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제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는 건지. 그가 첩자로서 라이네리오 가문에 있을 때도 그에게 원한을 살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인지 자신을 보면 무언가 빼앗긴 사람처럼 군다. 빼앗긴 게 누구인데.
“제게 하실 말이 있다면 저보단 제 주인을 찾아가 따지시는 게 나을 겁니다.”
“넌 노예 주제에 조금도 노예처럼 굴지 않는군.”
“황제의 총애까지 등에 업었으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녹스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발티아스의 얼굴은 되레 찡그려졌다. 녹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티아스는 녹스보다 키가 조금 더 작았다.
“무엇이 그리 두려우십니까.”
발티아스 데론은 물러서지 않고 녹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녹스는 제법 웃기다는 생각을 했다. 첩자일 당시엔 저와 조금도 눈을 못 맞추던 사내가 이리 후작이라는 탈을 쓰니 당당하게 눈을 봐 오지 않는가.
‘아, 이제 내가 노예라는 이유도 한몫하겠군.’
녹스가 말했다.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무엇을 바라는진 모르겠지만 전 당신께 더 해 드릴 것도 무언가를 할 능력도 없습니다.”
“…….”
발티아스 데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녹스 라이네리오라는 것 자체가 문제야.”
“그렇다면 더욱 문제가 안 되겠군요.”
라이네리오라는 성을 가진 녹스는 더 이상 없으니. 녹스는 말을 차갑게 잘랐다. 녹스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느리게 그를 지나쳐 걸었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열고는 말했다.
“제가 나갈 수 없으니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넌 노예치고 너무 건방져.”
“건방질 수 있는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난 네가 바닥을 구르길 바랐어.”
“지금보다 더한 바닥이 존재하긴 하겠군요.”
녹스는 덤덤하게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뭡니까.”
발티아스 데론은 당연한 것을 말하듯 답했다.
“네가 모든 것을 타고났기 때문이야.”
“……하.”
녹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냥 숨을 터뜨린 것에 가까웠다. 얼굴엔 조금의 웃음기도 비치지 않았다.
발티아스 데론은 지금 녹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 중에 있었다. 그대로 죽여 버리자니 황제와 공작이 추적할 것 같았고 추적 끝에 자신이 있으면 분명 의심의 싹을 틔울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녹스를 그대로 두자니 언제 입을 열지 몰라 불안했다. 두려움이 그를 매시간 매초 휘감았다.
“제가 모든 것을 타고났다고요.”
녹스는 생각했다. 발티아스 데론 후작이 자신에게 왜 이러는 걸까. 자신에게 이상한 자격지심을 느끼는 인간들이야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그런 걸 느끼는 이유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녹스는 곰곰이 생각을 이어 나갔다. 이 남자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집요한 이유. 녹스는 내키는 대로 일단 그를 한 번 불렀다.
“후작님, 당신….”
그러다 문득 떠오른 한 가지.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가는 한 가지 가정.
“라이네리오 공작 가문의 정보를 빼돌린 것이 자신의 공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문득 그 말을 뱉고 나니 그것이 사실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당신들이 결국 날 이용해 먹고 버렸다는 사실에 죄책감이라도 느껴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려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그 잘난 자존심에 걸리적거리기라도 하는 겁니까.”
녹스는 헛웃음이 다 터졌다. 어차피 날 속여 이용한 건 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것도 너고. 속은 것은 그저 어리석은 나고 이용당한 것도 나다. 발티아스 데론은 얼굴이 굳어 있었다. 녹스는 그 얼굴을 보고 자신이 말한 세 가지가 전부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했다.
“가지가지 하십니다.”
녹스는 그에게 단정하지만 거친 말씨로 말했다.
“더 할 말 없으면 꺼지십시오.”
그의 눈이 매서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 자꾸 건드리지 말고.”
발티아스 데론은 주춤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망치듯 뛰어 사라졌다. 저 멀리로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녹스는 조용히 문을 닫고 다시금 도서관 안으로 파묻혔다.
발티아스 데론은 붉은 복도를 뛰고 있었다. 그는 숨이 턱 끝까지 찰 때까지 뛰다가 겨우 멈추어 서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죄책감?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그딴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그의 공을 가로챈 것이 탄로가 날까 봐 무서워서….
