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기사들의 기세는 흉흉했다. 고작 노예 따위가 자신들을 전부 이길 수 있다 단언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들의 시선이 찌를 듯 녹스를 바라봄에도 녹스는 무표정하게 목검을 매만지다가 이내 바닥을 툭툭 쳤다.
“아무리 공작가 출신이라지만.”
“우릴 다 이길 수 있다고?”
누군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봤자 반역자 가문 주제에. 그런 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녹스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누가 자신을 가지고 무어라 떠들든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뜻이다.
녹스는 설렁설렁 걸어 나가 적당히 공터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긴 목검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오십시오. 아무나.”
살짝 든 턱, 지나치게 오만한 태도. 녹스에겐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타인이 보기엔 너무나도 주제를 모르는 행동들. 이를 갈던 기사들이 너도나도 목검을 꽉 쥐고 나서려 했으나 누군가 먼저 손을 들었다.
“나 먼저 가지.”
눈에 띄게 덩치가 큰 자였다. 그는 용병 출신의 기사, 페트로였다. 할리드와 같은 용병단에 있다가 이번 일로 기사 서임을 받아 기사가 된 자. 그렇다 보니 황궁 기사라기엔 거칠고 잔인한 자였다. 그가 나서자 다른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잠해졌다.
아마 저놈에게 된통 당하고 나면 저런 주제넘은 이야기는 더 이상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실력으로만 따지면 현 기사단에서 다섯 번째 안에는 드는 자였다.
터억.
페트로는 거리를 두고 녹스의 앞에 섰다. 녹스와 비교하자면 거의 두 배는 큰 덩치였다. 녹스의 눈이 천천히 그의 몸을 훑었다. 근육이 만들어 내는 움직임. 가로로 벌리고 선 다리. 만만한 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차피….’
녹스의 눈이 페트로를 전부 훑고 나자 페트로는 이를 아득 물며 먼저 바닥을 박찼다. 파악, 흙먼지가 일어나고 그가 순식간에 녹스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가 목검을 휘두르자 목검을 일자로 올린 녹스가 그것을 막아냈다.
타악-!
목검이 부러질 듯 맞부딪혔다. 기본적으로 체급 차가 컸다. 그럼에도 녹스는 가볍게 두어 발자국 물러서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녹스를 세게 밀어냈다.
탁!
녹스가 그의 의도대로 물러나긴 했지만 자세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페트로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린 다음 바닥을 발로 차고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돌진하는 황소와 같았다.
따악, 다시 한번 목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녹스는 그와 맞부딪치지 않고 마치 투우사처럼 그를 옆으로 흘려 내며 목검을 들었다. 빠악! 그리고 그의 등을 한 팔로 세게 내리쳤다. 그냥 들어도 커다란 소리가 울리면서 페트로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노예로 지내는 동안 조금의 훈련도 못 한 몸이라곤 생각이 안 될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페트로는 억지로 허리를 돌려 목검을 휘둘렀다. 녹스가 뒤로 휙 몸을 빼 물러섰다가, 뒤로 뺀 다리에 반동을 실어 그대로 페트로의 목 부근을 찔렀다.
나무 목검이 살가죽을 세게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페트로의 몸이 멈추었다. 그의 목엔 붉은 자국이 남았고 녹스는 그것을 확인한 후 목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가볍게 인사하며 자신이 이룬 승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답했다.
“대단한 무력이기는 하나 공격이 단순합니다.”
그리고 모여 있는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오시죠.”
그는 조금의 체력도 소진하지 않고 페트로를 넘겼다.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녹스를 인정하진 않았다.
“페트로가 상대하기에는 합이 좋지 않았어.”
“저쪽은 빠르기로 승부를 보는 유형인가 본데? 페트로가 너무 방심했군.”
그들이 입을 놀릴수록 얼굴이 붉어지는 건 페트로였다. 그들이 녹스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인정받지 못한 놈에게 진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다들 시끄럽고 아무나 나와서 싸워!”
페트로가 소리 질렀다. 기사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그가 허무하게 져 버리자 용기 있게 나서는 자가 보이지 않았다. 페트로는 그들을 향해 겁쟁이라며 분노를 쏟아 냈다.
“나오지 않으실 거라면 제가 고르죠. 기대하고 계신 황제 폐하께 실망을 안겨 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 말에 기사들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녹스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황제 펠티온은 느긋하게 서선 팔짱을 끼고 상황을 관망하였다. 자신이 나설 필요 없이 녹스가 스스로 기사단을 자극하고 있으니 재미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런 상황에서 황궁을 빠져나갈 자신이 있다는 건가.’
