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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81화 (81/158)

제81화

똑딱똑딱.

시계 소리가 울리는 박자에 맞춰 황제가 책상에 펜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툭, 툭, 툭, 툭. 그의 움직임은 거의 강박적일 정도로 일정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한숨 소리가 한 번. 그리고 다시 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 녹스는 그 소리를 듣고 알아챘다. 그가 묘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그야, 오래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버릇이기도 했으니까. 녹스는 문득 자신이 자주 마시던 차를 떠올렸다. 불안증을 가라앉혀 주고 붕 뜬 마음을 정돈해 주던 것. 녹스는 조용히 집무실에서 나와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하녀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께 차가 필요합니다.”

하녀는 모르는 얼굴을 보곤 잠시 녹스의 행색을 살폈다. 그리고 목에 걸린 볼로 타이를 발견하고는 곧장 이해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떤 차가 필요한지 말씀하시면 제가 올리겠습니다.”

볼로 타이는 노예를 뜻하는 것이나 지금 황제의 곁에 있는 이 노예는 아마 보통 노예가 아닐 것임을 눈치챈 탓이다. 황제가 이번 교류연 때 꽤 많은 노예를 받았음에도 그대로 방치한 채 오로지 한 노예만을 찾는다는 소문이 황성에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세르스커스를 준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르스커스요. 알겠습니다. 곧장 준비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녀는 그를 지나쳐 갔고 녹스는 조용히 집무실로 돌아왔다. 녹스가 어딘가 다녀오자 펠티온이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녹스는 따로 첨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그도 일이 바쁜지 따로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났을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가 서류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녹스가 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고 이내 아까 보았던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하녀가 트레이를 내밀었다. 그 위에는 찻주전자와 찻잔 한 개가 놓여 있었다. 녹스는 향을 맡는 순간, 세르스커스임을 확인하고 황제의 집무 책상에 올려 차를 따랐다.

“이건 뭘까. 무언가라도 해 보겠다는 의지?”

“테이블을 두드리시길래.”

“테이블을 두드리는 것과 이 차가 무슨 상관이지?”

“불안증을 가라앉히는 차입니다.”

“……내가 불안증이 있다고?”

“아닙니까?”

“…….”

황제는 아무 말 없이 찻잔을 내려다보다 이내 찻잔을 입에 대었다. 그리고 몇 모금 마신 후 내려놓고선 녹스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

“참 속을 알 수가 없어.”

“무엇이 말입니까.”

“나를 미워하지 않나?”

“제가….”

당신을 미워할 이유가 있습니까? 라고 되물으려던 녹스는 자신이 그를 미워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억지로 몸을 취하던 것들도 그렇고 자신이 도망치려 했던 것이 아님을 앎에도 할리드에게 알리지 않았고 또, 그냥. 이유는 많았다. 다만.

‘딱히 미워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그건 할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누군가를 원망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원망할 이유는 열 손가락을 모두 접어 보일 정도로 많았지만 그러고 싶은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녹스는 자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또,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에는 커다란 심력이 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인지 모르게 다 타 버린 그는 누군가를 미워할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면 여기 독이라도 탔나?”

“그것도 나쁘지 않죠.”

“하하.”

황제는 이런 농담이 좋은 듯 찻잔을 모조리 비웠다. 티 테이블 매너와는 참 거리가 먼 행동이었으나 그는 황제였다. 누가 말리겠는가. 녹스는 빈 찻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천천히 드십시오.”

“차 마시다 체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경험담인가?”

“…….”

사실이었기 때문에 녹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물러섰다. 황제도 곧 시답잖은 농담은 그만두고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탁, 탁, 탁 이어지던 소리는 곧 잠잠해졌고 집무실 안은 고요함만이 남아 있었다. 녹스는 조용히 침묵에 귀 기울이며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황제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서류 처리를 마쳤다. 황제는 찌뿌드드한 몸을 풀 듯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곧은 자세로 서 있기만 했던 녹스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녹스는 미간을 찡그리는 대신 그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제 가서 쉬시는 겁니까?”

그 반응이 의외였던지 황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내가 자네 막냇동생쯤으로 보이는 건가?”

“글쎄요. 막냇동생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크고 무례한 사람이십니다만.”

“하하, 거 한 마디도 지질 않는군.”

“원하신다면 한 마디쯤은 져 드릴 수 있습니다.”

“됐네. 됐어.”

말을 말지. 황제는 유쾌하게 말한 뒤 녹스를 데리고 곧장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황제에겐 황후도 황비도 없었고 그에 자연스레 자식도 없었기에 본디 홀로 드는 것이 맞았으나 황제는 이번에도 녹스의 자리를 마련했다.

녹스는 이래도 되냐는 얼굴로 일단 자리에 앉았다. 명령이니 앉아야지, 어쩌겠는가.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는 기사단을 한 번 돌아봐야 하는데 같이 갈 텐가?”

“제게 선택권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없지.”

