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자신과의 관계가 그렇게 된 탓에 연초 따위에 관심을 기울일 틈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보통 연초는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라도 찾을 법한데 할리드는 녹스가 연초를 찾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할리드가 그런 의문에 빠져 있든지 말든지, 마정석 안에 비치는 모습 속 녹스는 천천히 연기를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
팔뚝의 셔츠를 걷어 그 안쪽으로 연초를 비벼 껐다.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리고 찡그려지는 녹스의 미간이 보였다.
할리드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영상 속 그의 팔을 바라보았다. 그의 팔 안쪽에는 연초를 비벼 끈 자국이 즐비했다. 녹스는 마치 익숙하다는 듯 불씨가 꺼진 연초를 내버리고 다시 셔츠를 내려 정갈하게 매만졌다.
할리드는 그 모든 장면을 멍청한 얼굴로 바라만 보았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지?”
그가 중얼거렸지만, 녹스와 할리드를 잇는 마정석은 오로지 보는 것만 가능했기에 그의 목소리는 녹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할리드는 마정석을 꽉 쥐었다. 녹스는 자해를 마친 후 그저 허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상처를 견디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저 살짝 졸려 보이는 듯도 했다.
제 몸에 상처를 남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라도 손을 물리는 게 당연한 일이란 뜻이다. 하지만 녹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몸을 해쳤다. 할리드의 속에서 무언가 부글거리며 감정이 끓어 올랐다.
“녹스…!”
깊게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목소리에 담긴 것은 분노 같기도 했고 다른, 무언가인 것 같기도 했다. 할리드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곧 가볍게 떨리는 손을 들어 소지품 속에 넣어 두었던 다른 마정석을 꺼내 들었다. 일단 저 짓거리를 당장 그만두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폐하.”
그것은 펠티온과 연결된 마정석이었다. 오로지 눈으로 보는 것만 가능한 마정석이 아니라 할리드가 녹스의 미행을 지시한 이에게 쥐여 준 것처럼 소통이 가능한 마정석.
“폐하…!”
할리드가 분노한 목소리로 잠든 펠티온을 깨웠다. 할리드는 제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떨리는 것을 느꼈으나 대답이 돌아 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를 불렀다. 그리고 이내 펠티온이 깨어났다.
“…이 새벽에 무슨, 자네 때문에 잘 자던 잠을 다 깼군.”
“녹스가….”
황제가 투덜거리는 소리 따위는 지금 할리드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할리드는 잘 삼켜지지 않는 마른침을 넘기고는 그에게 물었다. 나오는 목소리엔 진득한 분노가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붙어 있었다. 황제는 그것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언제부터 자해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방금 뭐라고?”
할리드의 황망한 목소리에 펠티온이 잠시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녹스가 언제부터 자해했는지 아시냔 말입니다.”
할리드의 목소리는 황제를 추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저택에서의 할리드와 녹스는 거의 떨어져 있지 않았다. 지독할 만치 붙어 있었고 떨어진 시간이 있다고 해도 늘 몸을 섞어 왔기에 몸에 상처가 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자네가 지금 이 시간에 그렇게 말한다는 건….”
지금, 무언가를 봤다는 소리군.
황제는 그에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갔을 녹스를 떠올렸다.
녹스를 매일 보았지만 한 번도 그런 짓을 한 흔적을 발견한 적이 없었다.
자해라 함은 얇은 칼로 팔다리를 베어 내는 게 보통이니까. 그의 몸이나 옷깃에서 피 한 방울 본 적 없는 그로서는 그저 의아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할리드가 물어왔다.
“…최근, 녹스에게 주신 게 무엇이 있습니까.”
“최근에…. 내가 녹스에게 준 것이라면….”
황제의 얼굴이 순간 사납게 굳었다. 연초. 아주 가끔 피운다고 해서 내려 주었던 그 고급 연초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몸에서 나기 시작했던 연초의 냄새도 기억이 났다.
황제가 허, 하고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이내 이를 악물었다.
