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이, 이 결투 신청은 무효합니다! 폐하! 제가 어찌…!”
“지금 나와 이야기할 때가 아닐 텐데.”
황제는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얼굴로 상황을 방치했다. 세인더스 발레리안은 할리드 공작을 바라보며 씨근덕댔다.
“어찌 이럴 수 있소! 고작 노예 때문에 결투를 신청하다니!”
“함부로 내 물건에 손을 댄 무뢰배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국에서 공작과 타국 왕족 지위의 높낮이는 애매한 선상에 서 있었다. 그 왕국이 제국의 종속국이면 단연 공작에게 뻗대지 못할 것이오. 하지만 발레리안처럼 자주국일 경우엔 공작이라도 한 수 접어 주어야 함이 옳다. 하지만 8년 전 전쟁의 특이성 때문에 발레리안 또한 제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이 복잡한 상황 때문에 둘의 지위는 비등비등했고 덕분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할리드 비아는 꽤 불쾌한 얼굴로 싸늘히 왕태자를 바라보다 녹스를 제 곁으로 끌고 와 세인더스가 쓰다듬었던 녹스의 골반 위를 붙잡았다.
“결투는 제가 나갑니다.”
녹스가 말하자 세인더스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그러니 그쪽에서도 대리인을 내보내십시오.”
“노예가, 결투에 직접 나선다니?”
“저는 결투 신청의 권한이 없지만 제 주인께선 있으시지요. 제가 대리로 나간다 하여도 문제 될 것 없습니다.”
그 말에 세인더스 발레리안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할리드 비아 공작은 그 무위가 남다르기로 제국을 넘어 왕국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저 건방진 노예에게 충분히 화풀이를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세인더스 발레리안이 금방 얼굴을 바꾼 채로 으르렁거렸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
“그대야말로.”
할리드 비아는 세인더스가 아닌 녹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리드의 얼굴은 약간의 걱정으로 차 있었다. 그리고 녹스는.
‘여기서 죽으면….’
조금 곤란한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녹스는 무의식적으로 생각난 그 문장에 다시금 스스로 물었다. 무엇이 곤란하지? 아직 다 갚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하지만 그 의문을 전부 해소하기도 전에 세인더스 발레리안이 자신의 호위 기사를 불러들였다. 발레리안 왕국의 제일 검이라 불리는 그는 오블라스 베인터 경으로 왕국에선 그 무위를 뛰어넘을 자가 없었다. 세인더스는 자신의 호위 기사에게 속삭였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겠군. 가서 팔 하나는 잘라 버리게.”
호위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한숨을 감추지 않았다. 왕국에서도 난봉질로 유명한 작자가 제국에 와서까지 그 손버릇을 못 고치고 기어이 사고를 치다니. 하지만 그렇다 하여 공작의 애첩이라는 저 노예의 손에 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녹스가 말하였다.
“폐하, 검을 빌려주십시오.”
“허, 참.”
세인더스 발레리안이 헛웃음을 쳤고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노예가 검을 지참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자신의 기사 중 한 명에게 말했다.
“누구 하나 검을 빌려주거라.”
본디 기사의 검은 함부로 빌려주는 것이 아니나 황제의 명령 아래에선 의미가 없었다.
그의 호위 기사 중 하나가 자신의 검을 풀어 녹스에게 건넸다. 녹스는 손아귀에 잘 맞지 않는 검을 쥐고 만지작댔다. 얼마 만에 쥐어 보는 검이던가. 희미한 향수가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검도 지니지 않은 노예가 함부로 나서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왕국에선 어떨지 몰라도 제국에선 노예가 검을 지닐 수 없습니다.”
녹스는 세인더스 발레리안의 말에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며 검을 늘어뜨린 채 앞으로 나섰다.
주위 귀족들은 주변으로 모여 동그랗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사건이란 말인가! 외국의 왕족이 공작의 노예에게 함부로 손을 대 그의 호위 기사와 노예가 직접 결투를 벌인다니!
“네게 유감은 없다만 하필 내가 상대인 것이 네 불행이다.”
“먼저 오십시오.”
“뭐라?”
녹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암녹색 눈은 언제나 검게 죽어 있었고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황제와 할리드는 요즘 녹스가 고분고분해 기분이 좋았으나 그저 노예라 그런 것일 뿐.
그것은 녹스의 기분이 아니었다. 녹스는 생각했다. 내가 무슨 기분이었기에 그때 팔을 꺾었던 걸까. 기분이 나빴나? 스스로에게 물어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노예 주제에 오만하구나.”
“그쪽은 기사임에도 말이 많으십니다.”
그 말에 기사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그리고 곧장 검을 빼 들었다.