“굳이 물으시는 이유는?”

“놀리려고.”

“알겠습니다.”

녹스는 나오는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을 보냈다. 황제는 그에게 입맛이 까다로운 노예라며 놀려 댔고 녹스는 그의 말을 대부분 무시하며 식사를 마쳤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서면 녹스도 그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따랐다. 황제의 시종과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 열을 맞춰 가는 꼴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으나 이게 그가 외출할 때 딸려 오는 기본 인원이었다.

황제는 재미없다는 듯 녹스를 제 곁으로 불렀다. 녹스는 미간을 슬쩍 찌푸리다가 곧 그가 손짓하는 대로 그의 곁에 섰다.

“지금 이렇게 다 같이 소풍 가는 꼴을 해야 할 때마다 참 창피하단 말이야.”

“창피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럴 때 보면 차라리 예전이 나았다는 생각도 들어.”

녹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예전의 그는 어땠더라. 떠오르는 건 있었다. 특히 자신이 그에게 했던 어느 행동이 떠올랐다. 그렇기 때문에 녹스는 느리게 속삭였다.

“거짓말.”

“…….”

황제는 잠시 웃지 않는 얼굴로 그를 보다가 웃었다.

“하하, 맞아. 거짓말이야.”

녹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알 법한 거짓말에 대답해 주는 취미는 없었다.

그렇게 황제의 행렬은 기사단에 다다랐다. 황제가 도착하자 훈련을 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열을 맞추어 섰다. 녹스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소유였던 기사단을 떠올렸다.

‘나쁘진 않군.’

그리고 속으로 자연스럽게 평가를 내렸다. 펠티온이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기사단의 인원도 대부분 바뀌었을 거다. 그렇다면 훈련이 덜된 자, 용병이었던 자들도 꽤 있을 텐데 열을 맞춰 서는 모양이 제법 그럴듯했다.

‘그래도 좀 아쉬운데.’

녹스는 무심결에 그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허리와 어깨를 편 자세, 서 있는 몸의 무게 중심, 그리고 만들어진 몸 정도로도 그들의 실력을 대강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녹스가 꽤 흥미롭게 그들을 보고 있자 펠티온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꽤, 아니 대단한 실력을 가진 것 같던데. 대련이라도 한번 해 보겠나?”

녹스는 그 말에 황제를 돌아보았다. 제정신이냐는 눈빛이었다.

“진담이 아닌 걸로 알겠습니다.”

“재미없기는.”

“제게 지금 칼을 쥐여 주면 어떻게 되실 줄 알고 그러십니까.”

“뭐, 해 봐야 얼마나 큰 사고겠어. 자네가 이 기사들을 전부 뚫고 도망갈 수 있을 리가….”

녹스는 펠티온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펠티온은 웃음소리를 내다가 녹스의 조용한 눈빛에 웃음을 멈추었다.

“자신이 있다?”

“글쎄요.”

“허어.”

펠티온이 허허 웃으며 잠시 입가를 가렸다. 그래, 지금 이 인원을 전부 뚫고 나갈 자신이 있단 말이지. 펠티온은 녹스가 대체 무슨 훈련을 받았는지 궁금해졌다.

라이네리오 공작가는 본디 대외 활동이 거의 없어 베일에 싸여 있는 가문이었고 특히 그 가문의 기사단은 암살자 집단이라고 불릴 만큼 은밀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 무위를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어 은근히 얕잡아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저번 연회 때 처음으로 모습을 보여 줬지.’

그때의 녹스는 숨 한 번 몰아쉬지 않았다. 상태가 조금 이상했지만 그건 아마 정신적 문제일 가능성이 컸고. 황제는 조용히 녹스에게 말했다.

“…그 실력을 다시 보고 싶은데.”

“명령이십니까?”

녹스가 묻자 황제가 단호히 대답했다.

“맞아.”

“그럼 검을 주십시오.”

“진검을 줄 수는 없고. 여봐라.”

그러자 시종들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가서 대련용 목검을 가지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내 기사단?”

황제는 두 팔을 벌리고 제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누구든 이 노예를 쓰러뜨리는 자에겐 상을 주겠다.”

녹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제대로 판을 벌이시는군요.”

“차례대로 한 명씩 붙는 거야. 자네가 쓰러질 때까지.”

“상관없습니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자네 몸은 예전 같지도 않을 텐데.”

확실히 몸이 예전 같진 않았다. 근육이 빠진 건 당연한 일이고 아마 근력도 많이 떨어졌을 테다. 하지만 녹스는 제가 이길 것을 당연히 여겼다.

항상 그래 왔으므로.

곧 기사 종자들이 자신들이 쓰는 목검을 가지고 와 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중 하나가 녹스의 손에 들어왔다. 녹스는 그 검을 손아귀 안에서 이리저리 돌려보다 이내 감을 잡았다는 듯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바로 시작하죠.”

“재미있는 구경이 되겠군.”

황제가 아주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구경을 하겠다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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