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오늘, 할리드가 황궁으로 간다.’
할리드는 점심이 되기 전에 황궁으로 향할 것이다. 그럼 자신은 바깥으로 나가 제메일을 성문 밖으로 내보내고 무사히 저택으로 돌아오면 된다.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로 설명하자면 그보다 쉬운 일은 없었다.
녹스는 조금 더 누워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할리드에게 물었다.
“오늘은 혼자 외출을, 해도 되겠습니까?”
“오늘은 왜.”
할리드가 옷시중을 받으며 물었다. 녹스는 눈치를 보듯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답답해서.”
그 말에 할리드가 잠시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그저 유순하게 눈썹을 내리깔고 바닥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퍽 가련해 보이기라도 한 걸까. 할리드가 쉽게 허락의 말을 뱉었다.
“일단 알았다. 일찍 돌아오도록 해.”
녹스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지금까진 형식상으로 에나가 옆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에 에나를 끌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할리드가 홀로 외출하는 것을 쉽게 수락했다. 녹스는 머리를 다른 쪽으로 굴렸다. 역시, 미행을 붙여 둔 것 같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노예를 홀로 밖으로 내보낼 리가 없었다. 녹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예.”
할리드는 단장을 마치고 곧장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녹스는 할리드를 배웅했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는 핑계였다.
할리드는 마차에 오르기 전 녹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녹스가 의아해 그와 눈을 맞추니 할리드가 평소와 다르게 인사를 해 왔다.
“다녀오지.”
“아…. 다녀오십시오.”
녹스가 마주 인사해 주자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녹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마차에 올라탔다. 녹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가 보다. 하고. 그렇게 할리드가 떠나고 녹스도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평소와 같이 옷을 입고 마를렌에게 외출을 알렸다. 마를렌은 이미 할리드에게 들은 것이 있는지 쉽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녹스는 하인용 마차를 타고 거리로 향했다. 그리고 중간쯤 내려 마부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한 뒤 빠르게 제메일이 있는 숙소로 향했다.
“형!”
“지금 잡담할 시간 없어.”
녹스는 제메일을 데리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아이를 보내고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제메일이 조금 허덕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녹스는 멈추지 않고 거리로 나서 성문 쪽으로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제메일은 기특하게도 싫은 소리 하나 없이 그를 잘 따라왔다.
자신이 홀로 밖으로 나와 미행인은 평소보다 곤두서 있을 터. 아마도 낯선 사람을 만난 순간부터 자신을 수상하게 여길지 몰랐다. 녹스는 모든 것이 할리드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끝내야 했다.
“헉, 헉 형…. 너무 힘들어.”
“안 돼. 뛰어.”
“으응, 아, 알았어…!”
녹스와 제메일은 쉬지 않고 뛰어 성문 앞에 도달했다. 성문 앞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그중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검문을 받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녹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걸 다 기다릴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녹스는 일단 줄의 가장 맨 끝에 섰다. 그리고 제메일에게 속삭이듯 설명했다.
“제메일, 잘 들어.”
“응.”
“넌 이제부터 귀족가에서 내보내는 심부름꾼인 거야. 원래는 직업 없이 돌아다니는 부랑자고 오늘은 양초 장인에게서 양초를 사러 나가는 거고.”
“어, 응. 알겠어.”
“이름은 맥스. 나이는 열여섯인 걸로 하자. 신분 패는 수도로 들어와 잃어버린 거고.”
“어, 어어. 응.”
“어떤 질문에도 당황하지 말고 대답해. 내가 대충 맞출 테니까.”
“아, 알았어.”
그렇게 대화하는 사이 줄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녹스와 제메일 뒤로도 줄이 길게 늘어섰다. 그들은 저들끼리 대화하고 떠들며 시간을 죽였는데 녹스는 초조한 마음에 어떤 말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사이 제메일이 조용히 말했다.
“형….”
“왜.”
“이렇게 된 거 그냥, 같이 가면 안 돼?”
“…뭐?”
녹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제메일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형도 좋은 취급은 못 받고 있을 거 아냐. 그냥, 이참에 나랑 같이 도망가자.”
“……제메일.”
“응? 형.”
“나는, 나는 안 돼.”
“왜?”
“나는, 나는 갈 수가….”
나갈 수 없나? 아니다. 당장 제일 중요한 신분 패가 생겼으니 성 밖으로 나가려면 충분히 나갈 수 있었다. 녹스가 이 방법을 택한 이유는 제메일의 얼굴을 최대한 적게 노출하기 위해서였다. 혹여나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니까. 그런데, 여기서 자신이 같이 나간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선택지였다. 여기서 도망가면, 그러면 잡히지 않을 수 있나?
“…아냐.”
거기까지 생각한 녹스는 고개를 저었다. 할리드가, 쫓아오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무사히 도망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지금쯤이면 미행하던 자가 이미 보고하기 위해 황궁으로 달려갔을 거다. 최대한 빠르게 제메일만 내보내고 자신은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녹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메일, 날 쫓아올 사람이 있어. 그래서 나랑 함께 가면 네가 더 위험해.”
