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69화 (69/158)

제69화

“그럼 친구라도 돼요? 친구라고 하기에도 나이 차이가 좀 나는데.”

“동료입니다.”

“동료?”

“예, 같은 곳에서 일하는 동료.”

“아….”

에나의 오빠는 일단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 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안정감이 있기는 하지. 다만 녹스는 잠시 입 밖으로 내고서 어색한 감을 느꼈다. 하지만 에나는 가슴을 쫙 폈다.

“내가 본 하인 중에 제일 잘생긴 것 같아. 오빠 같은 거랑은 비교도 안 돼.”

“야! 거기서 내 이야기가 왜 나오냐?”

“그야 이렇게 나란히 보고 있으니까. 비교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네? 오빠는 그 얼굴로 결혼은 할 수 있으려나….”

“내 얼굴이나 네 얼굴이나 똑같은 얼굴이다. 나한테 욕하는 건 네 얼굴에 침 뱉기밖에 안 돼.”

“…….”

에나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녹스가 보기에도 그랬다. 동쪽과 북쪽에 나란히 떨구어 놓아도 남매라는 걸 단번에 알아볼 만큼 닮았다. 에나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오빠는 손님한테 내올 차나 사 와! 내가 엄마 돌보는 동안!”

“나 일 끝나고 방금 들어왔거든?”

“맞아. 그러고 보니까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야? 설마 또 잘렸어?!”

“아, 아냐! 오늘은 할 일이 별로 없으니까 일찍 돌아가 보라고….”

“화상아! 그런 날에도 내가 꼭 붙어 있으라고 했지! 붙어 있는 만큼 돈이 나오는 거잖아. 그런 날에도 일을 찾아서 해야 할 거 아냐!”

에나가 오빠의 등을 팍팍 주먹으로 쳤다. 에나의 오빠는 엄살을 피우더니 금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녹스의 뒤로 도망쳤다.

“아, 나 힘들다고!”

“누군, 누군 안 힘들어? 이 화상아!”

“저건 툭 하면 나한테 화상이래!”

“…….”

녹스는 그 난장판 사이에 껴서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흠, 사람 사는 느낌도 들고 좋아 보이는군. 녹스는 잠시 자신이 여기 끼어 있어도 되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시체가 하나 누워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산 사람이 없으니 죽은 사람이라도 일단 중재해야지. 녹스가 입을 열었다.

“일단은.”

두 사람이 동시에 녹스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부터 돌보러 가십시오.”

“아, 참! 엄마 약 먹여야 할 시간인데, 감사해요! 넌 빨리 나가서 차 사 와!”

“아, 알았다고!”

에나의 오빠는 에나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기 전에 냉큼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냅다 뛰어나가려다 문득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그쪽 이름이 뭐예요?”

“녹스.”

“나는 프랭크예요!”

프랭크가 히죽 웃었다.

“빨리 차 사 오라고!”

“아!”

그는 에나의 성화에 못 이겨 허겁지겁 뛰어갔다. 에나는 씩씩거리다 녹스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었다.

“미안해요. 우리 오빠가 나잇값을 못 해서….”

“뭐, 괜찮습니다.”

내 오빠도 아니고.

“괜찮으시면, 식사하시고 가실래요? 오빠가 돌아와서 식사를 같이해야 할 것 같은데.”

“저는 괜찮습니다.”

“아이, 괜찮아요. 이번에 봉급도 받았고 간만에 손님이 왔으니 실력 발휘를 해 볼게요!”

에나가 눈을 반짝였다. 녹스는 그 반짝이는 눈을 부담스럽다는 듯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알겠습니다.”

에나가 그 말에 활짝 웃었다.

결론적으로 그 집에서 먹은 식사는 썩, 나쁘지 않았다. 여기서 썩 나쁘지 않았다는 말은 생각했던 것만큼 최악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감자를 넣은 수프와 싸구려인 게 분명한 고기. 고기에선 상당한 누린내가 났는데 그걸 가리겠답시고 후추를 잔뜩 뿌려 놔 제법 매웠다. 그래도 그럭저럭 씹어 삼킬 수는 있는 수준이었다.

프랭크가 사 온 차도 차라 하기엔 말린 풀에 가까웠지만 기본적으로 녹스는 호불호가 없었다. 이게 정말 차로 우려먹는 풀이 맞는지 아닌지 따위엔 별 관심이 없다는 말이었다.

녹스는 이른 오후까지 그 집에서 에나와 이야기하다 먼저 저택으로 돌아왔다. 에나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이틀간 휴가를 냈다는 말에 마차를 타고 먼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녹스는 마차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저택의 모습에 뭔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걸 느꼈다. 저 안에 지금 할리드가 없음에도.

