질하던 사람에게 지켜 줄 명예가 있느냐. 녹스는 다급하게 머리를 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