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달칵.
그렇게 창문을 점검하고 있을 즈음 황제가 욕실에서 나왔다. 생각보다 빨랐다. 최대한 그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는데.
황제는 목욕 시중을 든 하녀들을 모두 내보내고 물을 뚝뚝 떨구며 녹스에게 다가왔다.
“자, 그대가 할 일이 생겼군.”
녹스는 한숨을 쉬는 대신 하녀들이 한편에 준비해 놓은 마른 천을 들고 황제의 가까이로 다가섰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몸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목덜미를 지나 빗장뼈에 닿더니 이내 가슴과 아랫배에 닿았다. 느리게 녹스의 몸이 낮아졌다. 황제는 제 입 안의 송곳니를 혀로 건드렸다.
“이대로 아까처럼 입을 벌려 주면 소원이 없겠는데 말이야.”
“…제 주인님과 약속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알아, 안다고.”
황제는 투덜거리며 녹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녹스는 황제의 물기를 발끝까지 잘 닦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문 점검은 모두 마쳤습니다.”
“거기까지 전해 들었나 보군. 이유를 묻지는 않았나?”
“예.”
“왜?”
“궁금하지 않으니까요.”
“이미 이유를 알고 있어서?”
녹스는 숨기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황제는 설핏 웃었다.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날 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펠티온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 이내 스스로 움직여 가운을 걸쳤다.
“오늘은 그만 쉬어.”
“알겠습니다.”
황제는 침대로 가 누웠고 녹스는 황제의 방을 나와 하인의 방으로 향했다.
녹스는 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는 대신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는 깨끗했는데 이질적인 물건이 툭 하니 시야에 걸렸다. 연초였다. 아무래도 휴가를 갔다는 하인이 놓고 간 것 같았다. 완전 싸구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귀족들이 애용하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품질의 연초. 녹스는 그것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연초 상자를 열어 하나를 집어 들었다.
협탁을 뒤적이자 쓰다 남은 성냥이 보였다. 녹스는 입에 연초를 물고 치익, 탁. 성냥에 불을 붙인 후 연초에 불을 대었다.
스읍-
가볍게 숨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연초 끝에 불이 붙었다. 녹스는 천천히 연기를 내뱉었다. 뿌연 연기가 눈앞에서 이리저리 흩어졌다. 간만에 피우는 연초의 끝 맛은 싸하게 썼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느릿하게 숨이 막혀 왔다. 조금 밭게 숨을 내었다. 종종 그의 숨통을 조여 오는 감각이 뜬금없이 들이닥쳐 그를 흔들어 놓곤 했다. 녹스는 연초가 걸린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녹스는 눈을 가볍게 내리깔고 연약하게 흔들리는 손끝의 잔상을 좇다 이내 제 팔을 걷었다.
황제에게 맡겨져 그를 따라다니며 기사단과 대련을 하고 그의 노예들까지 봤다. 하지만 뒤돌아보니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들을 하며 느껴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가 제 혀를 빨아 댈 때조차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녹스는 다른 쪽 팔의 옷깃을 걷었다.
치익-
“읏…!”
그리고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연초로 걷은 팔 안쪽에 연초를 비벼 껐다. 그러자 뜨거운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순간 잠시 막혔던 숨이 뚫리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녹스는 크게 숨을 내뱉고 나서야 편안한 얼굴을 했다.
옅은 식은땀이 비치는 이마 아래의 눈은 여전히 검었다. 겨우 한 모금 핀 연초의 불빛이 꺼졌다. 녹스는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꺼진 연초를 내버리고 잠시 의자에 기대어 욱신거리는 통증에 집중했다. 오늘 하루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나 이 고통만큼은 선명했다. 그것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소매를 내리고 다시 단정하게 단추를 채웠다. 그리고 똑딱똑딱,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 후끈거리는 상처가 그를 달래 주었다. 넌 살아 있어. 상처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녹스는 그날 밤, 세 시간 간격으로 황제의 침실 창문을 살폈다. 그때마다 침대 위에서 잠든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미간을 찡그린 채 잠든 황제는 조금 뒤척이기도 했고 이를 악물기도 했다. 무언가 꿈을 꾸듯이.
그게 좋은 꿈은 아닌 듯했다. 황제의 자는 얼굴은 편안해 보인다기보단 불안하고 불편해 보였다. 녹스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꿈을 꾸는지 약간의 식은땀이 비치는 것 같았다.
녹스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가만히 짚었다. 어디가 아파 이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녹스는 펠티온의 앞머리를 가볍게 넘겨 주고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 말 한마디를 하곤 다시 황제의 방을 나섰다. 황제의 대답은 없었다. 고요히, 방 안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 * *
그 뒤의 일상은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황제는 의외로 녹스에게 집적거리지 않았고 녹스는 하인이 할 법한 일들을 전부 훌륭하게 해냈다. 황제는 녹스에게 꼬투리 잡을 것을 찾아내느라 가끔 눈에 힘을 줬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눈이 피로하실 겁니다.”
