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당연하다. 현 연회에서 가장 많은 눈길을 받는 것은 황제와 할리드 비아 그리고 엘러딘 바이스 공작이었다. 엘리든 바이스는 언제 왔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입장해 연설을 듣고 있다가 다시 말없이 조용히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녹스는 엘러딘 바이스에 대해 떠올렸다.
고작 남작의 작위였던 남자가 지금은 공작이 되었다. 본디 그의 성정도 이런 파티를 즐기지는 않는 듯하니 아마 조용한 곳에 있다가 대화가 오고 갈 때쯤 느지막이 나올 게 분명했다.
“폐하.”
“제국에 영광이 있기를. 폐하.”
황제가 움직이자 여기저기서 인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황제는 그대로 그들을 가로질러 할리드의 앞으로 왔다. 할리드는 미간을 찌푸렸고 녹스는 몇 발자국 물러섰다.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건만 황제는 오자마자 녹스를 찾았다.
“정말 데리고 왔군.”
그러자 할리드가 입을 열지 않고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데리고 오라고 드러누우실 뻔하신 분이 말은 잘하십니다.”
황제가 드러누울 뻔했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내 체면까지 신경 써 줘서 고맙군.”
황제도 웃는 채로 입을 열지 않고 말했다. 귀족들끼리는 제법 잘 쓰는 수법이기에 녹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이번 진상품에 노예가 너무 많아 걱정이야. 좀 나눠 줄까?”
“됐습니다.”
황제는 웃는 낯으로 녹스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몸이 단단한 노예들이 많아. 쓸 곳이 많아 보이더군.”
“그렇습니까?”
“거참, 하나같이 같은 걸 들고 오니 무어라 해 줄 말도 없어서 다 받기는 했네.”
“축하드립니다.”
“비아냥대기는.”
황제가 할리드와 함께 있자 주변 귀족과 왕족들이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마다 황제와 공작에게 인사를 올렸다. 특히나 혼기가 찬 영애와 공주들이 많았다.
녹스는 상황을 지켜보다 조용히 더 물러섰다. 노예의 일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끼어야 하는 곳에선 어여쁘게 서 있고 빠져야 하는 곳에선 조용히 빠진다. 그건 그가 지독한 귀족이었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다만 눈앞에서 보이지 않으면 할리드가 무어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의 시야 안에 있어야 했다.
녹스는 말 그대로 무리에게서 몇 발자국 물러나 홀로 섰다. 홀로 서 있으니 호기심에 찬 시선들이 붙어 왔지만 보통 혼자 있는 노예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보통은.
가만히 뒷짐을 지고 있는 녹스의 뒤로 누군가 속삭이며 다가왔다. 아는 목소리였다.
“주인이 바빠 보이는군.”
세인더스 발레리안. 아까 망신을 당했던 남자가 녹스에게 다가왔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왔는지 젖었던 셔츠가 멀쩡해져 있었다. 녹스는 그가 왜 이렇게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 봤자 노예일진대.
하지만 그가 손을 올려 자신의 허리께를 쓰다듬을 때는 곧바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 그러니까 이쪽도 멀쩡해 보이는 남색가라는 거군. 아니, 멀쩡하진 않은가?
저번에 다른 자에게 다리를 벌릴 수 있냐 물은 것도 다 이 탓이었나?
보통 노예란 주인의 소유 아래 있었지만 노예의 판단하에 할 수 있는 게 몇 개 있었다. 주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면 유혹해 내는 것. 그러니까 보통의 노예는 그럴진대….
‘내가 그래 봤자 딱히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
상대방이 할리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녹스가 생각을 잇느라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손을 더 아래로 내렸다. 허리선을 타고 내려가 골반 주변을 쓰다듬으며 가까이서 속삭인 것이다.
“너만 한 노예가 몇이나 들어 왔는 줄 알고 있느냐?”
그러니까 결국 버려질 노예이니 자신과 한번 놀아 보자는 뜻인가. 녹스는 상대의 심리가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쓰다듬는 손을 콱 붙잡았다.
녹스는 할리드를 보았다. 그는 아름답게 치장한 여인과 귀족들 사이에 황제와 함께 파묻혀 있었다. 그는 어디선가 본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 어울리고 있었는데 녹스는 저도 모르게 그 미소에 길게 시선을 던졌다. 이제 나로선 보지 못하는 미소. 하지만 내가 아니라면 누구든 볼 수 있는 미소.
그렇게 생각하다 고개를 돌린 녹스의 눈과 왕태자의 눈이 한 번 마주쳤다. 세인더스 발레리안은 눈매를 휘었다. 그리고 녹스는….
