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87화 (87/158)

제87화

“이걸 꼭 알려 줘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어리석은 동생은 어리석게, 저는 저대로 녹스라는 이름의 노예를 탐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녹스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녹스라는 사내가 제법 가지고 싶어졌으니.

펠티온은 마정석을 도로 품에 넣었다. 그리고 흥얼거리듯 콧노래를 불렀다. 녹스 라이네리오에게 있어선 둘 다 똑같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 * *

다음 날 아침. 녹스는 웬일로 휴가를 주겠다며 황제 궁 안을 돌아다녀도 좋다는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 그래 봤자 궁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지만 황제의 도서관 정도는 나다닐 수 있었다. 녹스는 황제의 도서관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도서관에 갔을 때,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만났는데…. 설마 이번에도 그러진 않겠지.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는지는 모를 일이다.

녹스는 저번처럼 똑같이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 줄 한 줄 곱씹듯 천천히 책을 읽고 있으니 저번처럼 누군가 조용히 들어왔다. 녹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는 대체 왜 제가 도서관에 혼자 있을 때마다 여길 찾아오는 건가.

“발티아스 데론 후작님.”

“…….”

“제가 말했지만….”

“도망치려 했다지?”

그리고 뜬금없이 뱉어진 말.

“……그게 당신과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자 발티아스가 답했다.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겠네.”

“방금 뭐라고….”

“도망치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어.”

녹스는 발티아스가 한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발티아스 데론은 무슨 생각에선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을 생각은 없는 듯 바로 곁에 선 채로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홀로 도망치려 하니 실패하지.”

“그건….”

오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녹스는 이자가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그렇게 알고 있어.”

발티아스 데론은 그 두 마디를 끝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녹스는 그에 아니라고 답할 시간조차 없었다. 마치 첩자처럼 조용히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보는 녹스의 눈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이해하지 못할 것을 바라보는 자의 얼굴이었다. 녹스는 그의 의중을 파악해 보려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서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다만, 무언가 머리 한쪽을 갉작였다. 무언가 거슬린다.

하지만 그 감각도 곧 사라졌다. 녹스에겐 지금 당장을 사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없었으므로.

한편, 도서관을 빠져나온 발티아스 데론은 도서관을 한번 돌아보았다. 자신과 녹스는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녹스 라이네리오를 탈출시킬 자신은 있었다. 다만 그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은 철저히 감춰야 했다.

죽이는 것은 꼬리를 잡힐 수 있으나 중간에 살짝 개입하여 수도 밖으로 도망칠 수 있게 해 주는 것엔 흔적이 거의 남지 않는다.

특히 자신은 녹스라는 노예와 악연이 있으므로 아마 도망치는 데 도움을 준다 해도 다들 의심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알 수 없는 배후자만 찾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갈 테지. 그럼 녹스 라이네리오는 수도에서 점점 더 멀어지지 않겠나.

‘그렇게 영원히 사라졌으면….’

발티아스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며 복도를 걸었다.

‘그가 사라지면 내가 느끼는 이 감정들도 전부 사라지지 않을까.’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그의 공을 빼앗았다는 미묘한 죄책감. 그리고 제가 해낸 것이 전부 거짓이라는 걸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전부. 그를 볼 때마다 덜컥이며 떨어지는 듯한 심장 같은 것도 괜찮아질 터다. 그만 사라진다면….

발티아스는 은밀히 궁을 빠져나와 황제의 궁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멀찍이 대어 놓은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또 저 친구가 내 궁에 와서 나를 보지 않고 사라지는군.”

집무실의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던 황제가 말했다. 황제는 슬며시 웃으며 자신의 부관에게 명령했다.

“발티아스 데론의 뒤를 밟아 봐.”

“알겠습니다.”

황제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발티아스 데론과 녹스 라이네리오라. 꽤 재미있는 사실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아.”

* * *

할리드가 돌란스 백작을 굴복시키기 위해 떠난 지 삼 주 정도가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한 달여 정도가 걸렸을 작전이었지만 할리드는 고작 이주 반 만에 돌란스 백작 영지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전차처럼 돌진하는 그의 모습에 그가 이끄는 병사들의 사기가 높았다.

마지막엔 돌란스 백작이 직접 기어 나와 검을 들었지만 할리드의 칼날 아래에선 일반 병사든 무가로 이름 높은 가문의 가주든 평등하게 두 동강 날 뿐이었다.

