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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56화 (56/158)

제56화

녹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마차의 문이 닫혔다. 마치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진다. 역시 발레리안의 망나니다웠다.

다각, 다각.

마차가 점점 멀어졌고 집사와 마를렌 그리고 사용인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럽고 무례한 손님이 가셨으니 한시름 놓은 것이다. 마를렌은 녹스를 흘끔거렸다. 발레리안의 왕태자가 한 폭언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지금은 노예라도 그의 말처럼 녹스는 라이네리오라는 성을 가졌던 공작가의 외동아들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자존심에 상처가 나지 않았을지를 걱정했다.

“생각보다 빨리 가셨군요. 차라리 다행입니다. 전 이만 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그래….”

하지만 녹스는 그저 평이하게 이야기하며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녹스의 뒷모습을 마를렌은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 뒷모습에선 상처가 보이지 않았지만 마를렌은 그것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분노라도 하면 사람처럼 보일 것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구는 녹스는 마치 속이 비어 버린 인형 같았다.

무례한 손님이 떠나가고 난 지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할리드가 다급히 저택에 닿았다. 그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와락 찡그린 채였고 집사와 하녀장 마를렌은 그를 공손히 맞이했다.

“왕태자는?”

“그것이….”

“할 일을 다 했다며 돌아갔습니다.”

“할 일을 다 했다니?”

할리드의 물음에 집사와 마를렌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제 주인에게 비밀은 없어야 하는 것. 왕태자가 녹스에게 저지른 무례, 아니 희롱에 대해 낱낱이 보고해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얼굴은 야차처럼 구겨졌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구는 그의 곁엔 함부로 다가가선 안 된다는 걸 아는 사용인들은 전부 몇 발자국씩 물러나 녹스의 방으로 향하는 할리드의 뒤를 따랐다.

벌컥-

노크 없이 문을 여는 자의 손은 언제나 할리드 비아의 것이라,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녹스는 할리드의 얼굴을 보더니 잠시 의아함의 표시를 해 보였다.

그리고 곧 방금 있었던 일을 전부 보고받았을 거라는 생각에 닿아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주인님.”

할리드는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녹스를 쳐 내지는 않았다. 녹스가 할리드의 허리를 감아 안고는 그의 턱 아래쪽에 제 이마를 비볐다.

“제가 또 뭘 잘못했습니까.”

할리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해 들은 상황에서 녹스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애초에 그 발레리안의 망나니가 갑작스럽게 저택에 찾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심지어 그가 노예를 좀 건드리고 폭언했다 하더라도 그건 죄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거기에 노예인 녹스가 다른 대응을 했다면 죄가 되었겠지. 할리드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녹스를 혼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를 자신의 곁에서 떼어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강해졌을 뿐이다. 할리드는 마를렌과 집사에게 명령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녹스를 내게 보내.”

“예?”

집사와 마를린은 물론 녹스도 고개를 들었다. 왜냐하면 그 말뜻은.

“네가 밖으로 나와도 된다는 소리야. 다만 내 허락이 있을 때만.”

“알겠습, 니다.”

녹스가 생각도 못 한 일이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할리드는 묘한 만족감을 얻었다.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뜬 얼굴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할리드는 제 품에 안긴 녹스의 머리카락에 입 맞추며 덧붙였다.

“나갈 땐 무조건 다른 사용인 한 명과 동행해야 하는 것도 잊지 말고.”

그것은 일종의 족쇄였다. 자신이 도망가지 않게끔 만드는 일. 하지만 녹스는 그것만으로도 기꺼웠다. 밖에 나갈 수 있게 되다니. 영원히 이 저택 안의 유령처럼 썩어 갈 줄 알았는데.

‘물론 사용인 외에도 감시책을 붙이겠지만.’

할리드가 요즘 자신에게 유하게 구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노예가 저택 밖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말은 곧 도망칠 수 있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녹스는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에게 갚아야 할 것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뭘 갚아야 하는데?

녹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게, 나는 그에게 뭘 더 갚아야….

“그보다 녹스.”

생각에 깊게 파고든 녹스를 밖으로 끄집어낸 건 할리드의 목소리였다.

“내일 연회에 너와 함께 오라는 명령이 있었다.”

“명령이 아니라 떼쓰기에 가까웠겠죠.”

녹스의 덤덤한 말에 할리드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차피 예상하고 있었던 일입니다. 주인님.”

녹스는 내일 그의 기분이 좋지 않으리란 게 눈에 선했다. 그래서 그대로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입 맞추며 달래듯 대답했다.

“전 주인님밖에 없습니다.”

