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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47화 (47/158)

제47화

산들바람이 불었다. 할리드는 도련님의 부탁에 따라 저택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오고 있었다. 두꺼운 책이 다섯 권이나 되었다,

도련님이 직접 가시겠다는 걸 말리고 제가 나섰다. 그 가느다랗고 귀한 팔로 책을 들게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할리드는 녹스의 팔목이 제 눈에나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몰랐다. 왜냐하면 남들이 보기엔 녹스보다 할리드의 팔목이 더 가늘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아이는 부지런히 책을 들고 도련님의 방으로 향했다.

“할리드 어딜 가니?”

“아, 도련님 방으로요. 책 심부름을 시키셔서요.”

“도련님께서 심부름을 시켜? 웬일이야?”

도련님이 널 하도 예뻐하셔서 멀리 떨어뜨려 놓지 않는 거 뻔히 아는데. 그런 투였다. 할리드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기뻤다.

도련님이 자신을 아낀다는 뜻이니까. 상대방은 화사하게 웃는 할리드의 얼굴에 김이 빠졌는지 피식 웃으며 가 보라고 손짓했다. 할리드는 그 길로 곧장 도련님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할리드는 다섯 권의 책을 겨우 들고 노크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할리드는 혼날 것을 알면서도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창가의 테이블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도련님을 발견했다.

할리드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의 도련님이 조는 것을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하긴, 요즘 검술 수업 시간을 크게 늘려 피곤해하시곤 했다. 할리드는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책을 올려 둔 뒤 녹스에게 가까이 다가가 감은 눈을 살펴보았다.

‘속눈썹이 길어….’

할리드의 손끝이 저도 모르게 녹스의 속눈썹으로 향했다. 그리고 슬쩍 속눈썹 아래에 손가락을 가져가 속눈썹 끝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녹스는 많이 피곤했는지 할리드가 속눈썹을 만지작거림에도 작은 움찔거림 하나 없이 색색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할리드는 거기서 멈춰야 했다.

하지만 그의 욕심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컸고 가볍게 벌어진 입술은 그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

할리드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살짝 벌어진 입술에 제 입술을 대었다. 오로지 피부만이 맞닿는 입맞춤이었지만 할리드는 입술 끝에서부터 찌릿한 감각이 오르는 걸 느꼈다.

“으음….”

그때 녹스가 움찔거리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할리드는 녹스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무는 감각에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도련님은 아직 잠든 채였지만 금방이라도 깰 것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도망쳤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할리드는 복도를 내달렸다. 절대 복도에서 뛰지 말라던 하녀장님의 말도 잊고서 저도 모르게 도망치듯 달음박질쳤다.

그리고 할리드가 사라진 방 안, 녹스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녹스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자그마한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가짜로 잠든 척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가 속눈썹을 매만질 때 얼핏 깨어났었다. 그대로 눈을 뜨면 아이가 놀랄까 봐 조용히 자는 척을 했더니….

“이게 기분 나쁘지 않은 나도 문제겠지. 할리드?”

도망치고 없는 할리드에게 물었으니, 할리드의 대답이 돌아올 일은 없었다.

* * *

저택은 평화로웠다. 녹스가 할리드의 기분을 맞추니 더 이상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녹스는 그 뒤로 저택을 돌아다녀도 괜찮다는 할리드의 허락을 받았다.

물론 딱 정원까지. 저택 안, 거기까지만. 기르는 애완동물 취급을 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녹스는 그게 어딘가 싶었다. 그는 이제 할 일이 없을 때 멍하니 있지 않았다. 방 안의 먼지 따위를 세는 게 아니라 저택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할리드는 자신이 없을 때 녹스가 저택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소리를 듣고 도서관 안을 책으로 가득 채워 놓았다. 대부분이 녹스가 읽은 책들이었지만 녹스는 별다른 소리 없이 읽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녹스는 그 뒤로 더욱 고분고분해졌고 할리드는 한결 온순해졌다. 녹스는 할리드가 홀로 황궁으로 떠난 오늘도 마찬가지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낼 참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황제가 즉위하고 타국과의 교류를 위해 교류연을 연다는 것 같았다. 그 덕분에 할리드는 황제와 의논할 것이 많아져 예전보다 자주 황궁으로 향하곤 했다.

여기서 문제는 일이 많아지니 녹스와 할리드가 함께 보낼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것에 있었다. 할리드의 욕구는 그만큼 쌓여 갔고 오늘 아침에도 배웅하는 녹스의 목덜미에 진한 잇자국을 남기고 사라졌다.