“공작님, 성안에 있던 자들을 전부 포박했습니다.”

“알았다. 돌란스 백작가의 일원은?”

“마찬가지로 전부 찾아 포박했습니다.”

“그들은 즉각 처형한다.”

“예.”

그들을 붙잡으면 곧장 처형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할리드는 그들의 목이 전부 떨어지는 것을 본 후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바깥은 짧지 않은 전투가 끝난 것에 아직까지도 열기가 후끈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할리드는 그 열기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 조용히 막사 안에 만들어 놓은 조악한 침대에 앉았다. 그는 품 안에 넣어 두었던 마정석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들여다봐도 괜찮을까.’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마정석을 들여다보았다. 모조리 낮이었고 그때마다 황제의 곁에 얌전히 서 있는 녹스의 모습만이 보였다. 그리고 밤에는, 일부러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녹스가 자신이 아닌 타인의 몸 아래에서 우는 모습을 보게 될까 봐. 그리고 그 사실을 확인하면 기분이 더러워질까 봐.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달했다.

녹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곁에 없으니 전투 중에조차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다 문득 할리드는 녹스의 웃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아주 오래전, 어릴 때의 도련님이 어떻게 웃었는지, 그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걸 깨달은 할리드는 최근의 모습을 떠올렸지만, 곧 깨달았다. 자신을 다시 만난 녹스는 저를 향해 미소 지은 적이 없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은 할리드는 어쩐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서 돌아가 그를 다시 제 품에 끌어안아야 이 소란스러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마정석 안으로 마력을 밀어 넣었다. 곧 마정석 위로 녹스의 얼굴이 비쳤다.

막사 밖에선 기사들과 병사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고 횃불의 불빛이 어른거렸다. 이미 늦은 밤이었다. 할리드는 녹스의 자는 모습을 보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정석 위로 비친 것은 두 사람이었다.

“왜….”

할리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러운 듯, 한 침대로 향했다. 할리드는 순간 머리로 열이 확 오르는 걸 느꼈다. 설마, 녹스가 그를 받아들였나? 펠티온을 스스로 원한 건가? 수 가지 생각이 순식간에 그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어진 행동에 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황제가 침대에 눕고 녹스를 제 머리맡에 앉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녹스의 손을 제 머리 위로 당겨 왔다. 녹스는 쯧, 혀를 차며 그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황제는 만족한다는 듯 목 안으로 가르랑 소리를 흘리며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마정석에서부터 흘러나왔다.

“홀로 주무시는 법을 익히셔야 합니다.”

“그렇긴 하지. 큰일이 나긴 했군. 날 재워 줄 사람이 가 버리면 난 어떡하나.”

“이제 홀로 주무시는 건 어떻습니까.”

“자네가 있을 때만은 좀 봐주게.”

황제는 눈을 감은 채 웃었다. 녹스는 그의 머리카락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눈을 감은 황제는 녹스의 표정이 어떤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사근사근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짓만을 느낄 수 있었을 뿐.

할리드는 마정석 위로 비치는 장면을 보며 황제가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침대로 끌어들이기는 했으나 손은 대지 않은 것이다. 황제가 녹스를 억지로 탐하지도, 녹스가 스스로 황제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 사실에 만족스러워해야 하건만 할리드는 마정석 안의 장면을 보며 속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구나. 아무에게나 베풀어 줄 수 있는 무의미한 것. 황제의 명령에 손을 내어 주었다 해도 이상하게 속이 끓었다.

할리드는 막사에 있던 연초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입에 문 끝을 잘근잘근 씹으면서도 마정석의 영상을 끊지 않았다. 눈앞에 없으니 이렇게라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돌아갈 때까지. 진짜를 품 안에 넣을 때까지.

스읍, 성냥과 연초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린 후 숨을 삼켰다. 그것이 다섯 번 정도 반복되었다. 할리드가 다섯 개비째 연초를 끝까지 태웠을 때 즈음 펠티온이 잠들었다. 녹스는 잠시 펠티온을 살피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이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할리드는 녹스가 잠드는 것을 지켜보려 했다. 하지만 녹스는 곧장 침대로 가지 않고 침대 옆의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 위엔 고급의 연초가 놓여 있었다. 할리드가 의아함을 비쳤다.

‘연초를 피웠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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