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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67화 (67/158)

제67화

녹스가 그리 말했다. 다른 왕국의 공주를 아내로 맞는 게 지금의 할리드에게 썩 좋은 선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칼 같이 밀어낼 필요까진 없었다. 공작 부인 후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니까. 하지만 할리드의 입에선 녹스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춤을 출 줄 몰라.”

“아.”

녹스는 가만히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할리드는 공작으로서 해야 할 업무를 처리하고 배우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했다. 그러니 사교계에 관련된 것은 거의 읽지도 배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춤을 추는 법 따위도 포함되어 있을 거고.

할리드의 시종들은 이런 걸 신경 써 주지 않고 무얼 했나. 녹스는 고개를 왼쪽으로 조금 기울였다가 곧 그의 앞으로 가 손을 내밀었다.

“속성으로 하나 알려 드리겠습니다.”

“네가?”

“예, 저도 사교계에 잘 나간 편은 아니지만 춤을 배우기는 했으니까요.”

할리드는 잠시 멍청하게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녹스의 손을 잡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녹스와 눈을 맞췄다. 녹스는 할리드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제 허리에 팔을 감으십시오.”

할리드가 잠시 머뭇거리다 허리에 팔을 감아 왔다. 침대 위에서는 배려 없이 쥐어 당기면서 여기서 머뭇거리는 건 또 뭐람. 녹스는 미간을 찌푸리는 대신 그의 손을 가볍게 당겨 제 허리를 더 바싹 안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쪽 팔을 가볍게 내미십시오. 예, 그렇게.”

녹스는 할리드가 내민 팔에 손을 얹었다. 여성의 입장에서 춤을 추는 건 또 처음이지만 스텝이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리드 하냐 리드 당하냐의 차이지.

“제 발을 잘 따라오십시오. 무도회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춤이니 이것 하나 정도면 방금 일 정도는 가볍게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녹스는 연회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희미한 음악에 집중하며 발을 옮겼다. 그러면 할리드의 발이 그 뒷자취를 따라 밟는다. 할리드는 몸을 쓰는 것을 잘하니 이런 것도 잘할 줄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무엇이든 가르쳐 주면 곧잘 했으니까. 녹스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이젠 제 주인이 된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가르쳐 주고 배우고, 그건 예전과 똑같은데 왜 이렇게 예전과 다른 기분이 드는 걸까.

“…왜 쳐다보지?”

“춤을 추는 상대와 시선을 맞추는 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 말에 할리드는 어째서인지 눈을 맞추는 대신 시선을 내리깔며 그의 스텝을 따라가는 데 집중했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연회장에서 나온 불빛에 비쳐 회금색으로 반짝였다. 그래, 지금도 예쁘기는 참으로 어여쁘다. 하는 짓거리가 전혀 달라서 그렇지.

두 사람의 춤은 천천히 이어졌다. 가끔 할리드가 박자를 삐끗하긴 했지만 무난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두어 번 반복하니 할리드는 아주 말끔하게 춤을 외워 냈다.

“이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냐.”

할리드는 어째서인지 아직 부족하다며 녹스의 허리를 세게 감아 왔다. 그는 어쩐지 조금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녹스는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깨달았다. 아, 나와 조금 더 춤을 추고 싶은 거구나.

녹스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인이 그러길 바란다면 그저 해야 하는 게 노예가 할 일이었기에 그는 모르는 척 할리드와 몇 번 더 춤을 추었다. 할리드가 만족할 때까지.

그렇게 녹스는 다시 출 일이 없는 춤을 지겹도록 추고 나서야 할리드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커튼을 걷고 연회홀로 나섰다. 둘이 어슬렁거리며 홀에 나타나니 곧장 누군가 그들을 불러왔다.

“어딜 갔나 했더니. 또 둘이 붙어 있었나 보군.”

“노예가 주인을 따라다니는 건 당연한 일이죠.”

“뭐,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황제, 펠티온이었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둘에게 다가와 말했다.

“영 못 어울리는 것 같은데.”

“적당히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그래, 천천히 익숙해져 가면 되니까. 그리고 자네 같은 경우엔 황궁 연회가 아니면 잘 나타나지도 않으니 사람들이 더 안달을 내겠지.”

황제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건 녹스도 마찬가지였다. 신비주의라는 게 썩 나쁘지만은 않다. 황제는 설핏 웃다가 곧 자신의 시종을 불렀다. 시종의 손엔 고급스러운 상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전해 줄 것이 있어서.”

“무엇입니까.”

“그리 좋은 건 아니니 너무 기대 말게.”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것치고 상자는 장인이 만든 듯 섬세했다. 녹스는 그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또 저를 괴롭힐 만한 물건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할리드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손이 워낙에 커 상자가 작지 않은데도 손아귀 안쪽이 남았다,

“지금 열어 봐도 됩니까?”