“…하아.”

녹스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자신은 여기 있는 것이 옳았다. 그러니 이런 감정은 무시해도 되리라.

그렇게 녹스는 그 이후로 종종 에나와 외출을 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할리드의 허락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할리드는 의외로 녹스의 외출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허락해 주곤 했다. 녹스는 그런 그에게서 벗어나 있을 때. 편안함을 느꼈다.

옆에서 자신이 무얼 하는 노예인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어 주는 에나가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녹스는 조금씩 그 남매에게 익숙해져 갔다.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그리고 그 평화로운 날들이 깨질 일이 그렇게 찾아올 줄을, 녹스는 전혀 몰랐다.

* * *

그날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그래, 별다를 것 없이 에나와 외출을 한 날. 오늘은 에나가 시장으로 심부름을 하러 가야 하는 날이었다. 사 와야 할 것이 꽤 많아 짐꾼 겸으로 녹스가 따라가기로 했다. 할리드는 꽤 불만스러워했지만 입맞춤으로 입을 막았다.

에나와 있는 날이면 녹스는 숨통이 트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녹스에겐 에나가 아무것도 모르기에 도움이 되었다.

녹스의 옷 안이 만신창이라는 것도 그가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도,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웃어 주기에 그 자체가 그냥 위로가 되었다.

“이것 봐요! 사과, 저기 팔아요!”

에나가 녹스의 손을 잡고 끌었다. 녹스는 순순히 에나에게 끌려가 사과 여덟 개의 값을 치렀다. 녹스는 사과가 잔뜩 든 종이 봉투를 들고 에나의 뒤를 따랐다.

주방에선 에나에게 각종 과일을 사 오라고 시켰는지 그 뒤 포도에 이어 수많은 과일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녹스의 팔은 그만큼 무거워져 갔다.

“정말 괜찮아요? 많이 무겁지 않아요?”

“딱히.”

녹스는 두 팔 가득히 과일 봉투들을 들고 바지런히 에나를 쫓아다녔다. 에나도 두 손 가득 재료를 사고 나서야 참새같이 총총거리며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었다. 녹스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침 일찍 나왔는데 벌써 점심에 가까워져 있었다. 아마 에나가 이것저것 품질을 따져 보느라 그런 모양이었다. 하여튼, 일에는 정말 열심히라 잘릴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요!”

“그래.”

녹스는 그렇게 에나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려 했다. 시장 골목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녹스 형…?”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녹스는 그 목소리에 잠시 손에 있던 것을 떨굴 뻔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검은 머리를 한 소년이 있었다. 녹스와 조금 닮은 얼굴. 꾀죄죄한 몰골에 잔뜩 더럽혀진 뺨.

“네가….”

외가의 친척이었던 소년이 거지꼴을 한 채 그 골목에 서 있었다. 녹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네가, 네가 왜 여기….”

“형, 형! 사, 살아 있었구나…!”

녹스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소년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아이는 금세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녹스는 손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녹스는 반역 죄인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여기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소리였다.

반역죄, 그것은 일가를 참형에 처하는 죄목이었다. 여기서 일가란 같은 피를 공유하고 있는 친척들을 모두 포함했다. 즉, 지금 녹스의 눈앞에 있는 저 아이도, 사실은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아이였다.

“형….”

아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다 죽었는데, 형은 살아 있었어.”

소년의 눈물은 끊임없이 흘렀다. 마치 자신을 탓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녹스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 아이가 살아 있다. 나라는 죄에 희생된 아이가 살아 있었다.

“형은 왜 살아 있는 거야?”

“나는….”

녹스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소년의 얼굴은 더욱더 일그러졌고 아이는 곧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

녹스는 그 앞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옆에 선 에나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녹스는, 목이 졸려 오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녹스는 잠시 길모퉁이에 짐을 내려놓고 에나에게 기다려 달라 부탁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하길 바라요!”

에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잠시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미안하다.”

아이는 원망하듯 울음을 쏟아 내기에 급급했다. 저 아이가 지금 얼마나 괴로울지, 제가 얼마나 원망스러울지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노예 신세로 전락한 자신조차 아이의 심정을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아이다. 그런 아이가 아버지의 죄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다.

“…미안해.”

소년의 통곡이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소년은 붉어진 눈을 한 채 색색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녹스는 소년과 마주했다. 소년의 얼굴에는 땟국물이 가득했다. 집안이 몰살당하고 나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얼굴이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목이 메었다. 그는 차마 소년에게 무어라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겨우 말을 뱉어 냈다.

“어떻게, 살아남았지?”

“…내 하인이 나인 척했어. 부모님이 꾸몄고…….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