“쫓아온다고? 누가?”
“쉿.”
그리고 그때쯤, 생각보다 줄이 빨리 줄어들어 녹스와 제메일의 차례가 되었다. 녹스는 보이지 않게 노예의 증표를 풀어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성문 경비원의 커다란 목소리에 녹스는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제메일은 더러운 얼굴 위로 로브를 더욱 푹 눌러썼다. 녹스는 신분 패를 꺼내 들며 넉살 좋게 인사했다.
“고생 많으십니다.”
“거, 고생 많기는, 어디 보자. 오,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람이구먼.”
“예, 그런데 나갈 건 제가 아니라 이쪽….”
“웬 거지를?”
녹스는 천연덕스럽게 연기하기 시작했다.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입술을 삐딱하게 그려 불성실한 하인의 표본처럼 행동했다.
“아니 글쎄, 주인님께서 수도 안에선 마음에 드는 양초가 없다며 수도 밖 양초 장인에게서 양초를 사 오라고 하시지 뭡니까.”
성문 경비병은 녹스의 건들건들한 태도에 알 만하다는 얼굴로 껄껄 웃었다.
“귀족 양반들이 원래 까다롭잖아.”
“그런데 아시잖습니까. 거기까지 갔다 오려면 품도 많이 들고 고생이고….”
“뭐, 자네 같은 사람들이야 많지. 거지한테 몇 푼 쥐여 주고 심부름을 시키겠다는 거지?”
“그게 싸게 먹히는 거 아시잖습니까.”
“알기야 알지~. 거 그래도 좀 곤란한데. 거지는 신분 패도 없을 거 아니야.”
녹스는 웃는 낯으로 건량과 로브를 사고 남은 돈을 꺼내 그의 손에 조용히 쥐여 주었다. 그러자 경비병이 큼큼, 헛기침하며 주머니에 돈을 집어넣었다.
참고로 돈은 에나에게 빌린 것인데 언젠가는 갚을 생각이지만 언제 갚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에나에게는 꽤 중요한 돈일 텐데 흔쾌히 빌려준 게 고마웠다.
“뭐, 어쩔 수 없지. 농땡이도 적당히 피우게. 인물도 훤하게 생겨서 주인마님에게 예쁨 좀 받을 것 같이 생겼는데.”
“안타깝게도 저희 가문엔 아직 주인마님이 안 계셔서 말입니다.”
“에이, 좋다 말았겠어.”
“하하, 그렇지요.”
“그래, 그래서 이쪽이 그 거지요?”
“예, 그렇습니다.”
녹스가 제메일을 슬쩍 바라보았다. 제메일은 딱 보아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게 보였다. 녹스가 제메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경비대에게 소곤거렸다.
“어려서 그런가 심부름 값도 적게 받아먹더라고요.”
“이 사람 횡재했군, 그래.”
녹스는 그저 웃으며 제메일을 바라보았다.
“그래, 뭐….”
성문 경비병이 곧장 제메일의 로브로 손을 가져갔다. 그것을 예상하지 못한 녹스의 눈이 일순 굳었다. 녹스는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스윽-
로브를 조금 걷고 제메일의 더러운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경비병은.
“새파랗게 어린놈이군.”
혀를 쯧쯧 차며 로브를 손에서 놓았다. 녹스는 가볍게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놓았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혀를 차던 경비병이 건성으로 제메일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매, 맥스입니다.”
“나이는.”
“열, 여섯….”
“그 나이면 일도 할 수 있을 텐데. 쯧쯧. 부모는 어디 갔어?”
그 말에 제메일의 말이 턱 하니 막혔다. 아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경비병은 그 꼴을 보고 대충 알 것 같다며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통과. 불쌍한 놈 같은데 적당히 벗겨 먹어 이 사람아.”
“…그러겠습니다.”
제메일이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고 그건 녹스도 마찬가지였다. 녹스는 제메일에게 속삭였다.
“뒤돌아보지 말고 쭉 걸어. 성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대답하지 말고.”
“…….”
제메일은 그대로 경비병을 지나쳐 성문을 나섰다. 제메일의 걸음은 조금 느렸지만 녹스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렇게 한 발, 두 발. 제메일이 완전히 성문을 벗어났다. 녹스는 어린 그의 뒷모습이 천천히 사라지는 걸 보았다. 그제야 녹스는 안도감이 들었다. 저 아이를 무사히 내보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
하지만 그 안도감을 느끼기도 잠시. 그는 시간이 몇 시인지를 확인했다.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면….”
자신을 미행하는 자에게 어떻게 보고받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지금쯤이면 황궁 안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할리드가 오늘 황궁에 들어가 보고가 조금 지연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녹스는 곧장 성문의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걸었다.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아무 문제도….’
그런데 그때, 녹스의 머릿속을 스치는 게 하나 있었다.
‘마정석으로 만들어진 통신구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는 잘 쓸 것 같아서 말이야.’
황제가 할리드에게 선물했던 그것. 녹스는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만약 미행하는 자에게 그것을 주었다면….
‘아니야. 설마.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