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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70화 (70/158)

제70화

소년의 목소리에는 진한 원망이 묻어 있었다. 녹스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턱 막혔다. 그럼에도 차근차근히 생각해 나갔다.

그의 사촌, 제메일은 지금 여기 있어서는 안 되었다. 반역죄란 그런 것이니까.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밝혀지면 곧장 붙잡혀 사형당할 것이 뻔했다.

수도 안에서 혹여 그의 얼굴을 아는 자가 제보를 한다면 말이다. 확률은 낮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수도는 제메일에게 너무나 위험했다.

“넌 지금 수도에 있으면 안 돼.”

“하, 하지만 나갈 수가 없어….”

제메일도 녹스와 같은 생각인 듯했지만 말 그대로 수도를 빠져나가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일단 신분 패가 없는 사람들은 성문에서 통과시켜 주질 않았다. 그리고 겨우 살아남은 제메일에게 신분 패가 있을 리 없었다. 녹스는 생각했다.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형….”

녹스가 생각에 빠져 있을 적에 제메일이 물어왔다.

“형은 어떻게 지내는 거야? 그 시종 옷은 또 뭐고….”

“제메일.”

녹스는 제 셔츠에 붙은 볼로 타이를 꾹 쥐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것을 발견한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

“노예? 노예로 전락했단 말이야? 형, 대체….”

“쉿, 제메일. 이건….”

“우리 부모님도…. 차라리 노예로라도 살아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그 말에 녹스는 목에 무엇이 턱 하니 막히는 감각을 느꼈다. 제메일의 눈에서 다시 한번 눈물이 흘러나왔다. 녹스는 이 아이의 앞에서 자신이 대체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 아비와 어리석은 자신의 죄로 온 가족을 잃어버린 소년 앞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도와줄게.”

“고작 노예인 형이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야.”

“방법이, 없지는 않아.”

녹스는 머리를 굴렸다. 성벽을 통과하려면 신분 패가 있어야 했다. 방법이 딱 하나 떠올랐다.

“할리드가 신분 보증만 해 준다면….”

멍청이처럼 그에게 부탁하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귀족의 하인들은 가문에서 발급되는 전용 신분 패를 들고 다녔다. 특히 주인을 가까이서 모시는 하인이라면 더더욱.

물론 녹스에게 그 전용 신분 패 따윈 없었지만, 자신이 달라고 하면…. 아니, 애매했다. 갑작스럽게 신분 패를 달라고 한다면 그가 의심해 올 게 분명했다. 녹스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할리드를 속여 넘길 수 있을까?’

귀족의 하인을 뜻하는 전용 신분 패는 심부름꾼이나 고용한 용병, 사냥꾼들을 성문 밖으로 나가게 하거나 들이는 데 유용했다. 특히나 할리드처럼 고위 귀족인 경우, 자세한 검문은 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녹스는 아직도 눈물을 줄줄 흘리는 소년을 한 번 바라보았다. 소년은 이제 겨우 열다섯이었다. 녹스가 그를 가만히 보고 있자 소년은 눈물을 닦으며 작게 속삭였다.

“도와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이의 목소리는 많이 지쳐 있었다. 녹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맞았다. 어리석은 아버지와 자신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피붙이를 이 수도에서 탈출시켜야 했다.

“제메일, 잘 들어.”

“어? 어어….”

녹스는 자신의 옷에 붙어 있는 은단추 몇 개를 뜯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걸 팔아서 여기서 제일 가까운 숙소에 방을 잡아. 그리고 거기 박혀 있어. 그러면 내가 찾아갈게.”

“혀, 형이? 어, 어떻게 하려고!”

“어떻게든.”

이제 겨우 하나 남은 피붙이를 불안에 떨게 하며 더러운 골목을 전전하게 둘 수는 없었다. 차라리 수도 밖으로 나가 자유롭게 일을 구하거나 홀로 살아남게 만들어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물론 모든 걸 혼자 하는 건 너무나 고되고 힘든 일이겠지만 그것이 죽는 것보단 낫다고 녹스는 생각했다.

“내보내 줄게.”

녹스의 눈에 언뜻 녹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책임감, 그것이 그의 속에 스며들었다. 녹스가 그리 말하자 제메일은 벌게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곧 그가 쥐여 준 은단추를 들고 사라졌다.

녹스는 그 뒷모습이 저 뒤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 이내 단추가 뜯어진 소매를 바라보았다. 일단, 이것에 대한 핑계를 만들어야지. 녹스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주먹을 쥐고 아무렇지도 않게 제 얼굴을 한 번 후려갈겼다.

빡!

커다란 소리와 함께 한쪽 뺨이 얼얼해졌다. 아, 너무 세게 쳤다. 입 안쪽이 찢어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녹스는 손가락으로 뺨을 문지르며 골목 밖으로 나가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골목 밖으로 나가자 에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에나는 곧 머리가 헝클어지고 뺨에 붉은 자국을 달고 온 녹스를 보고 깜짝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죠.”