“네 오만이 널 사지로 몰 것이다! 결투 때 벌어진 죽음은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잘 알겠지.”
기사가 얼핏 비웃었다.
“본디 귀족이었으니 말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녹스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경이 이 결투에서 가지고 갈 것이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이겨도 고작 노예를 이겼으니 영광 따윈 없을 테고, 진다면 가지고 있던 명예도 사라지겠지. 왕국의 기사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럼, 결투를 시작하지.”
말이 많아. 황제의 얼굴은 할리드와 다르게 여유가 있었다. 저쪽이 지금 위세를 부리기 위해 저런 소리를 하지만 공작의 것이고, 황제가 총애한다는 애첩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팔다리를 상하게 하는 것조차 못 할 겁쟁이들. 지금은 아마 겁을 주려는 모양인데.
‘어느 정도의 무위를 지녔을까.’
황제의 호기심은 거기까지 닿아 있었다.
“녹스가 검을 든 모습을 본 적 있나?”
“…어렸을 때나 조금.”
“그럼 도움이 안 되는군.”
할리드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황제는 그것이 할리드가 녹스를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할리드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렇게 걱정할 거면 왜 내보내선. 물론 녹스가 먼저 나섰다는 사실은 옆에서 보아 잘 알고 있었다.
‘뭐, 여차하면 내가 중지시키면 되는 일이기는 하다만.’
어차피 제국 안에서 황제의 권력보다 더 앞서는 권리 따윈 없었다. 중간에 억지로 결투를 무마시킨다면 지고 있던 자의 명예는 바닥을 기겠지만 노예에게는 떨어질 명예 따위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섰는데 지기만 한다면 재미없지.”
어쩌면 약간 실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편, 그저 말 그대로 유희 삼아 녹스를 대하는 황제와는 다르게 할리드는 주먹을 꽉 쥔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결투가 시작되었다.
먼저 공격하라던 녹스는 팔을 늘어뜨린 채 상대를 보고 있었다. 상대는 검을 앞으로 치켜들고 천천히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녹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기사는 생각했다.
‘보기보다 실력자다.’
그 또한 어느 경지 이상을 이룬 기사였다. 그러니 잘 알 수 있었다. 지금 무방비하게 선 것 같은 상대의 자세에 빈틈이 없다는 사실을. 기사는 천천히 검을 기울이다가 이내.
팍!
바닥을 박차고 녹스에게 달려들었다.
카앙!
검들끼리 부딪혀 커다란 소리가 났다. 녹스는 검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부딪힌 기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어찌….”
이 정도 기량을 가진 자가 노예로 있는 거지? 녹스는 곧장 그를 밀어냈다. 카각, 검들끼리 세로로 쓸리는 소리가 나고 녹스는 곧 검을 치켜올려 찌르기 자세로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캉! 검의 단편으로 녹스의 검 끝을 막아낸 기사가 그대로 두 발자국 물러섰다. 녹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검의 방향을 바꾸어 그의 검을 후려쳤다.
카강!
“크윽!”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발레리안의 기사가 밀리는 기세이자 주변에서는 감탄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기사 단장이었다고 했나?’
‘발레리안의 패착이네요. 노예라고 무시를 하다니.’
‘그보다. 노예가 저 정도 기량을 가지고 있어도 됩니까?’
‘그럼 저걸 빼앗을 방법이 있나요?’
‘검을 쥐여 주지 않는 게 최선이겠죠.’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기사의 정신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노련한 기사답게 자세를 바로잡아 다시 한번 녹스에게 달려들었다. 카앙! 커다란 소리가 울렸지만 녹스의 자세는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콱!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그를 뒷걸음질 치게 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기사의 팔과는 다르게 녹스의 팔은 굉장히 안정적이었다. 녹스는 검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이 정도 기량을 왕국에서는 제일 검이라고 부르는군. 제국에서는 없을 일이었다. 하지만 녹스는 몰랐다. 제국에서도 이 정도면 당당히 황족의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카가각-!
녹스는 순간 검을 기울여 그에게 더욱 다가섰다. 상대의 칼날도 자신에게 가깝게 다가오는 위험한 수였다. 하지만 녹스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여기서 왜 검을 휘두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분노했나?’
카앙!
기사가 겨우 그 검을 쳐 내고 훨씬 멀리 물러섰다. 녹스는 다시 한번 팔을 늘어뜨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기사는 뒷걸음질을 치며 그를 견제하기만 했다. 녹스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기사의 얼굴을.
짙은 검은 머리를 한 기사는 자신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녹스는 크게 도약해 기사에게 단번에 다가갔다. 그리고 기사의 평범한 검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알았다.
그는 검은 눈동자임에도 빛이 있었다. 두 눈이 반짝였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자신과 다르게. 녹스는 순간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의 틈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