그때쯤. 할리드는 자신에게서 떨어진 녹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고개를 돌려보고 난 후에야 저기 떨어진 녹스가 보였다.
‘저건….’
그는 단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녹스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해 기분을 잡치게 했던 놈이 녹스의 곁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저택까지 찾아와 녹스를 모욕하고 조롱했던 놈. 심지어 다른 놈에게 다리를 벌릴 수 있겠냐며 녹스의 몸에 노골적인 관심을 보이던 놈.
그런 자의 손이 녹스의 골반 선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할리드는 순식간에 불이 확 붙는 것을 느꼈다. 할리드의 시선이 심상치 않자 황제도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찡그리듯 웃었다. 송곳니가 드러나 꽤 사나워 보이는 모양으로.
“웬 놈이 우리 걸 노리는군.”
“정확히는 제 것이지요.”
할리드는 곧장 자리를 벗어나 저놈을 매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아악!”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녹스가 그의 손을 쥐는 듯싶더니 이내 세인더스 발레리안의 팔을 순식간에 꺾어 잡아 버린 것이다. 날카롭게 퍼져 나간 비명에 홀 안의 모든 시선이 녹스와 세인더스 발레리안에게 꽂혔다.
“아! 아!”
녹스는 그의 팔을 부러뜨릴 듯 꺾어 잡은 채, 무심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녹스!”
할리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할리드가 녹스를 부르자 녹스는 고개를 들어 할리드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서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는 표정이었다.
할리드는 그때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대로 부러뜨리라고 할까. 아니다. 자신이 부러뜨린다면 모를까 노예 신분이 명령도 없이 외국 왕족의 팔을 부러뜨리는 건 분명 문제가 된다.
“그만!”
그만이라는 단호한 명령에 녹스는 그를 놓았다. 어깨가 어긋난 듯 그의 비명이 멈추지 않았다. 세인더스 발레리안의 근처로 그의 시종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녹스에게 수작을 걸기 위해 일부러 시종을 떨어뜨려 놓은 것 같은데 이런 화를 당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
녹스는 가만히 뒷짐을 지고 섰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사건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세인더스 발레리안이 소리쳤다.
“폐하! 제국의 규칙은 왕족보다 노예가 위에 있습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뭔가.”
“방금 보시지 않았습니까! 노예가 제 팔을 꺾었습니다.”
“어허, 그럼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노예의 말을 들어 볼까?”
황제의 얼굴은 고소하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짐짓 엄한 척하며 녹스를 바라보았다. 세인더스 발레리안은 여기서 노예의 말을 듣는다고? 싶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노예의 말을 들어서 어디에….”
“공작 각하와 황제 폐하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댔습니다.”
그 말에 황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물건이 너라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닙니까?”
녹스는 뒷짐을 진 채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검었다. 자신을 물건이라 칭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황제는 그 눈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아 저 눈이, 저렇게 검었던가. 처음으로 눈치챈 일이었다.
그건 할리드도 마찬가지였다. 고요히 자신을 물건이라 지칭하는 남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건…. 확실히 문제가 되지.”
하지만 그 기묘한 사실은 잠시 뒷전으로 밀렸고 황제의 흥미는 지금 이 사건에 쏟아졌다. 황제가 숨기지 않고 웃자 귀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팔을 꺾인 세인더스 발레리안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해 가고 있었다. 황제가 어떤 답을 낼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폐하! 아무리 발레리안이 제국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다 하더라도 저는 발레리안의 왕태자…!”
“그래서, 발레리안의 왕족쯤 되면 나와 공작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도 된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세인더스 발레리안은 분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시종의 부축을 받아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지어 그는 황제 폐하의 것도 아니지…! 억!”
짜악!
그렇게 주장하는 세인더스에게 무언가 날아와 얼굴을 때렸다. 바로 장갑이었다.
“그럼 내 물건에는 함부로 손을 대도 된다?”
바로 할리드의 장갑이었다. 장갑을 던지는 것은 바로 결투를 의미한다.
“그럼 내가 나서면 되겠습니다. 감히 제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도 된다고 생각하시니 제 명예를 위해서라도 나서야 하지요. 녹스, 이리 와.”
녹스는 태연히 걸어서 할리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속삭였다.
“제 선에서 정리하겠습니다.”
그 말에 할리드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네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 말에 녹스가 저도 모르게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설마,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닐 테고.”
“…….”
할리드는 뒤늦게 녹스가 제 가문의 기사 단장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냈다. 하지만 그는 검을 놓은 지 한참이었고 그가 어느 정도의 무위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녹스는 자신을 믿으라는 듯 할리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때마침 세인더스 발레리안이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