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손안에서 눈꺼풀이 움직이는 느낌이 나자 녹스는 천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어릴 적 할리드가 이렇게 해 주면 잘 잤던 기억이 나서 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지금도 머리 쓰다듬어 주는 것을 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고. 녹스는 천천히, 그리고 감히 황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도닥였다.
“여긴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그건 황제의 불안을 찌르는 말이었다.
“제가 아침까지 깨어 있을 테니.”
“…그것참, 든든하군.”
황제는 그의 낮은 목소리와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는 손짓에 나른함이 드는 것을 느꼈다. 황제는 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네도 날 죽일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인데.”
“저는 폐하를 죽이지 않습니다.”
“왜지?”
“죽일 정도로 밉지 않으니까요.”
녹스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것은 그에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었으나 황제는 그것이 다른 의미로 들렸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펠티온은 그 말이 낯설었다. 자신이 밉지 않다니…. 태어나 어미가 죽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자의 미움을 샀다.
그런데 그중 자신을 가장 원망할 수 있는 자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단다. 하하, 그는 웃고 싶었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자네는 정말, 특이해.”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이래도.”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도 특이해.”
“이제 헛소리 말고 주무십시오. 밤이 깊었습니다.”
녹스는 사근사근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황제는 정말로 잠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며칠 먹은 차의 효능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황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듯 구는 녹스의 곁이라 그렇다 생각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편안히 가라앉아 있는 기분은.
황제가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쉿, 소리가 들려왔다.
“착하지….”
녹스는 저도 모르게 어린 할리드를 재울 때 쓰던 말씨를 썼다. 황제의 입이 다물렸다. 페리온은 그대로 수마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녹스는 잠이 든 황제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죽일 만큼 밉지 않다라. 나는 왜 이 사람이 밉지 않을까. 제게 그런 굴욕을 준 사람인데. 녹스는 가만가만 그의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할리드, 너도 딱히 밉지가 않아.”
그리고 여기에 없는 그를 한 번 불러 보았다. 지금쯤 그는 백작의 영지에 닿아 한창 전투를 치르고 있을 테다. 녹스는 할리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리고 푸른 눈동자. 경멸, 증오가 담겨 세상에서 가장 원망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
할리드는 자신을 미워함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그렇게 대할 리가 없으니까. 녹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 없이 지냈던 어린 시절이. 언젠가 한 번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던 그날 동안 무엇을 하며 견뎌 냈을까.
녹스는 쓰다듬던 황제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 냈다. 펠티온은 이제 정말로 잠들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황제와 할리드는 닮은 점이 많았다. 어쩌면 할리드와 어렸을 적 만나 닮아 버린 걸지도 몰랐다. 펠티온에게 할리드에 대해 물어볼까 하다가 곧 마음을 접었다.
이제 와 자신이 알아준다 해도 그 애가 받았을 배신감과 상실감은 아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녹스는 그의 심정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으면 당장 자신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니까.
모든 것은 제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다. 제가 그를 배신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내가 당한 모든 일은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녹스는 그 부분에서 숨을 멈췄다. 순간 숨이 막혀 가볍게 헐떡였다. 그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 자신이 머무르는 방으로 향했다. 손목 안쪽이 시큰거렸다. 몸 안쪽에서 누군가가 숨을 쉬게 해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떨리는 두 손이 아직 남아 있는 연초를 더듬거리며 찾아냈다. 그리고 연초 끝에 불을 대고 연기를 몇 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후에, 치익. 짧게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신음을 삼키고 이를 악물었다. 고통에 덜덜 떨리는 손을 내리누르고 길게 숨을 뱉어 냈다.
“하아….”
제 몸에 상처를 남긴 후에야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그의 팔뚝 안쪽에는 이제 여섯이 넘는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녹스는 그 팔뚝을 내려보다가 이내 소매를 덮고 다시 황제의 방으로 향했다. 아침까지 깨어 곁을 지켜 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므로.
녹스는 화끈거리는 팔뚝 안쪽의 고통을 무시하며 황제의 침대로 다가갔다. 황제는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녹스는 문득, 이 남자는 제게 왜 이토록 잔인할까 생각해 보았다. 나의 아버지가 미워서? 그가 불안증을 가지게 된 원인 중 하나에 자신의 아버지가 끼어 있을 거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그가 이겨 낸 암살자들의 절반은 제 아비가 보낸 거였을 테니. 그렇다면 그 또한 자신을 미워할 이유는 충분했다. 녹스는 몰랐다.