“하여튼 간에 귀여운 구석이 없어.”
녹스는 오늘도 부질없는 말을 하는 황제에게 대꾸하며 그의 일정을 따라다녔다. 펠티온은 다른 사람들 앞에선 녹스에게 별다른 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듯했다.
그가 제 시중을 드는 것은 당연히 여겼지만 다른 이들의 시중을 드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녹스는 가만히 그의 곁에 어여쁘게 서 있는 것 외에는 크게 할 일이 없었다.
알현실에 온 귀족들이 종종 녹스에게 호기심을 보이곤 했지만 황제는 그에 대한 질문을 꽤 칼 같이 쳐 냈다.
“곁에 있는 노예는 분명 비아 공작님의….”
“신경 쓰지 말게.”
“공작님께서 맡기고 가신….”
“신경 쓰지 말라고.”
대충 이런 식이었다. 황제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데 재주가 있었고 대부분 이런 식으로 잘라 내면 상대방은 더는 묻지 못하곤 했다. 녹스는 그런 황제가 고맙기보단 그냥,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는 것을 못 배겨 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렇다 보니 녹스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에게 차를 올리거나 밤중에 세 시간 간격으로 방의 창문을 확인하는 일밖에 없었다.
오늘도 모든 일정을 마친 후 녹스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버릇처럼 연초를 피워 물었다. 겨우 반쯤 피웠을까. 녹스는 팔 안쪽에 연초를 비벼 껐다. 치익, 소리가 났지만 이젠 신음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녹스는 까만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이것도 슬슬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손목 안쪽엔 이제 다섯 개의 화상이 남아 있었다. 동그랗게 남은 여러 개의 상처는 보기 좋진 않았다. 진물이 올라오고 동그랗게 부푼 물집은 척 보기에도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녹스는 무표정하게 소매를 다시 단정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황제의 침실 창문을 점검했다. 달각, 달각. 창문의 잠금쇠가 잘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방으로 돌아가길 몇 번.
새벽 세 시쯤, 녹스는 다시 한번 황제의 침소에 들었다. 황제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녹스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곤 곳곳에 달린 창문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당연하지만 창문의 잠금쇠는 처음 확인했던 그대로였다. 전부 잘 잠겨 있다는 소리였다.
녹스는 종종 보던 황제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듯했다. 그에게는 지독한 강박증이 있다. 확인한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손을 떨거나 가끔은 불안한 듯 다리를 떨었다. 손톱을 물어뜯지는 않았지만 입술 껍질을 떼어 내기는 했다.
그래서 녹스는 그가 명령하지 않아도 종종 차를 올렸다. 처음엔 녹스가 무엇이라도 찾아, 일을 한다고 생각했던 황제는 그 차에 어느 정도 불안증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다는 걸 확인한 후부터는 그 차만 찾기 시작했다. 황제는 은근히 녹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으나 글쎄, 녹스로선 그다지 기쁘진 않았다. 정확히는 그냥 아무 감흥이 없었다.
녹스는 귀찮을 법도 하건만 똑같은 짓을 한 번 더 반복하고는 자는 황제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보통 그런 강박증을 가진 사람은….’
녹스의 손끝이 황제의 머리칼을 스쳤다.
“제가 올 때마다 주무시는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통 불면증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 말과 함께 고르게 쉬어지던 숨이 딱 멈추었고 곧 펠티온의 눈이 뜨였다. 그는 곧 입꼬리를 올리며 옆으로 느른하게 누웠다.
“저번처럼 잘 자라는 말은 안 해 주나?”
“주무시지 못하잖습니까.”
“누구 덕분에.”
“불면증이 제 탓은 아닐 텐데요.”
“굳이 일깨워 준 건 그대였지 아마?”
“그런가요.”
녹스는 무관심한 태도로 대꾸했고 황제는 여전히 옆으로 길게 누운 채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하인치고는 자세가 너무 곧아. 황제는 홀로 생각했다. 녹스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볍게 한숨을 쉬고 황제의 머리맡에 앉아 눈을 가렸다.
“주무십시오.”
“하하, 이건 또 무슨 짓이지?”
“폐하를 재워야 제 속이 편하겠습니다.”
“왜지?”
“자지 않는 걸 들켰으니 아마 잠이 올 때까지 저를 붙잡고 늘어지시겠죠.”
“…저런, 들켰군.”
“자.”
쉿, 주무십시오. 그의 속삭임이 들렸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