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대답은 없었지만 황제는 그 질문의 답이 긍정인 것을 알았다.
“그런 부탁이야 얼마든지….”
“다만.”
할리드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제가 없는 사이 함부로 손대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허어?”
황제가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제법 사납게 웃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지?”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본디 제 것이니까요. 그 말에 황제가 웃음소리를 흘렸다. 퍽 유쾌해 보이진 않았으나 할리드는 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자 황제가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황제는 녹스에게 작은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 그 어린 날에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주었던 그날은 아직도 종종 생각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간만에 그것이 내 손안에 들어온다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황제는 어떻게 해야 녹스가 여기서 더 괴로워질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내 손으로 직접 괴롭힐 필요는 없지.’
할리드, 자신의 친우가 언제든지 그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혀 줄 테니까. 황제는 자신의 시종을 불렀다. 그리고 가볍게 명령했다.
“내 드레스 룸에 있는 라이네리오 가문의 반지를 가져와.”
그 의문스러운 말에도 황제의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밖으로 나갔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펠티온은 그마저도 유쾌해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할리드가 감히 황제에게 설명해 보라는 듯 그를 노려보고 있음에도 황제는 그것을 문제삼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제게 말 안 듣는 동생 같은 녀석이니.
“그냥, 오래전에 받아 뒀던 게 지금 생각났을 뿐이야.”
“오래전에, 받아 놓았다고요?”
“그래, 그럴 일이 좀 있었어.”
“…….”
“물어도 답해 주지 않을 거야.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니까.”
황제는 할리드를 향해 싱긋 웃었고 할리드는 있는 대로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펠티온이 입을 열지 않겠다 선언했으니 더 캐물어도 나올 게 없을 거라는 것 정도는 잘 알았다.
그렇게 곧 시종이 소중하게 반지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펠티온이 할리드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뭐, 노예의 것은 곧 자네의 것이니 어떻게 해도 상관없네.”
“……그렇습니까?”
“그렇지, 이제 그는 네 것이니까.”
황제는 꽤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할리드를 더욱 자극했다. 할리드는 자신의 손에 맞지 않는 그 반지를 꽉 쥐었다가 곧 주머니에 넣었다. 당장 버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할리드.”
펠티온은 그를 자극할 마지막 말을 툭 뱉어 냈다.
“만약 녹스 쪽에서 날 먼저 원하면?”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어떻게 단정 짓지?”
황제의 시선이 잠시 할리드의 주머니 쪽으로 가볍게 내려갔다 올라왔다. 할리드는 그 시선에 잠시 주먹을 꽉 쥐었다.
“뭐,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할리드가 얼굴을 굳힌 채로 있자 펠티온이 웃는 낯 그대로 다리를 꼬았다.
“그럴 때엔 나도 어쩔 수 없지 않겠나.”
할리드는 여전히 답이 없었고 황제는 웃는 얼굴로 말을 마저 이었다.
“그쪽에서 먼저 유혹해 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할리드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가 그 뒷모습에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어떻게 해야 그 녹스가 내게 스스로 다리를 벌리려 할까. 황제로서는 즐거운 고민거리가 하나 생긴 것에 불과했다.
황제의 응접실을 나온 할리드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주머니 속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미 망하고 없는 라이네리오 가문의 반지. 그것이 왜 황제의 손에 있을까.
멍청한 할리드라도 알았다. 반지를 준다는 것이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할리드는 반지를 부서져라 쥐었다. 왜, 지금에서야…? 여태껏 자신에게 녹스에 대해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만약 녹스 쪽에서 날 먼저 원하면?’
둘 사이에 정말 무엇이 있었나? 아니면 그저 장난기 많은 황제의 장난일 뿐인가. 아니다, 그저 장난이라면 이렇게 반지라는 증거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할리드는 서둘러 걸어 황궁을 빠져나갔다.
‘녹스에게 확인을 해 봐야….’
그런 생각을 하다 할리드는 문득 멈추어 섰다. 만약 녹스에게 물었다가 과거에 그와 무언가 있었다고 답한다면 자신은 뭐라 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지나간 일일 뿐이다. 하지만 거슬리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반지를 쥔 할리드의 주먹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맞아. 이젠 지나간 일일 뿐이야. 전부 지나간….’
할리드는 그렇게 황궁을 빠져나갔다. 황제는 응접실 창문으로 궁을 빠져나가는 할리드의 마차를 보며 가볍게 미소 짓곤 커튼을 쳤다.
“자,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보자고.”
저택으로 돌아간 할리드는 녹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침대 위의 그를 누르고 조금 더 거칠게 굴었을 뿐이지.
“아흑…! 아, 아악…!”