‘전 주인님 외의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할리드는 보고받은 녹스의 말이 떠올랐다. 나 외에는 아무도 필요가 없다. 난 당신밖에 없다. 그 올곧은 목소리가 할리드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만들었다. 할리드는 녹스의 입술에 입 맞추며 입술 새로 속삭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한층 부드러워진 그의 목소리에 녹스가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당장 내일 컨디션이 많이 나쁠 것 같지는 않아서.

* * *

연회 당일이 되었다. 녹스는 아침부터 할리드와 욕실에 질질 끌려 처넣어졌고 사용인들은 말 그대로 그들을 박박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온몸을 광을 내고 있는데 할리드는 욕실에 녹스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불만스러워하는 듯했다. 하지만 목욕이 모두 끝난 후 자신의 몸에서 녹스와 같은 향이 난다는 사실에 조금 만족한 듯싶었다.

그렇게 할리드가 사용인들의 시중을 받는 중, 녹스에게도 옷이 한 벌 주어졌다. 노예가 된 이후 쳐다도 볼 수 없었던 고급 정장이었다. 목에 매는 볼로 타이는 그대로였지만 뒷모습만 본다면 어느 멀끔한 귀족가의 도련님처럼 보일 정도였다. 녹스는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할리드가 그런 제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기에 일단은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간만에 입어 보는 좋은 옷임에도 녹스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가끔 녹스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무엇을 하고 싶나 따위를 생각해 봤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지금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할리드는 자신의 단장도 제쳐 두고 녹스의 단장을 다 보고 난 후에야 제 것을 시작했다. 녹스는 옷을 다 갖춰 입고 얼굴에 가벼운 화장을 하는 할리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할리드는 저런 것을 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데 구태여 하는 이유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할리드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 그가 물어왔다.

“왜, 너도 하고 싶나?”

“아뇨. 그다지.”

정작 도련님일 당시에도 저런 절차는 귀찮아하곤 했던 녹스였다. 아, 할리드도 딱 그런 기분이겠군.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귀찮은데 절차상 해야 하는 그런 귀찮은 일. 딱 그 정도. 녹스는 할리드의 단장이 끝마쳐지길 기다렸다 곧 같이 1층으로 내려와 마차에 올라탔다.

황궁으로 나아가는 마차는 거칠 것이 없었다. 황궁 앞에 기다랗게 줄을 선 마차들을 지나쳐 곧장 황궁의 연회 홀로 향했다. 황궁의 이번 홀은 널따란 호수를 낀 홀이었다. 지난번 연회를 열었던 홀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베르티움 홀이었다.

규모가 작아 봤자 아주 극미한 차이이고 오히려 호수를 포함하자면 본디 다이아티온보다 컸다. 녹스는 할리드가 마차에서 내리자 곧바로 따라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국적인 차림을 한 왕족들이 홀에 몰려 있었다.

할리드가 마차에서 내리자 온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황제의 오른팔. 황제의 형제와 같은 자. 그리고 지금 단둘뿐인 공작 중 하나.

할리드의 존재란 해외 왕족들 사이에서도 단연 뜨거운 화두였다.

미혼 황제를 포함하여 엘러딘 바이스 공작 그리고 할리드 비아 공작. 이 세 사람을 노리는 뱀 같은 자들이 몰려 있는 커다란 홀을 보며 녹스는 어쩐지 자신이 떨어졌던 날의 풍경을 보는 것만 같았다.

“별일 없으면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예.”

녹스는 그날 뒤로 할리드에겐 언제나 고분고분했다. 이런 날에 주인의 곁에서 떨어질 일이 뭐가 있겠냐 싶겠지만 일이란 건 언제든 갑작스럽게 터지곤 했으니 말이다.

녹스와 할리드가 문 앞에 섰다. 본래대로라면 녹스가 그의 이름과 직함을 알려야 했지만, 문지기는 할리드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보았다는 듯 목청을 높이며 문을 열었다.

“할리드 비아 공작님께서 드십니다!”

누구나 끼고 온 파트너도 없이 홀로 성큼 들어선 그의 뒤론 예의 그 노예가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할리드에게로 향했다. 사람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녹스는 흘긋 그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땐 참 예쁘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어느덧 단단해져 그 누구보다도 조각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두껍게 진 쌍꺼풀과 회금색의 속눈썹, 그 아래 자리한 시리도록 푸른 눈과 곧은 콧대, 크고 진한 입술. 솔직히 말하면 호불호 따윈 나누지도 못할 미남인 것이다.

하나 녹스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사람들은 할리드를 바라본 뒤 곧장 녹스에게로 시선을 꽂았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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