“얼마든지.”

할리드는 심드렁한 얼굴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엔 푸른 보석으로 된 목걸이가 두 개 들어 있었다. 아니, 목걸이라고 하기엔 길고 보석이라고 하기엔 크다.

그 궁금증을 해결해 주듯 황제가 입을 열었다.

“마정석으로 만들어진 통신구네.”

“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는 잘 쓸 것 같아서 말이야.”

“그렇습니까?”

“그래. 이번 연회를 잘 견뎌 준 상이니 그냥 받아.”

“글쎄요. 제 생각엔 다른 쪽의 상인 것 같은데.”

할리드가 찜찜하다는 듯 말했다. 황제가 소리 내어 웃으며 녹스를 바라보았다.

“뭐, 다른 의미도 있고.”

녹스는 그의 시선을 받으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눈을 바닥으로 깔았다. 여기서 제가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노예에게 미약을 먹이고 그 추태를 보여 준 것에 대한 상이라고 한다 해도 말이다.

“일단 잘 받아 놓겠습니다.”

“그래, 이만 돌아갈 건가?”

“슬슬 그럴 참입니다.”

“끝까지 남아 보는 것도 즐거울 텐데.”

“아직까진 그런 즐거움은 못 찾겠군요.”

“그래. 그럼 조심히 돌아가게.”

“예.”

녹스와 할리드는 그렇게 연회 중간에 황궁을 떠났다. 연회는 며칠 더 남아 있었지만 할리드는 더 이상 궁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마차에 탄 할리드가 귀찮다는 듯 다리를 꼬고 녹스에게 말했다.

“내일은 저택에 혼자 있어. 난 사냥 대회에 참석해야 하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럴 때가 오긴 했군요.”

사냥 대회에 참석할 거면 그냥 황궁에서 머무는 게 편할 텐데. 녹스는 그러다 곧 할리드가 무리한 자신을 위해 저택을 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배려인지 뭔지. 녹스는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이러나저러나 두 사람보다는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게 훨씬 나았으므로.

“푹 쉬어.”

오래간만에 저택에 돌아오자 할리드는 웬일로 그날 밤은 녹스를 그의 방에서 지내게 해 주었다. 무리시켰다는 생각을 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어찌 생각하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던 녹스는 명령에 충실히 따라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드는 것을 택했다. 어차피 밤에 제대로 자질 못하니 이런 때에 몰아 자 두는 것이 좋기는 할 테니까.

눈을 감으면 수많은 생각들이 그를 잠들지 못하게 괴롭혔지만 녹스는 그것들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리고 제 몸을 괴롭히던 어제의 쾌락을 떠올렸다. 뇌를 태울 듯, 이젠 제대로 떠오르지도 않는 그 괴로움을 기억해 내면 곧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게 된다. 그렇게 그는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뜨니 이른 오전이었다. 어제 일찍 잠들기는 했지만 피로가 쌓여 눈 뜨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몸에 새겨진 버릇은 오래가는 모양이다.

씻고 옷을 챙겨 입은 후 멍하니 할리드를 찾아가니 그는 사냥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옷시중을 받고 있었다. 사냥 대회가 아침 일찍 시작하는 탓이겠지.

“저택에 얌전히 있어. 저녁 식사 전에는 돌아올 테니.”

“알겠습니다.”

녹스는 간만에 생겨난 빈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했다. 모자란 수면을 취하는 게 제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누워도 잠이 더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녹스는 수면을 취하는 데 꽤 어려움을 느끼고 있으니까. 할리드와 몸을 섞다 기절하는 것이 아닌 이상 잠드는 데 꽤 오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녹스는 가 보라는 듯 손짓하는 할리드의 말에 따라 어슬렁어슬렁 할리드의 방을 나와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으로 향하던 도중 문득 창밖으로 정원이 보였다.

그리고 그 정원 위에 작은 인영이 보였다. 아, 그 애다. 어린 하녀. 아이는 자기 몸만 한 포대 자루를 어디선가 가져와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쟤도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 싶어진 녹스는 설렁설렁 걸어 정원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이 나오는 동안 고작 열 발자국 정도밖에 이동 못 한 아이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아, 깜짝이야! 아아, 안녕하세요!”

어린 하녀가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뜨다 이내 활짝 웃었다. 그녀는 평소의 하녀 복장이 아니라 와인 색의 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 원피스에 물끄러미 시선을 두자니 하녀가 설명했다.

“오늘 휴가거든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 포대 자루는 뭡니까.”

“저택에서 얻은 남은 약초들이에요! 공작님께선 튼튼하시잖아요. 그래서 어느 정도 보관하고 기일이 지난 약초들은 다 버린다기에 받아 왔어요!”

“그런데, 들고 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될 거예요!”

“마차를 타고 가지 그러십니까.”

“마차는 돈 아까우니까요. 그리 멀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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