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우리 셋만 있는데 눈치 볼 일이 뭐가 있나. 녹스, 앉아.”
이건 명령이었다. 하지만 녹스는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할리드는 녹스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고 녹스는 그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자리에 앉았다. 황제는 질투가 난다는 듯 투덜거렸다.
“정말 제 주인만 아는 노예구나.”
“노예란 게 본디 그런 법입니다.”
녹스가 간단히 대꾸했다. 황제는 무어가 그리 재미있는지 설핏 웃는 낯으로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고 손 위에 턱을 괴었다. 녹스의 자리는 황제와 할리드 그 사이였다.
황제는 대놓고 녹스를 구경하며 물었다.
“이번에 사신단들이 그렇게 남 노예를 사 모은다더군.”
“그렇습니까.”
“그게 자네를 내 처소에 들였다는 소문 때문인 것 같아.”
“그렇군요.”
“별다른 생각이 안 드나?”
“마음에 드는 노예를 건지셨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노예는 눈앞에 있는데.”
그러자 할리드가 끼어들었다.
“폐하.”
“거 좀 집적거렸다고 바로 반응하기는.”
녹스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느지막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선 온 세상의 것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보잘것없는 저라는 것을 너무 탐내지 마시고 멀리 보십시오.”
그러니까 굳이 오른팔과 같은 수하와 저 같은 것 따위를 두고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할리드가 미간을 좁혔고 황제는 순간 침묵하다 이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하하, 그렇군.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녹스는 자신의 말 어디가 그렇게 웃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는 마음껏 웃은 후 곧 등받이에 등을 편히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애피타이저로 나온 음식을 툭툭 성의 없게 집어먹으며 물었다.
“이번에 데르만트 왕국에서 공주를 보내온다지.”
“골치 아프시겠군요.”
“난 그다지 골치 아프지 않아.”
그러자 할리드가 애피타이저를 씹다가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쪽에서 노리는 건 내가 아니라 자네 같거든.”
왕국에서 굳이 이제 막 공작이 된 자를 노린다니. 할리드는 이해가 가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고 황제는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애피타이저를 입에도 대지 않고 앉아 있다가 자연스럽게 할리드를 위해 설명했다.
“데르만트 왕국은 그렇게 위세가 좋은 국가가 아닙니다. 제국 주변에 널린 62개의 왕국 중 가장 약한 축에 속하죠. 그렇다고 아예 최약국은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황후 자리를 노리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대보다 그대의 노예가 잘 아는군.”
할리드가 정치 사정에 빠삭하지 못하다는 걸 아는 황제는 그를 실실 놀리며 웃어 댔다. 녹스는 발끝으로 할리드의 발목을 톡 건드렸다.
아직 공작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를 수밖에 없으니 괜찮다는 의미였으나.
“…….”
“알았으니 그렇게 쳐다보지 마십시오.”
그의 눈에 정욕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곧바로 그만두었다. 아무리 그래도 식사 자리에서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황제도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발을 몇 번 탁탁 굴렀다.
“최소한 내 앞에서 그러진 말아 주게. 설 것 같으니까.”
“…….”
“…체통을 지키시길.”
“내가 이제 노예한테 체통 지키라는 소리도 듣고 세상 참 좋아졌군.”
“봐주실 것 압니다.”
“이것 참.”
녹스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제가 노예라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인 이후 조금 당돌해진 감이 있었다. 어차피 더 놓을 것이 없으니 그럴 뿐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이 총애받는 것을 알고 방만히 군다.’라는 말을 듣기에 딱 좋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황제는 그렇게 생각해도 봐주는 건지 아니면 그저 그게 재미가 있는 건지 모를 얼굴로 웃는 낯을 했다.
녹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기가 모든 걸 포기하니 분위기가 참 좋다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창고 안에 들어가서 사실은 그게 아님을 알았다고. 그리고 정말 모든 것을 놓자 무엇이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졌다는 것도.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황제의 태도가 바뀌어 제 목을 자른다 해도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무엇을 말입니까.”
“데르만트 왕국의 공주 말일세.”
“관심 없습니다.”
“왜, 그대도…. 아니. 아직 정세를 잘 모르는 그대야말로 정치적인 아내를 맞이하는 편이 좋을 텐데.”