녹스는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할리드를 받아 냈다. 할리드는 다리를 활짝 벌리고 저를 받아 내는 녹스의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도 제가 벗어 던진 옷 안의 반지가 거슬려 죽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손을 뻗어 녹스의 목을 쥐었다. 녹스의 숨이 턱 하니 막혔다. 그는 두 손으로 그 목을 눌러 잡고 으르렁거렸다.
“……네 의지 따윈 필요 없어. 너는 올곧이 내 것이어야만 해.”
녹스는 꺽꺽대며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바들바들 떨어 댈 뿐이었다. 구멍은 쑤셔 박힌 좆을 빠듯하게 조여 댔다. 할리드는 그곳에다 세게 허리 짓을 해 대며 녹스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끅….”
그리하여 녹스의 눈이 뒤집어지고 그가 경련할 때쯤에야 할리드는 안에 파정을 맞았다. 녹스의 목엔 아마도 자신이 틀어쥔 모양대로 자국이 남겠지. 할리드는 이 상황에서 그것이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그 자국이 오래도록 남기를 그는 기대했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할리드가 옷시중을 받으며 말했다.
“오늘은 황궁으로 간다.”
녹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 방에서 얼마를 지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방 밖으로 자신을 내보내 준다는 말에 고개를 기울였을 뿐이다.
벌써, 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가 저를 누르고 짓씹듯 내뱉은 말들을 들어 보면 영원히 이곳에서 꺼내 주지 않을 생각인 듯 보였는데.
“황궁에서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녹스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자신은 도망갈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있나. 솔직히 말해서 이제 모두가 자신에게 도망갈 생각을 왜 하냐는 말을 하다 보니 이젠 정말 자신이 도망치려 했다고 녹스는 반쯤 믿게 되었다.
녹스는 목이 다 쉬어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 사이로 할리드가 싸질러 놓은 정이 주르륵 흘렀다.
“…….”
녹스는 비틀비틀 걸어 욕실로 향했다. 준비되어 있는 데워 놓은 물 안으로 들어가면 온몸이 따끔거렸다. 물리지 않은 곳이 없어 피딱지가 앉지 않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녹스는 천천히 물 안으로 잠겨 들어갔다. 유일하게 홀로 잠겨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목욕 시간밖에 없었다. 할리드가 없는 때에도 할리드의 방에선 그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났다. 오로지 그만 떠올리며 있어야 하는 곳과 다르게 욕실의 물속은 숨조차 쉴 수 없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짧은 목욕 시간이 끝나면 현실이 찾아왔다. 녹스는 할리드의 출전으로 인해 자신이 기르는 동물처럼 황실에 맡겨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펠티온의 손에. 그것은 도망치려 했던 녹스의 탓일 수도 있었다. 할리드는 녹스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도망치려 들지 않았다면 넌 내가 없는 몇 주를 보냈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네가 날려 먹은 일이야.”
그렇구나. 내가 괴로운 건 내가 자초한 일이구나. 녹스는 그렇게 이해했다. 초반에는 몇 번이고 도망치려 한 적 없다고 말한 것도 같지만 전부 거짓말로 치부되었다.
녹스는 천천히 모든 걸 받아들였다.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지. 만약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 했는지 말해야 한다면 제메일에 관한 것도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순 없으니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는 말뿐이었다.
무언가를 숨기면서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주장해 봤자 할리드가 믿어 줄 리가 없었다. 거의 며칠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시달리니 나오는 말이라곤 그저 ‘잘못했습니다.’ 밖에 없었다. 그냥, 자신이 전부 잘못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녹스의 잘못이 되었다.
“가서…. 저는 뭘 하면 됩니까.”
녹스의 목소리가 전부 갈라졌다.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울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녹스의 목엔 아직도 새파랗게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할리드는 그런 녹스의 목을 쳐다보다가 이내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글쎄.”
그는 녹스를 펠티온에게 맡긴다는 사실이 꽤 탐탁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녹스가 도망치려 했기에 절대 도망칠 수 없는 곳에 그를 가두어 두고자 했다.
“확실한 건 하나야.”
할리드는 녹스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거기서도 네 주인이 나란 걸 잊지 않는 것.”
“…….”
“폐하께서 널 꽤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어.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그의 손에 널 맡긴 것도 내 판단이었고. 하지만 녹스.”
“…예.”
“네 주인은 나야. 그걸 잊지 마.”
“알겠, 습니다.”
녹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아주 오래간만에 주어지는 옷을 입고 볼로 타이를 착용했다. 그는 한층 말라 있었으며 며칠간 햇볕을 보지 못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할리드는 그런 그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숨죽이고 지내. 거슬리지 말고.”
“…네.”
펠티온이 제 몸에 손만 대지 않으면 죽은 듯 지낼 자신 있었다. 녹스는 가만히 생각했다. 할리드와 펠티온 사이에 모종의 대화가 있었나. 녹스는 가만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노예는 주인의 처분을 기다릴 뿐 그 윗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에 낄 수 없었다. 그것처럼 녹스가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는 그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