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공작가 출신의 노예. 아마 이 세계의 모든 노예를 합쳐 봐도 가장 고귀할 핏줄.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발아래 두고 짓밟아 버리고 싶은 그런 노예.
차분히 가라앉은 암녹색 눈동자에 녹빛이 도는 검은 머리. 그리고 당당하게 편 어깨와 허리가 조금도 노예 같지 않은 자. 하나 황궁의 황제까지 홀렸다는 남 노예. 그들은 반득한 이목구비의 녹스를 보며 하나같이 눈을 굴렸다. 황제와 공작의 취향을 조금이라도 알아 두기 위해서.
할리드는 누군가와 어울릴 생각이 없다는 듯 벽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녹스가 곧 그의 옷깃을 잡았다. 할리드가 고개를 돌렸고 녹스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보다 많은 이들과 얼굴을 마주하십시오. 그편이 좋습니다.”
할리드는 미간을 슬쩍 찡그렸지만 결국 그의 조언에 따라 사람들이 많이 몰린 곳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귀족과 타국의 왕족들이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있었다.
“노예를 아끼신다더니 정말인가 보네요.”
“그가 공작님께 어느 정도까지 힘을 쓰죠?”
“생각해 보면 그는 노예라지만 고등 교육을 받은 귀족입니다.”
“쉽게 무시해서는 안 되겠어요.”
녹스는 할리드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현 황제와 세력의 중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리기만 하는 현 제국의 귀족들보다야 훨씬 현실을 잘 아는 말들이었다. 녹스도 문득 잊어버리고 있던 자신의 과거 이야기까지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공작님 각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공작님. 저는 파틀괴르 왕국에서 온….”
할리드가 사람들 사이로 끼어 들어가면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감탄을 하며 그를 반겼다. 녹스는 그의 뒤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 할리드가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에게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은 당연히도 찾기 힘들겠지만 어딜 가든 망나니는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말했다.
“귀한 노예를 가지고 계시더군요.”
녹스,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할리드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썹을 치켜올렸고 다른 사람들은 부채나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누구도 쉽게 꺼내 들지 못할 이야기를 꺼내자 사람들은 아닌 척 그들을 살폈다. 할리드가 비뚜름하게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공작의 이야기라면 사람들이 찾아 듣기 마련입니다.”
“내 이야기를 내가 듣지 못하는 곳에서 한다니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닙니다.”
“모두 공작의 찬사일 뿐이니 그렇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녹스는 지금 할리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에 대해 잘 알았다. 알고말고, 어제 무례하게 저택을 찾은 남자. 세인더스 발레리안. 발레리안 왕국의 왕태자이자 망나니.
아마 할리드도 그에 관해 이미 알아 두었을 터다. 세인더스는 샴페인 잔을 쥐고 가볍게 한 모금을 넘겼다. 여유롭다는 듯이. 그리고 할리드에게 말했다. 왕태자, 그리 가벼운 직함은 아니나 그렇다고 제국의 공작에게 뻗댈 수 있는 상황은 아닐 텐데. 하지만 그 망나니의 머릿속에 그런 사실은 들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공작가 출신의 노예는 무엇이 다릅니까.”
할리드가 침묵했다. 하지만 녹스는 잘 알았다 그 침묵이 평온이 아니라는 사실을.
할리드가 목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작게 내기 시작했다. 녹스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그의 허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분노하지 마십시오.”
“…….”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녹스의 말에 더 분노한 것만 같았다. 그는 곧장 세인더스 발레리안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커다란 키와 시퍼런 눈동자는 상대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녹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다가가는 중에 속닥이는 귀족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왜 아끼는 노예를 입에 올려서는….”
“그래도 왕태자를 저렇게 위협해도 되겠습니까?”
“지금 제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게 누군데요.”
“하지만….”
사람들이 저마다 입술을 가리며 말했다. 녹스는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아 관자놀이를 가볍게 누르다 할리드를 불렀다.
“주인님.”
“시끄러워.”
“참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자 할리드가 고개를 조금 돌려 녹스를 보았다. 녹스는 분노가 드글드글 들끓고 있는 그의 푸른 눈을 보며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분노하실 거라면 제대로 하십시오. 어정쩡하게 굴지 마시고.’
