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녹스가 거리를 벌리려 함이라 여긴 기사들이 그 뒤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녹스는 슬쩍 한 번 뒤돌아 당장에 눈앞에 선 상대의 머리를 찔렀다. 다시 한번 빠악,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지며 앞서 있던 자가 쓰러졌다. 녹스는 다시 한번 거리를 벌렸다.
펠티온은 느긋하게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녹스의 움직임, 기사들의 엉망인 협동심을 볼 수 있었다. 제 기사들은 아직 오합지졸에 가깝다. 황태자, 이제 반역자로 죽어 버린 제 형님이 가졌던 형편 없는 기사들보다야 낫지만 아직 발전 단계인 것이다.
실제로 기사들 다수가 교체당해 아직 손발이 잘 맞지도 않았다. 특히 이렇게 한 명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리는 모습은 영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펠티온은 그 모습을 보며 제 시종에게 말했다.
“기사단의 훈련량을 늘려.”
“기사 단장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녹스는 그 와중에도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았다. 그저 날 듯이 그 사이를 뛰어다니다 두어 명을 쓰러뜨린 뒤 다시금 거리를 벌리길 반복했다.
하지만 같은 방법을 계속해서 쓸 수는 없는 법이다. 녹스의 방식에 익숙해진 기사들이 멀리 뒤로 도약하는 녹스를 쫓아 검을 내질렀다. 녹스는 허공에서 몸을 틀어 목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 냈다.
타악!
목검이 순간 위로 강하게 쳐지며 날아갔다. 검이 사라진 기사는 경악하며 제 손아귀를 바라보았다. 손안이 얼얼했다. 오로지 속도로 승부한다고 생각했던 사내가 힘도 제법 갖추고 있단 사실이 놀라웠다.
‘노예로 있기엔 아까운 인재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녹스가 다시 한번 크게 뒤로 도약했다. 기사들이 떼로 몰려왔다.
“그 방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누군가 외치며 녹스를 쫓았으나 그들이 간과한 게 있었다. 녹스가 계속해서 물러나며 다가가던 곳에 누가 있었는지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허어?”
녹스는 자신에게 휘둘러지는 검을 피하며 곧장 가까워진 황제의 옆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 이게 무슨 짓인가!”
황제의 턱 아래 목검을 대었다.
“하나 묻겠습니다.”
황제의 목 아래에 목검을 들이댄 자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가 물었다.
“제가 폐하를 인질로 잡아 저기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가지 못할 것 같습니까.”
“…하.”
황제가 순간 입가를 가렸다.
“아하, 아하하!”
그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녹스는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 목검을 내렸다. 황제는 배를 잡고 끅끅 웃어 댔다.
“내 기사들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여기서 폐하의 팔을 하나 자르겠죠.”
“과격하군.”
“당신께서 무사하길 빈다면 물러서라 협박할 겁니다.”
“이게 목검이라 다행이군.”
녹스는 그저 말없이 목검을 내려놓았다. 기사들은 멍청하게 몰려 선 채로 녹스와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쯧쯧 혀를 차며 제 기사단을 향해 말했다.
“훈련량을 늘려야겠군. 고작 노예 하나 감당하지 못해 어쩌나. 실망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야.”
“시정하겠습니다.”
“말은 쉽지. 노예 하나가 작정하고 도망치려 하면 막을 자가 없겠군.”
“정진하겠습니다.”
“됐어. 그럼 나는 이만 가 보지. 어여쁜 노예와의 시간이 간절해졌거든.”
그 말에 녹스가 미간을 꾸깃 찡그렸다. 펠티온은 그 모습에 또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리며 몸을 돌렸다. 기사들은 목검을 꽉 쥐고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 훈련을 재개했다. 녹스는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이내 황제를 따라 걸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다. 자신을 소유하고 맡은 자의 곁이야말로 자신이 있어야 마땅한 곳이리라.
녹스는 그렇게 황제를 따라나서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황제의 궁은 이쪽이 아닌데. 녹스가 황제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펠티온이 마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사람처럼 곁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녹스가 걸음을 조금 더 빨리하여 그의 곁으로 갔다.
“어디로 가나 궁금하지?”
“어딜 가시든 따라가긴 할 겁니다.”
“그거참 듣기 좋은 말이군.”
황제는 웃으며 곧 가까이 보이는 궁을 가리켰다. 기사단의 훈련장과 멀지 않은 곳에 지어진 궁은 황궁 안의 열네 번째 궁으로 전전대 황제의 열네 번째 황비가 기거했던 것을 마지막으로 사람이 들지 않은 곳이었다. 녹스가 고개를 기울이자 황제가 쯧 혀를 찼다.
“받은 노예들을 다 어찌할까 생각하다 저 궁에 몰아넣었지. 남부 왕국의 국왕이 가졌다는 하렘 같은 것이 생긴 거야.”