“그, 아까 걔가 때린 거예요? 그런 거예요?”

“아닙니다.”

“아니긴! 그런 쪼끄만 애한테 맞긴 왜 맞아요!”

에나가 조잘거리며 쫓아왔다. 눈썹이 쭉 내려간 것이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닌가 보다. 녹스는 에나에게 부탁했다.

“안에서 질이 안 좋은 강도와 마주쳤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물으시면 그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러자 에나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더니 곧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아~. 어린애한테 맞은 게 창피해서 그렇죠? 녹스는 키가 큰데 힘은 영 못 쓰나 봐요. 제가 그렇게 말해 줄게요!”

“……고맙습니다.”

녹스는 그렇게 말 한 채 일단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에나를 도와 주방으로 짐을 옮겨 준 뒤 할리드의 부름에 따라 곧장 그의 방으로 올라갔다.

할리드가 녹스의 상태를 보고 단박에 열이 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할리드는 문이 열리고 녹스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눈을 크게 뜨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턱을 쥐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이게 뭐지?”

“아, 별것 아닙니다.”

“별거 아니기는.”

할리드는 단박에 목 안으로 으르렁거렸다. 녹스는 그가 이렇게 반응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것에 흠집이 나는 게 싫은 건지 맨 처음 자신이 잡혀 왔을 때도 과민하게 반응했으니까.

“골목에서 왈패들을 좀 만났습니다. 걸리적거리기에 치웠고요.”

“네 상대는 아니었을 텐데.”

“보호할 사람이 있어서 잠시 방심했습니다.”

“……네게 덤비던가? 이걸 보고도?”

할리드가 미간을 찡그린 채 녹스의 목에 걸려 있는 볼로 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런 치들이 이것의 뜻을 어찌 알겠습니다.”

“…그도 그렇군.”

당장 할리드만 해도 용병일 적 이 볼로 타이가 무슨 뜻인지 몰랐을 테니까. 그 탓인지 그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호위 기사라도 붙여 줄까.”

“과분합니다. 불편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잘라 말한 녹스는 슬며시 운을 띄웠다.

“가문용 신분 패가 하나 있다면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신분 패?”

녹스는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올려 할리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 치들은 고위 귀족들의 사용인들은 건드리지 않으려 하니까요.”

녹스는 최대한 이 일의 해결점을 찾은 것처럼 말했다.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이라는 듯. 할리드는 감이 좋다. 자신이 그것을 간절히 바란다는 듯 굴면 아마 곧바로 의심을 사겠지.

할리드는 미간을 구긴 채 녹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녹스는 입을 다물고 담담히 그의 눈빛을 받아 냈다. 그렇게 몇 초간의 침묵 끝에 할리드가 입을 열었다.

“노예에게 신분 패라. 뭘 어떻게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군.”

“단순히 하인들이 들고 다닐 수 있는 패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래?”

할리드는 무언가를 재듯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제 팔을 툭툭 두드렸다. 그 짧은 시간이 녹스에겐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녹스는 등으로 흐르는 식은땀을 모르는 척하려 애썼다. 그리고 결국.

“마를렌에게 말해 둘 테니 받아 가.”

“감사합니다.”

녹스는 할리드가 더 깊은 생각을 하기 전에 간단히 대꾸했다.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요구한 적 없던 자신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신분 패를 요청한 이 상황에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녹스는 천천히 다가가 할리드의 입술에 가볍게 제 입술을 맞췄다. 할리드는 영문을 몰랐으나, 입술이 닿자마자 녹스의 머리를 쥐어 당겼다.

입술을 벌리면 혀가 침범한다. 아프도록 혀뿌리를 빨아당기고 이내 씹듯 이를 세우며 사나운 키스를 이어 나간다. 녹스는 입을 한껏 벌려 할리드의 입술을 물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의 입맞춤에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저를 몰아붙이듯, 숨 한 톨 허락받지 않으면 쉬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거칠게 들이닥치는 입맞춤은 아마 결코 익숙해질 수 없을 것이다.

“하아….”

할리드는 녹스가 헐떡거릴 때쯤 겨우 그를 놓아주었다. 할리드의 얼굴은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녹스는 그 모습을 보며 아마 신분 패에 대한 일 대부분은 그의 머릿속에서 날아갔으리라 생각했다.

“그럼, 대기할까요?”

“아니, 도서관에 있으면 내가 데리러 가지.”

“알겠습니다.”

녹스는 그대로 할리드의 집무실에서 나와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마를렌이 찾아와 비아 가문의 신분 패를 전달해 주었다. 녹스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이런 것 따윈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이제 첫 준비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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