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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80화 (80/158)

제80화

그렇게 녹스는 할리드와 함께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의 정문을 지나쳐 황제가 기거하는 궁으로 가니 황제가 먼저 마중을 나와 있더라. 펠티온은 꽤 즐거운 얼굴이었다.

할리드가 먼저 내려 예를 차렸고 녹스 또한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려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팔짱을 끼고 장난감을 가지게 된 아이 같은 얼굴로 웃었다.

“뭐, 마음껏 가지고 놀 수는 없겠지만 이리 내 손 안에 들어오니 제법 즐겁기는 하군.”

“잠시일 뿐입니다.”

“알아, 알아. 그러니 날 세우지 마.”

펠티온은 녹스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그리고 웃으며 미간을 설핏 찡그렸다.

“아예 굶긴 건 아닐 테고.”

“안 굶겼습니다.”

“허리가 더 가늘어졌는데?”

황제는 쯧쯧 혀를 차며 녹스의 허리를 더듬었다. 녹스는 잠시 할리드의 눈치를 살핀 후 그 손을 얌전하게 떼어 내었다. 황제가 웃기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나보다 할리드가 무서운 모양이지?”

“원래 남의 물건에 허락 없이 손을 대는 건 예의 없는 행동입니다.”

“이제 날 가르치려 들기까지 하고?”

펠티온은 그렇게 말했지만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녹스의 허리를 아쉽게 쳐다보다가 이내 자신의 시종에게 턱짓을 한 번 했다.

“선물을 하나 주지.”

시종이 들고 온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엔 마정석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한 쌍의 팬던트가 들어 있었다. 이미 일전에 이런 것을 한 번 받아 본 적 있는 할리드가 왜 또 같은 것을 주냐는 듯 펠티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펠티온은 하나는 할리드에게 그리고.

“하나는 네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녹스의 목에 걸었다.

“저번에 준 건 음성 통신만 가능하지만 이건 모습까지도 보여 줄 수 있는 물건이지. 위치도 알 수 있고. 거기서 외롭거든 이걸 들여다봐. 녹스가 보일 거야.”

“……감사드립니다.”

“녹스가 도망갈까 걱정하다 일을 그르치면 안 되니 주는 거야.”

황제가 빙글빙글 웃었다. 녹스는 자신의 목에 걸린 푸른 마정석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손을 내렸다. 이젠 사생활 보호도 안 되는 건가. 뭐, 노예에게 무슨 사생활이 있겠냐마는. 할리드가 마정석에 마력을 불어넣자 지금 할리드를 보고 있는 녹스의 얼굴이 비쳤다.

할리드는 꽤 만족했는지 느른한 숨을 내쉬고 그것을 품 안에 넣었다.

할리드는 잠시 녹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떠나갈 시간이었다. 할리드는 마차에 올라타기 전 녹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녹스가 그를 올려다보자 곧 뺨에 무언가 닿았다. 쪽 소리도 없이 가볍게 볼에 닿았다 떨어진 입맞춤은 그 흔적을 찾기도 힘들었다.

녹스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럴 땐 돌려주는 게 좋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녹스는 머뭇거림 없이 할리드의 뺨에 입 맞추려 했다.

그러자 할리드가 녹스의 머리를 붙잡고 깊게 입을 맞췄다.

혀가 섞이지는 않았으나 그 무엇보다도 깊게. 숨이 막힐 정도로. 황제의 눈썹이 느리게 꿈틀거렸다. 할리드는 녹스에게 입 맞추며 황제에게 약속을 지키라는 듯 눈을 맞췄다.

펠티온은 기분이 상한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슬슬 가 봐야지.”

“다녀오지요.”

할리드가 드디어 녹스를 놓아줬고 녹스는 숨을 몰아 내뱉었다. 황제가 녹스의 허리를 감아 당겨 제 쪽으로 붙였다.

“내가 잘 돌보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약속은 지키리라 믿습니다.”

“내가 했던 말도 잊지 않으리라 믿네.”

펠티온과 할리드는 길게 눈을 맞췄다. 녹스는 그 사이에 끼어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권력자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피곤한 일이었다.

녹스가 느리게 한숨을 내쉬자 할리드가 그를 한 번 바라보고 이내 등을 돌렸다. 그렇게 할리드는 출전을 위해 황궁을 나섰고 녹스는 펠티온과 남아 그를 배웅했다.

그가 탄 마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펠티온이 느긋하게 말했다.

“방으로 안내해 주지.”

황제가 직접 해 주는 방 안내라니 노예가 받기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럽다.

“…알겠습니다.”

펠티온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녹스가 천천히 따랐다. 황제의 시종들이 그의 양옆으로 섰다. 마치 감시라도 하는 것 같았다. 녹스는 가라앉은 눈동자를 하고도 자세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황제의 시종들보다도 더 완벽한 자세에 마치 모셔지는 어느 귀족 같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저 노예일 뿐이었다.