보통 황궁으로 녹스를 데려가던 할리드가 더 이상 그를 황궁에 데려가지 않는 것은 아마 황제와 관련이 있는 듯했다. 녹스로서는 황제를 상대하나 할리드를 상대하나 버거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사양이었으므로 이 결정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녹스는 도서관으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길에 그 ‘애’를 다시 만난 건 정말로 우연이었다.

도서관으로 가는 모퉁이를 천천히 걸어 도는데 누군가 모퉁이 반대편에서 툭 나와 톡 하니 부딪혔다. 콩 하고 넘어진 아이는 이제 겨우 녹스의 허리께에나 올 것 같은 키의 어린 하녀였다.

“너는….”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정원에서 본 그 깜찍한 꽃 도둑이었다는 소리다. 하녀는 자신이 누군가와 부딪혔다는 것에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바닥엔 아이가 들고 있던 빨래 뭉텅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녹스는 그것을 하나하나 주워 일어선 하녀의 팔에 얹어 주며 말했다.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전 노예거든요.”

그 말에 어린 하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 깜빡였다.

“아, 안녕하세요.”

그리고 갑작스러운 인사. 녹스는 아이와 똑같이 눈을 깜빡여 보이며 말했다. 이 저택에 와서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안녕하세요. 라는 가벼운 인사.

“안녕하십니까.”

그러자 어린 하녀가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저번에는 고마웠어요.”

“별일 아닙니다.”

아마도 도망갈 수 있도록, 혼이 나지 않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는 것 같았다. 녹스는 느리게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아이가 한 짓은 확실히 혼이 날 만한 짓이 맞았으니까.

“저번엔 다행히 그냥 넘어갔지만 다시는 그런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아, 알고 있어요. 그, 그날은 그냥….”

어린 하녀가 더듬더듬 말했다.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아픈 어머니께 예쁜 꽃을 보여 드리고 싶은데. 여기 정원만큼 예쁜 꽃이 없어서…. 그래서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어요. 죄송해요.”

아픈 어머니라. 녹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도 한때는 아픈 어머니가 있던 처지였다. 아픈 어머니에게 예쁜 꽃을 보여 드리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지만. 아마 이쪽이 ‘보통’ 자식의 생각이겠지.

녹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이제 열셋이나 됐을까 싶은 아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예, 예에….”

아이는 얼굴을 붉힌 채 빨래를 들고 저 멀리 사라졌다. 녹스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책 냄새가 가득했다. 사람들에게서 나는 체취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녹스는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녹스는 가끔 이곳에 책을 펴고 앉아 있으면 자신도 책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꽂아 두고 가끔씩 펴 보는 그런 책.

그리고 녹스는 자신이 그런 책이 되기를 바란다는 걸 알았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아무도 찾지 않고….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다 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봐, 지금처럼.

“공작님께서 찾으신다.”

마를렌이 찾아왔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벌써 여섯 시를 넘기고 있었다.

도서관에 도착한 게 오전 열 시쯤이었다. 홀로 있는 시간은 너무도 빨리 갔다.

할리드가 오늘 꽤 일찍 귀가한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아홉 시가 넘어서야 들어왔으니까. 아마 교류연의 일이 대부분 정리됐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녹스는 책을 본래 자리에 꽂아 두고 마를렌을 따라 할리드의 방으로 향했다.

할리드의 방에 도착하자 할리드가 하인들에게 옷시중을 받고 있는 게 보였다. 할리드는 녹스가 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눈짓했다.

녹스는 잠시 고개를 기울이다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할리드는 옷시중이 귀찮은 듯 그들을 손으로 휙휙 무르더니 녹스에게 말했다.

“녹스, 하던 것.”

하던 것. 이라는 말에 녹스는 무릎을 꿇으려 했다. 할리드는 녹스가 제 것을 빨아 주는 걸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녹스가 무릎을 꿇으려 하자 할리드는 고개를 저으며 녹스의 턱을 잡아 올렸다.

녹스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아, 그거.

녹스는 바로 서서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붙였다. 아직 옷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방 안에 있음에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어차피 그 둘이 양껏 붙어먹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저택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으응…….”

입맞춤이 깊어지자 녹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침음을 흘렸다. 할리드가 목구멍 안쪽까지 핥을 기세로 혀를 밀어 넣어 녹스의 입 안을 꽉 채웠다. 녹스는 넘어 들어오는 타액을 꼴깍꼴깍 삼키며 그의 입맞춤을 받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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