할리드는 식사를 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황제를 한 번 본 후 녹스를 한 번 보았다. 녹스는 여전히 식사를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포크와 나이프는 들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시늉일 뿐. 무언가 입 안으로 들어가진 않고 있었다. 할리드는 그걸 그제야 알아채고 미간을 찌푸렸다.
“먹어.”
“…아, 예.”
할리드는 자신의 명령이 떨어진 후에야 입 안으로 음식을 잘라 넣는 녹스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관심 없습니다.”
“자네 후계는 어찌하려고.”
“그건 나중에 알아서 생각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새 공작이 노예에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는 소문이 타국에 돌아도 난 모르는 일일세.”
“본인이나 걱정하시지요. 벌써부터 사신단들이 남 노예를 사들이기 시작한 건 폐하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그러자 황제는 재미난 게 생각 난 사람처럼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억지로 애피타이저를 씹다가 황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리 우리와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것도 내가 그대를 총애하기 때문인데 만약 다른 노예가 나타나 내 총애를 독차지한다면 어떨 것 같나.”
녹스는 천천히 입 안에 든 것을 씹으며 생각했다. 어떻긴 뭐가 어떻다는 거지. 녹스는 식기를 내려놓고 준비된 냅킨으로 가볍게 입술을 닦았다. 그리고 말했다.
“최소한 앞뒤로 받을 일은 없겠구나 하여….”
“뭐?”
황제가 다시 한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녹스는 무어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할리드를 바라보았는데 할리드는 언짢은 듯 콧잔등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둘 다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자 녹스는 다시 얌전히 식사나 시작했다. 지금 먹어 두지 않으면 나중이 고될 수 있겠다 싶어서.
“간만에 이렇게 웃어 보는군. 그래. 두 사람 받기가 그렇게 힘들었다는 거지?”
녹스는 미간을 좁혔다. 할 수 있다면 본인이 직접 받아 보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감히 황제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으니 조용히 식사나 이어 갔다.
그 뒤로 스프가 나오고 코스 요리 순서대로 음식들이 날라졌다. 그사이에 별다른 말은 없었으나 녹스는 황제의 시선이 자신의 몸을 훑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식사를 최대한 많이 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만에 만난 황제는 웃는 낯이었으나 욕구 불만처럼 보였으니까. 딱 보아도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심상치가 않았다. 할리드는 어떻게 반응하려나.
“주인님.”
“왜 그러지.”
할리드는 아무래도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듯싶었다. 아마 이 식사 자리가 끝나면 일이 어떻게 될지 그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흠, 역시 노예를 공유하는 것은 이제 싫은가. 녹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게 식사 자리는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황제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황후는 없지만 황후를 위해 준비된 방은 있지. 거길 한 번 가 보겠나?”
할리드가 답했다.
“거길 제가 왜 갑니까.”
“자네 때문에 가자는 거 아니니까 조용히 있게.”
그럼 남은 건 녹스 하나였다. 녹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잠시 기울였다 제자리로 돌렸다.
아무리 지금 황후가 없다지만 황후를 위해 준비된 방에서 노예랑 붙어먹는 건 실례가 아닐까.
물론 그런 상식 따윈 저리 처박은 황제는 이미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녹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할리드는 대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거참, 서운하게.”
황제는 어슬렁어슬렁 걸어 할리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녹스에게 들리지는 않았으나 묘하게 빛이 바뀌는 할리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말을 들었길래.
“……그건.”
“왜, 꼭 보고 싶지 않나?”
“…….”
황제가 마치 악마처럼 그를 유혹하는 듯 보였다. 녹스는 눈매를 가늘게 떴다.
“그대도 나도 보기만 하는 거야. ‘보기만.’ 어때, 나쁘지 않지?”
녹스로서는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할리드는 지금 황제의 말에 반쯤, 아니 완전히 넘어간 것 같았다. 녹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할리드가 곧,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든 녹스는 당연하게도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녹스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두 남자는 묘한 기대감이 섞인 눈으로 녹스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합의를 한 건지. 녹스는 앞으로의 일을 걱정해야 할까 고민하다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므로 자신은 그저 받아들이면 되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식당을 빠져나온 펠티온과 할리드는 나란히 걸었고 녹스가 그 뒤로 세 발자국 정도 떨어져 천천히 걸었다. 황제의 시종과 궁인들이 그 뒤를 꼬리처럼 따랐다. 고작 노예랑 붙어먹기 위해 황후의 방을 연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