“여기일세.”

“여긴….”

녹스가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황제가 안내한 방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이었다. 훌륭한 손님방 같기도 했다. 문제는 이 방이 황제의 방 옆에 딸려 있다는 것이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하인이 쓰는 방이지. 지금은 휴가를 보냈으니 자네가 그걸 대신해 줘야겠어.”

“…시키신다면 하겠습니다만.”

하인들이 하는 일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할리드는 필요로 하지 않기도 했고 녹스도 자신에게 시키지 않은 일을 부러 찾아 하는 노예는 아니었다. 녹스가 눈만 깜빡이고 있자 황제가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

“해 본 적 없나?”

“…예.”

“저런, 정말 밤 시중만 든 모양이야.”

그 말에 녹스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는 의미도 있었고 그게 맞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몸짓이었다. 황제는 웃으며 제 턱을 매만졌다.

“이걸 어쩌나.”

“제가 부족하게 시중을 드는 것보다 다른 하인을 부르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럴 순 없지. 그대는 내 밤 시중도 들어야 하니.”

그 말에 녹스가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대화가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곧바로 그걸 어길 셈인가. 정말 단순히 의문이 깃든 얼굴에 황제가 웃음을 흘리며 그의 뺨을 매만졌다.

“왜, 탐탁지 않아?”

“제 주인은 할리드 비아 공작님이십니다.”

“스스로 원하면 괜찮다는 허락을 받았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재미없기는.”

황제는 녹스의 뺨을 조금 더 쓰다듬다 손을 떼어 냈다.

“그래도 내 시중은 한동안 네가 맡는 걸로 하지. 밤 시중은 말 그대로 밤에 시중을 드는 것을 뜻해.”

“아.”

녹스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그가 이해한 듯 보이자 곧장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녹스가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황제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한동안은 낮에 내 곁에 붙어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네 주인은 네가 도망갈까 꽤 날을 세우고 있거든.”

녹스는 이젠 포기하고 자신이 도망치려 했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붙어 있겠습니다.”

“뭐, 난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뭐?

그 말에 녹스가 아래로 깔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황제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앞으로 걸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꽤 나중에 안 거지만 말이야. 머리를 좀 썼더군.”

“…….”

녹스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먼저 지레짐작해 말을 꺼냈다가 되레 제메일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그의 침묵을 무엇으로 받아들였는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그렇게 해 봤자 소용없다는 의미인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그대를 오해하는 동안 꽤 시간이 흘러서 말이야. 도망간 반역자의 핏줄을 찾기는 힘들지.”

“……폐하, 부디.”

“그래.”

황제는 지금 녹스의 앞에서 그 아이를 일부러 놓아주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그 아이를 찾지 못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무려 그는 황제였고 황제가 이루고자 하는 일 중 이루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일 중 하나가 도망간 반역자의 핏줄 하나를 찾아내는 일일 테다. 그것은 그가 명령하기만 하면 되는 손쉬운 일 중 하나였다.

“…제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뭐, 바라는 거야 많지만….”

펠티온이 그제야 녹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녹스에겐 절박한 것이 저 남자에게는 그저 한낱 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녹스는 그와 자신과의 격차를 느끼며 시선을 다시 바닥으로 깔았다. 지금 녹스에겐 자신이 도망가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아줬다는 사실보단 제메일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얼마 안 됐어. 사실 엊그제 알았지. 조금 이상했거든. 그래서 성문 경비병에게 알아보니 통과시킨 건 어린 부랑자 한 명이라….”

펠티온이 녹스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녹스는 선선히 그의 팔에 끌려가 그와 몸을 붙였다. 황제는 고분고분한 녹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까 할리드가 입을 맞춘 자리에 똑같이 가벼운 입맞춤을 붙였다.

“우리가 놓친 핏줄이 있었구나 싶었지.”

“제게 굳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고민 중이야. 이걸로 협박을 할지 말지.”

녹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일단은, 인 거군? 내게 그리 믿음이 없나?”

녹스는 대답하지 않는 걸로 그의 물음에 답했다. 황제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곧이어 황제의 집무실에 닿았다. 황제는 녹스를 하인이 서 있던 자리에 세워 놓고 곧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 황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마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종종 자신을 안으러 왔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녹스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평소 하인들이 무엇을 하더라. 보통은 시키는 일을 했다. 아니면 주인이 말하지 않더라도 필요해 보이는 물건을 챙겨 주거나. 그가 골몰하는 게 보였는지 황제가 서류를 들여다보며 성의 없이 말했다.

“무언가 하고 싶으면 하게.”

하지만 녹스는 정확히 자신에게 허락된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녹스는 일단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를 택했다. 그렇게 서 있다 보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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