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흠, 잠시라면 기다릴 수 있다.”
서둘러 저택으로 뛰어간 경비병은 일단 하녀장 마를렌과 집사를 찾았다. 집사와 마를렌도 그 소식을 듣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왕태자라 함은 한 나라의 후계자일진대 지금 저택엔 주인인 할리드가 없었다. 만약 그에게 아내가 있었다면 아내가 판단하여 받아들였겠지만 공작 부인의 자리도 비어 있는 상황. 집사가 말했다.
“공작님께 곧장 전갈을 넣어라.”
“알겠습니다.”
마를렌이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서 당도하실 때까지 바깥에 계시게 해도 됩니까?”
“…그렇다고 하여 주인이 없는 저택에 함부로 손님을 들일 수는 없는 법인데.”
그 둘이 고민하고 있던 중, 저쪽 복도에서 녹스가 나타났다. 그의 손엔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정원으로 나가 책을 읽으려는 모양이었다. 마를렌이 고개를 번쩍 들고 녹스를 불렀다.
“녹스!”
“아, 무슨 일이십니까.”
마를렌의 다급한 부름에 녹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마를렌과 집사는 녹스의 출신을 떠올렸다. 그는 공작가의 자제였으므로 이런 때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테다. 집사가 말했다.
“연통도 없이 발레리안 왕국의 왕태자가 저택에 방문을 요청해 왔네. 그런데 공작님께서 지금 계시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말에 녹스가 태연히 답했다.
“저택에 남아 있는 주인님의 시종이나 보좌관이 계십니까?”
“아, 톨렌 보좌관님께서 서류 처리를 위해 남아 계실 거다.”
녹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발레리안 왕국은 제국의 동쪽에 붙어 있는 독립 국가였다. 제국의 속국도 아닐뿐더러 국력도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다만 8년 전쯤 발레리안 쪽에서 제국의 국경선을 넘어 공격해 온 전적이 있었다.
그 일을 시발점으로 제국과 발레리안 왕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결과는 발레리안 왕국의 대패. 발레리안 왕국은 패전국으로서 이후 10년간 제국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
속국이 아님에도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발레리안 왕국이 크게 항의했으나 다시 한번 제국이 창을 드니 그 입은 금세 다물렸다. 그리고 아직 그 기간이 남아 있는 상황. 아직 제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발레리안 왕국에서 갑작스럽게 새로운 공작의 저택을 방문한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상대가 발레리안의 왕태자라는 건데.’
세인더스 발레리안. 그는 발레리안 왕국의 왕태자 외에도 이름처럼 불리는 별칭이 있었다. 바로 발레리안 왕국의 망나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정이라.’
녹스가 생각을 마치고 마를렌과 집사에게 물었다.
“주인님께 연락은 드렸습니까?”
“방금 연통을 보냈단다.”
“책잡힐 일 없이 신경 써서 맞이하십시오. 안내는 주인님의 보좌관께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주인님께 크게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인물은 아니나 인물 특성상 어디로 튈지 모르니 주의하시고요.”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를렌이 녹스에게 말했다.
“차라리 네가 나을 것 같은데 네가 맞이하는 건 어떠니?”
“저는….”
녹스가 미간을 희미하게 찡그렸다. 왕국은 왕의 노예가 손님을 직접 맞이하는 것을 극진한 예로 여긴다. 하지만 녹스 자신이 황제의 노예는 아닌 상황.
녹스는 톨렌 보좌관에 대해 떠올렸다. 그러니까 제국 서쪽에 붙은 영지를 가진 백작가의 차남.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어 조용히 자기 일을 잘 처리하는 편이나 숫기는 좀 없는 편. 고민하던 녹스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맞이하도록 하지요.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녹스의 말이 떨어지자 집사와 마를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곧 경비병을 통해 마차를 들이라 말했다. 이를 전해 들은 경비병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 천천히 문을 열었다.
“흥, 이제야 문을 여는구나!”
여전히 오만한 태도를 고수하는 왕태자의 시종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다시 마부석에 올라탔다. 마차가 정문을 지나 곧 저택의 문 앞에 닿았다.
녹스는 집사와 마를렌 그리고 사용인 몇 명과 함께 왕국의 왕태자를 맞이했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왕태자의 시종이 내려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곧 녹스와 키가 비슷한 남자 한 명이 거만한 눈빛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붉은 머리에 갈색 눈동자. 어깨는 넓었지만, 뼈대가 얇아 기세가 세지는 않았다. 그는 마치 약속이 있는 사람처럼 물었다.
“할리드 비아 공작께선 어디 계시나.”
녹스가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잠시 일정을 나가 계시지 않습니다. 다만 이리 걸음해 주셨으니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그쪽은 누구지?”