덜컥, 그의 안에 있던 무언가가 움직였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내가 공을 훔쳐 간 걸 황제가 암묵적으로 인정한 줄 아는구나.’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지금까지 자신은 녹스 라이네리오가 왜 자신의 공에 대해서 알리지 않는지, 그 이유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그가 착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녹스 라이네리오는 내게 공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그저 내게 이용당한 줄 아는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발티아스 데론은 자신이 눌러놓고 꺼내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목까지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것은 녹스의 말처럼 죄책감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만족감, 안도감. 그따위 것들.
그리하여 발티아스 데론은 떠올렸다. 녹스 라이네리오를 치워 버리는 방법엔 목숨을 빼앗는 것 말고 또 다른 것이 있다는 사실을.
* * *
녹스는 발티아스 데론에 대해 더 이상 떠올리지 않았다. 그다지 떠올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눈앞에 얼쩡거리지만 않으면 그에 대해 생각할 일 따윈 없었다. 자신을 이용해 놓고 제게 자격지심을 가진 인간 따위 신경 써서 뭐 하나.
녹스가 책을 읽고 있으니 시간은 금방 지났다. 녹스가 책을 덮을 때쯤 다섯 시가 되었고 시간에 맞추어 할리드가 그를 데리러 왔다.
“몸은 괜찮나?”
“괜찮습니다.”
그렇게 굴려 먹고도 괜찮냐는 말이 나오기는 하는군. 녹스는 시큰둥하게 생각하곤 그와 함께 곧장 연회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할리드에게 몰려들었고 녹스 자신은 그저 몇 발자국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았다. 저번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시간을 보냈다. 아,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점은 빼고. 저번 일 때문에 녹스에게 흥미를 보이거나 접근하는 자는 없었다. 아니,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는 쪽이 옳겠지. 혹시나 자신이 그렇게 될까 봐.
“아, 데르만트 공주님.”
“공주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데르만트 공주가 나타난 건 그때쯤이었다. 그녀는 척 보기에도 할리드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 커다란 눈을 할리드에게서 떼지 못 했으니까.
“비아 공작님을 뵙습니다.”
“…데르만트 공주님을 뵙습니다.”
공주는 손등을 내밀었고 할리드는 데르만트 공주의 장갑 낀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공주는 수줍게 손을 거둬들이더니 곧 두어 발자국 더 가깝게 다가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무위가 대단하시다는 말을 저 멀리서 몇 번 들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거기까지 도는 줄은 몰랐군요.”
“저희 왕국은 검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아버지께서 기사 양성에 힘을 쓰고 계십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연회 때 비아 공작님을 꼭 찾아뵙고 그 지혜를 얻어 오라 하셨습니다.”
녹스는 그 이야기를 듣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용병 출신들만큼 무식한 작자들이 어디 있다고 할리드에게 지혜를 빌려 오라 말을 했을까. 할리드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콧잔등을 조금 찡그렸다.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공주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타날 때부터 느낀 거지만 그녀의 목적은 아무래도 지혜가 아닌 모양이었다. 키 크고 잘생긴 할리드의 얼굴을 집요하게 쳐다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기만 했으니까.
그러던 중에 데르만트 공주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그 전에, 제게 춤 신청을 해 주시겠습니까.”
꽤나 당돌한 언행이었다. 보통 춤 신청은 남성들이 여성에게 하는 게 보편적이니까. 썩 못 할 짓은 아니지만 공주나 되는 인물이 도전적으로 할 만한 행동은 못 된다는 이야기다.
녹스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여기서 공주를 민망하지 않게 하려면 그가 자연스레 춤 신청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녹스는 할리드가 공주를 데리고 당연히 댄스 홀로 갈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할리드는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로 공주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지금 급한 부름을 받아 춤 신청은 어렵겠습니다. 공주.”
“예, 예?”
용기를 내어 한 춤 신청이 무산되자 공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모욕받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신 할리드는 내민 손등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며 미안함을 전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 아. 급한 일이면 어쩔 수 없지요.”
할리드가 그렇게까지 하자 공주도 정말 급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붉어진 얼굴을 조금 진정시켰다.
하지만 녹스가 알기론 할리드에게 당장 급한 일은 없었다. 물론 그 말을 멍청하게 입 밖으로 낼 리는 없고. 녹스는 곧장 걸음을 옮기는 할리드에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붙었다.
할리드는 비어 있는 테라스로 향했고 테라스로 들어오자마자 커튼을 쳤다. 그는 테라스에 준비되어 있는 벤치에 앉아 마른세수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녹스는 그의 옆에 서서 뒷짐을 진 채 말했다.
“춤을 한 번 추었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