그때 녹스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정 누구 하나 나서기 싫으시다면 전부 한꺼번에 덤비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 말에 순식간에 기사단 전체가 분노를 터트렸다.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기사들이란 자존심에 사는 존재들. 그것을 건드렸으니 곱게 넘어가기는 글렀다.
녹스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목검으로 다시 바닥을 탁탁 쳤다. 흥분한 얼굴의 기사 한 명이 다른 기사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왔다.
“너 같은 걸 상대로 모두가 덤빌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홀로 덤비시지요. 저는 무엇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오만한 입을 찢어 주지.”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 꽤 안타까워하시겠지만, 찢을 수 있으면 그리하십시오.”
펠티온은 녹스가 입이 찢어질 경우를 생각했다. 그래, 확실히 저 예쁜 얼굴에 흉이 지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그리고 흉이 지게 한 놈을 조질 것 같기도 했다. 신기한 기분이군. 펠티온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 기사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그들에게 그저 활짝 웃어 주며 황제로서의 위엄 같은 걸 보여 주었을 뿐이다. 이런 것도 위엄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게 다시 기사 한 명과 녹스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기사는 먼저 나갔던 페트로가 쉬이 당한 것을 기억하는지 일단 자세를 잡고 상황을 살폈다. 녹스는 그저 바르게 서서 목검을 늘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녹스 저놈은 힘이 그리 좋지 않다 속도를 믿고 빈틈을 노리는 작자일 테다.
타악-!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다르게 녹스는 순식간에 바닥을 뛰어 그에게 일자로 맞부딪쳤다.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막은 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녹스는 빠르게 검을 미끄러뜨리며 그의 목을 노렸다. 기사가 훌쩍 뒤로 도약했다. 하지만 그 도약을 녹스가 다시 한번 따라잡았다.
‘이런!’
기사가 당황해 칼을 앞으로 찔렀다. 하지만 녹스는 살짝 고개를 트는 것만으로 목검을 피하고 콱 하니 그의 발을 밟았다.
“어디서 이런 조잡한…!”
물러날 수 없게 된 기사의 목에 녹스의 목검이 닿았다. 끝. 또 이렇게 쉽게 끝이었다. 도저히 녹스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건, 이건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발을 밟다뇨. 기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기사가 거세게 항의했다. 하지만 녹스는 검을 내리며 말했다.
“목을 베인 뒤에도 그런 항의를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말에 황제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끅끅거리며 박수를 쳤다.
짝짝.
공허한 박수 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기사들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녹스는 가볍게 물러나 다시 바르게 섰다. 숨 하나 헐떡거리지 않았다.
황제는 그의 얼굴을 보며 꽤 재미있다고 느꼈다. 침대 위에선 조금만 건드려도 금세 헐떡이며 눈물을 흘리는데 이런 자리에서는 철옹성 같다니. 황제는 대련이고 나발이고 이제 녹스를 데리고 들어가 방 안에서 진득하게 놀아나고 싶다는 기분을 억지로 참아 냈다. 그래도 약속한 게 있지 않은가.
녹스는 고개를 돌려 황제의 반응을 살폈다. 한 번쯤 져 줘야 하는 건가 싶긴 했지만, 솔직히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녹스는 결국 기사들을 도발했다.
“한꺼번에 덤비십시오. 폐하께서 지루해하십니다.”
황제는 웃음을 감추지 않고 턱짓했다. 그러라는 허락이자 곧 명령이었다. 황제는 눈빛이 달라진 자신의 기사들을 보며 웃었다.
‘저걸 다 쓰러뜨리고 도망갈 수 있다고? 어떻게?’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공터 끝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까지 갈 수 있다면 자네의 말을 인정해 주지.”
“알겠습니다.”
녹스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목검을 치켜들었다. 파악, 순식간에 수십 명이 녹스에게 달려들었다. 녹스는 자세를 잡고 순식간에 달려드는 그들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기사들은 미간을 찡그렸다. 홀로 다수를 상대하는데 가운데로 들어온다고?
하지만 녹스는 가장 가까운 자의 허리를 후려쳤다. 그리고 굽은 그의 등을 콱 짓밟아 바닥에 처박은 후 곧장 그 뒤에 보이는 자의 머리를 갈겼다. 빠악!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를 시작으로 제대로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녹스에게 검을 휘둘렀다. 녹스는 허리를 숙여 제게 닿으려는 검들을 피한 후 가장 가까운 자의 허리를 어깨로 들이받았다. 기사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아 곧장 양옆을 빠르게 치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