“녹스라고 합니다. 공작님의 노예입니다.”
“노예?”
그때 세인더스 발레리안 왕태자가 녹스의 앞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녹스는 조금 놀라 어깨를 뒤로 빼고 그를 바라보았다.
“소문의 노예가 자네로군!”
녹스가 몸을 뒤로 빼자 아귀힘이 센 손이 녹스의 팔을 꽉 잡아당겼다. 억지로 당겨진 녹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녹스를 제 코앞에 가져간 그가 커다랗게 웃었다.
“하하! 공작가 태생의 노예라니. 내가 꼭 구경을 해 보고 싶어서 직접 왔지!”
녹스는 눈을 얇게 떴다. 갑작스럽게 왜 비아 공작가를 방문했나 했더니 설마 그게 자신 때문일 줄이야.
“그래서, 구경하시니 어떻습니까.”
“글쎄, 으음.”
왕태자가 녹스의 팔뚝을 놓고 그의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그리고 녹스의 몸을 꼼꼼히 물건을 살피듯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와 공작께서 아끼실 만하군. 이만한 노예는 찾아보기 힘들지.”
“그렇습니까.”
“그래도 말이야.”
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데려온 남노들을 보면 마음이 바뀌실 거야.”
“그렇군요.”
녹스는 한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응접실로 안내할 참이었다. 설마, 정말로 자신 하나를 보기 위해 이런 무례를 저지를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야. 아냐. 나는 어차피 너 하나를 보러 온 거야.”
그 말에 녹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세인더스 발레리안은 멋대로 손을 뻗어 녹스의 턱을 쥐었다. 그리고 제 쪽으로 당겨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 색도 그냥 검은색이 아니었네.”
그는 그것을 시작으로 녹스의 어깨와 팔뚝, 허리 따위를 멋대로 만져 댔다. 근육의 결을 가늠하기라도 하듯 몸을 쓸어내리는 감각에 녹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일개 노예가 감히 왕국의 왕태자의 손을 쳐 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할리드가 이 사실을 알면 싫어할 텐데.’
그 사실을 모두가 아는지 녹스를 멋대로 만져 대는 그를 집사장과 마를렌이 묘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녹스는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의 손이 떨어지며 왕태자의 시선이 위로 올라왔다.
“지금 내 손길을 거부한 건가?”
“남의 물건에는 함부로 손대시는 게 아닙니다.”
“하하. 재미있네.”
왕태자는 잘 웃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녹스는 잘 알고 있었다. 입은 크게 벌어졌지만 눈이 조금도 휘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닌 모양이다.
“뭐, 그래. 좋아. 그렇지. 남의 물건엔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게 맞아. 그런데….”
세인더스가 녹스에게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정말 조금의 악의도 없이.
“공작가 태생이 자신을 물건이라 칭하는 게 익숙하군. 마치 날 때부터 노예였던 것처럼.”
“…….”
“내가 자네였으면 진즉 자살했을 거야.”
그는 천진한 어조로 녹스의 속을 긁기 시작했다. 녹스는 턱을 살짝 들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귀족이었을 때 가지고 있던 버릇이었다. 왕태자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웃기다는 듯 말했다.
“귀족으로서의 체면이 없나? 아니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면 명예 따윈 바닥에 버려도 된다고 생각했나?”
왕태자가 녹스의 앞을 왔다 갔다 하며 걷기 시작했다. 뒷짐을 진 그는 건실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조리 녹스에 대한 모욕이었다.
“혹시 죽을 뻔한 것을 스스로 다리 벌려 살아남았나? 이번 연회에 참여한 나라들은 자네의 몸에 관심이 참 많네. 대체 어떻게 해서 황제 폐하와 공작을 동시에 홀렸을까.”
그의 손가락이 녹스의 위 가슴께를 쿡 찔렀다.
“그리고.”
그의 웃는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황제 폐하와 공작에게서 버려진다면 다른 자에게 다리를 벌려 살아남을 생각이 있나? 그렇다면 나도 관심이 많아서.”
아, 이번 말은 작정을 하고 조롱하는 거군. 녹스는 그의 말에 답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왜냐하면 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녹스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다. 마를렌과 집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렇게 질릴 일은 또 아닌데,
“죄송하지만.”
녹스는 덤덤히 대꾸했다.
“전 주인님 외의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세인더스 발레리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안타깝다는 듯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세인더스는 녹스의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노예 주제에 오만하기까지 하고.”
그는 녹스를 흥미롭게 보는 건지 아니면 아니꼽게 보는 건지 모를 투로 제 시종을 향해 명령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예, 알겠습니다. 태자 전하.”
“공작께 안부 전해 주게. 그리고….”
왕태자가 녹스를 향해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연회에서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