“그렇군요.”
“별다른 생각이 안 드나?”
“제가 여기서 무슨 생각이 들어야 합니까.”
“왜, 이럴 때는 총애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며 부들부들 떨어야지.”
“…전 황제 폐하의 소유가 아닙니다.”
“재미없기는.”
황제는 손을 뻗어 녹스의 턱선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녹스는 말 잘 듣는 고양이처럼 턱을 가볍게 들었다. 황제는 그 턱 아래를 살살 간지럽히다 손을 떼어 냈다.
“네게 구경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게 말입니까?”
“그래, 그대와 같은 처지의 인간들을 보면 감회가 새로울 수도 있잖나. 물론 자네처럼 고귀한 핏줄은 없을 수도 있네.”
“…이제 와서 핏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렇게 궁은 점점 가까워졌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궁이라도 황궁답게 보수와 관리는 꾸준히 해 왔는지 새하얗게 반짝이는 궁의 벽면이 보였다. 그가 등장하자 대번에 궁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황제 폐하…! 어찌 기별도 없이.”
“내가 못 올 곳에 왔나?”
“아니, 아닙니다. 너무나 영광입니다. 폐하. 이쪽으로 드시지요.”
남자의 이름은 델파. 본디 궁을 관리하던 관리자이자 이번에 들어온 남노들을 관리하게 된 자였다. 그는 남노들을 상대하느라 진이 빠져 있던 차였다.
‘황제 폐하께선 언제 오시나요?’
‘그 연회 이후 황제 폐하의 용안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저희들을 이렇게 몰아넣어 두시고 어딜 가셨나요.’
‘저희는 버려진 건가요?’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에게 황제 폐하를 보여 달라 성화를 부리니 머리가 안 빠지려야 안 빠질 수가 없었다. 황제는 그의 노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선선한 미소만 띤 채 궁 안으로 들어섰다.
그사이 각 방에선 소란이 일고 있었다. 그 연회 이후 황제가 처음으로 궁을, 방문했다는 소식이 널리 퍼졌다. 남노들은 최대한 자신들을 정갈하게 꾸미고 각자 방을 나섰다. 그리고 황제가 1층의 홀에 닿았을 때 이미 그들은 열을 맞추어 서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십수 명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 황제는 그들을 돌아보며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황제는 그들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 소유의 노예들이다. 왜 지금까지 방문하지 않았는지, 왜 내버려 두었는지 따위를 변명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는 그런 말을 내뱉는 대신 손을 들어 올려 한 명 한 명을 짚었다.
“너, 그리고 너.”
그는 오만하게 두 명을 골라냈지만 선택당한 노예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했다. 황제의 부름이다.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황제에게 진상된 노예들은 본디 귀족가 혹은 왕가에 있던 노예들로 거친 일을 하던 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는 컸지만 허리는 가녀렸고 머릿결과 살결은 부드러웠다. 굳은살 박인 곳 하나 없었다. 검을 쥐고 펜을 쥐던 녹스의 손과는 다른 매끈한 손이 곧 그들의 가슴 위에 놓였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뭐, 그러든가.”
황제는 별다른 감상 없이 옆으로 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닿은 문 앞에 섰다. 황제의 시종이 빠르게 그 문을 열었다. 노예가 지내는 방은 훌륭했지만 펠티온의 눈에는 그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방이었다.
“나와 녹스 그리고 노예 둘만이 들어가겠다. 나머지는 밖에서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황제를 뒤따랐던 자들이 답하자 황제는 녹스를 데리고 가장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선택된 노예들이 저들끼리 눈짓했다.
‘넷이서 하고 싶으신 건가?’
귀족과 황제를 모시던 자들이다. 고위 귀족일수록 그들의 성향은 변태적이었으며, 감당하지 못할 취향을 가진 자들도 빈번히 만났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자란 노예들은 넷이서 하는 일쯤은 별거 아니었다.
노예 둘이 방 안에 들어서자 뒤로 문이 닫혔다. 황제는 방 안을 둘러보더니 이내 침대 곁으로 테이블의 의자를 지익 끌고 왔다. 그리고 두 명의 노예들에게 명령했다.
“올라가.”
“네.”
“예에.”
노예들은 스스럼없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녹스는 자신도 올라가야 하나 싶은 마음에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대답 대신 녹스의 허리를 잡아채더니 곧 의자 위에 앉은 제 허벅지 위로 그를 앉혔다. 녹스는 황제의 허벅지에 앉아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황제의 옆얼굴이 보인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넌 가만히 있어.”
황제는 녹스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턱 아래에 깊게 입 맞췄다. 침대 위로 올라간 노예들은 조금 어리둥절한 상태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킬킬 웃으며 두 노예에게 명령했다.
“뭐 하지? 시작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