무너진 정신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이런 짓을 당해도 되는 이유’ 따위를 찾아 대고 있다는걸. 녹스는 조용히 황제의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금 가볍게 그 갈색 곱슬머리를 쓰다듬었다.
“날 미워하고, 미워하고, 미워하다 보면….”
녹스가 그의 이마 위로 조용히 속삭였다.
“언젠가 날 죽일 수도 있을까.”
할리드든 당신이든. 언젠가는 내게 질려 버려서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녹스는 느리게 돌아가는 생각을 내버려 두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흘러가는 것을 더 흐르게 하는 것도, 그렇다고 멈추게 하는 것도 하지 못하는 몸뚱이이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껍데기였으니까.
조용히 숨을 내쉬는 것밖에, 제 몸을 해하고 숨을 내뱉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자신. 어느 날 눈을 뜨지 못한 대도 상관이 없는 날들. 하지만 아침은 늘 그렇듯 찾아왔다. 잔인하게도.
“으음….”
황제가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오래간만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자 머리가 개운했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곧 자신의 머리맡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녹스를 발견했다. 자지 않는다더니,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약속대로 아침까지 자신을 지켰으니까.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사나.”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감긴 그의 속눈썹을 슬쩍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다 이내 슬며시 떠진다. 녹스의 검고 어두운 눈이 곧 황제를 똑바로 바라봤다.
“깨셨습니까.”
“바로 눈을 뜨는 걸 보니 존 건 아닌 것 같군.”
“눈이 피로해 잠시 감고 있었습니다.”
황제의 엄지가 녹스의 눈가를 매만졌다. 녹스는 시선을 깔고 그가 손가락을 떼어 내길 기다렸다. 황제는 마음껏 그의 눈매를 훑어 내다 이내 손을 거두었다. 녹스가 말했다.
“씻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야. 이만 방으로 가서 쉬어. 다른 궁인들을 시킬 테니. 게다가 자네 목욕 시중은 영 믿을 만한 게 못 돼.”
“그렇습니까.”
“그래, 그리고.”
황제는 느른하게 그에게 속삭였다.
“오늘 밤에도 내 침소로 오고.”
“재워 달라는 말을 그렇게도 할 수 있군요.”
“재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건방지기는.”
“봐주실 것 다 압니다.”
황제는 그 말에 설핏 웃었다. 역시 재미있는 놈이다. 황제는 멋대로 녹스의 허리에 팔을 감아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여태껏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냄새를 느꼈다.
“자네, 연초를 피웠었나?”
녹스의 침묵이 길었다.
“……방에 남아 있기에 조금.”
“그렇군. 그것도 나름 새로운 재미기는 하지.”
황제는 별다른 생각 없이 녹스의 침묵을 넘겼다. 스물을 넘은 사내가 연초를 피우는 게 무슨 문제라고. 아마 살기가 팍팍하니 더 생각나기도 할 것이고.
“연초를 좀 줄까?”
그러자 녹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연초 상자 안에 연초가 몇 개 남았더라. 그렇게 셈을 마친 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이를 보고 슬며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낀다, 아낀다 소문만 무성하지 막상 녹스에게 무언가를 내려 준 기억은 없었다. 그럼 안 되지. 안 되고말고.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 무엇이라도 받아 내야지.
“좋아.”
“값비싼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 그래.”
“진심입니다.”
“알았다니까.”
어차피 끝까지 피우지도 못할 거.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황제는 얼마 가지 않아 당연히도 최고급 연초 한 상자를 녹스에게 전했다. 잠을 자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방에 감금당하다시피 한 녹스는 그 상자를 받아 들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피우는 게 목적인 연초가 아니니까. 어찌 되었건 이걸로 녹스는 숨 쉴 수 있는 수단을 확보했다. 그러니 이것은 아주 값비싼 숨통인 것이다.
황제는 그 사실도 모르고 녹스에게 선물을 준 사실에 제법 뿌듯해했다. 할리드, 그 바보 같은 놈은 녹스에게 선물 하나 해 주지 않았을 게 뻔했다. 이래서 영, 넌 혼자서는 안 된다니까. 펠티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할리드와 이어져 있는 마정석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두드리고 통신을 하려다가 이내 툭 손가락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