그 말에 할리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이 말이 맞는 말이다. 쉽게 분노하는 자처럼 보이지 않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 이 자리에선 노예를 건드렸다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생활을 다른 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까발린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처럼 꾸며야 했다. 그래야 여론이 이쪽으로 입을 모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제대로 된 분노가 필요했다.
할리드는 녹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손을 들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세인더스 발레리안 왕태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억!”
망나니의 다리가 단번에 바닥에서 떨어졌다. 옷깃이 목을 조이는지 왕태자의 목에서 꺽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지십시오.”
“각하!”
“세상에….”
사람들이 입을 모아 놀라는 와중에도 할리드의 힘에 감탄하기 바빴다. 성인 남성을 한 손으로 너끈히 들 수 있는 그 비상식적인 힘에 말이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그따위로 입을 놀리면 그 소중한 세 치 혀를 잘라 줄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할리드는 그 말을 하고 그의 멱살을 밀치듯 놓았다. 허공에 들려 있던 세인더스 발레리안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그 손에 든 샴페인 잔을 놓치는 바람에 앞섶이 한껏 젖어 들었다.
모두가 혀를 차거나 비웃으며 그자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곧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다. 녹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할리드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저 때문에 구태여 분란을 만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너 때문이 아니야. 그저 불쾌했을 뿐이다.”
그 말에 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당연한 일이지.
“알겠습니다.”
“넌…….”
“예.”
“…아니, 되었다.”
할리드는 무언가를 물으려다 이내 입을 닫았고 녹스도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홀의 정문이 활짝 열리며 문지기가 황제의 입장을 알려 왔다.
“제국의 지엄하신 아버지! 펠티온 안드라스 다이달론츠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참 길기도 한 소개였다. 황제는 사람들이 갈라지면서 드러난 붉은 카펫을 밟으며 입장했다. 어깨에 걸친 긴 망토가 제법 위엄 있게 흩날렸다. 녹스는 저 망토가 위엄 있어 보이기 위해 마법을 써 휘날리게 했다는 것에 제 팔목을 걸 수 있었다. 실제로 황족들은 보이는 것에 힘을 써야 하기 마련이다.
황제는 곧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홀에 모인 타국의 왕족들과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교류연에 참석해 주어 감사하는 바이오.”
제국의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 것을 축하해 주는 연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그의 지위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의미였고 모든 왕국의 왕족들이 이곳에 참석했다.
그렇기에 교류연은 좋은 분위기로 문을 열 수 있었다. 황제는 조금 더 긴 축사를 마치고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춤을 시작하기 전에 이어지는 순서가 있었으니. 바로 황제에게 바쳐지는 수많은 왕국의 공물들이었다.
“바르젤로 왕국의 사신단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공물들은 온갖 금은보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은.
“하하, 거참.”
어깨가 넓고 검은 머리를 한 건장한 남 노예들이었다. 황제는 소리 내어 웃고는 그들에게 관심을 표했다. 황제가 시선으로 그들을 훑자 바르젤로 왕국의 사신단은 어깨를 활짝 펼치고 예를 다해 인사를 올렸다.
“황제 폐하께 무궁한 영광이 있으시길.”
“그것참 감사하는 바이오.”
황제는 별다른 소리 없이 그들이 내민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건 남노들도 마찬가지라는 소리였다.
그들이 성공적으로 눈도장을 찍자 다른 왕국의 사절단들이 안달을 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공물이 쌓여 갈수록 눈에 띄는 것은 단 하나였다. 모두가 검은 머리의 남노를 챙겨 왔다는 것. 이러다 남노들로 하렘을 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황제는 처음엔 즐거워하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졌는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남은 공물들은 황제 궁으로 전하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 중한 자리를 내 선물 받는 자리로 만들 수는 없지.”
그와 동시에 음악이 시작되며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물러서 서로를 간 보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타국의 공주들과 귀족 영애들은 춤 신청을 받기 위해, 외국의 왕자들과 귀족 영식들은 춤 신청을 하기 위해 서로를 치열하게 재고 있었다.
공물들은 궁인들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로 사라졌고 그건 서른이 넘는 남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 황제는 자연히 귀족 여인들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