“내가 준 선물로…. 그따위 짓을 하고 있었다고?”
“녹스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주십시오.”
할리드의 말에 황제가 자리에서 단숨에 일어섰다. 그리고 마정석을 꽉 쥔 채로 성큼성큼 걸어 녹스의 방으로 향했다.
펠티온은 잠깐의 노크도 없이 급습하듯 녹스의 방문을 열었다. 열린 방문 안쪽으로 테이블 앞에 앉은 녹스가 보였다.
황제가 갑작스럽게 들이닥쳤음에도 녹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이 시간에 또 깨셨습니까.”
“녹스….”
황제는 흉흉한 얼굴로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그가 어째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듯 그저 그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황제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녹스의 팔뚝을 잡아챘다.
“윽…!”
녹스가 최초로 반응을 보였다. 옅은 통증이 묻어나는 신음에 황제는 낚아챈 팔의 손목을 붙잡고 셔츠를 거칠게 걷어 냈다.
“내가….”
셔츠가 걷어진 녹스의 팔뚝 안쪽에는 이미 몇 개인지도 모를 화상 자국이 가득했다. 그리고 방금 만든 것 같은 새빨갛고 동그란 상처 또한 선명히 남아 있었다. 녹스는 황제가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알 것 같았으니까.
‘할리드가 보았나.’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는 황제를 보면서 시선을 옆으로 굴렸다. 할리드가 언제든 자신을 들여다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게 지금 걸린 것도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다. 이런 밤을 몇 번이나 지샜는데.
“내가, 자네에게 이걸 준 건 이렇게 쓰라는 의미가 아니었어.”
이렇게 쓰라고 준 것이 아니야. 절대. 그의 말에 녹스는 저도 모르게 설핏 웃었다. 어쩐지 상처받은 것만 같은 황제의 목소리에 어쩔 수 없었다. 어떤 마음을 담아 주든 쓰는 것은 받은 사람 마음이 아니던가. 평소라면 그저 죄송하다며 시선부터 깔았을 녹스였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에게 조용하지만 담담하게 말했다.
“이것이 제 숨입니다.”
“뭐라고?”
“이것이 절 숨 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폐하.”
“…….”
황제의 얼굴은 더 이상 굳어질 수 없을 정도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녹스는 그 얼굴을 건조하게 올려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제 삶에서 유일하게 틈이 날 때에 저는 모든 숨을 몰아쉽니다. 물 밑의 고래처럼.”
“그게 이거라고?”
“예,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어느 순간.”
버틸 수 없었던 때부터. 그도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나약해 이러는 것인지 남들도 다 이런 것을 겪으며 이러는 것인지. 그래서 정확히 어느 부분이 문제라 제가 이러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황제는 할 말을 잃고 녹스의 손목을 잡았던 손에서 힘을 뺐다. 녹스는 황제가 잡았던 손목을 한 번 내려다본 후 곧 테이블 위의 연초 하나를 끄집어냈다.
탁, 치익-.
그리고 연초를 입에 물고 성냥에 불을 붙여 숨을 들이마신다. 연초 끝에 불이 붙자 녹스는 그것을 한 모금을 더 마시는 대신 펠티온의 손에 들려 주었다.
“노예가 허락 없이 주인의 물건에 손을 댄 것이 불만이십니까.”
“내가 분노한 건 그런 게….”
아니라고 해 봤자 녹스에게 그 말은 와닿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의 손에 쥐인 연초를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녹스는 가볍게 웃음소리만 내었고 황제는 그 소리에 낮게 으르렁댔다.
녹스는 생각했다. 아, 정말 둘이 참 많이 닮았다. 으르렁대는 목소리나, 저 표정이나. 녹스는 자신의 목에 걸린 마정석을 만지작거렸다. 아마 그 애도 지금 이 장면을 보고 있겠지.
“노예가 스스로 제 몸을 해친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녹스는 그리 말하며 황제가 든 연초 가까이로 제 팔목을 가져갔다.
“직접 그 손으로 남겨 주시지요.”
목소리는 마치 살금살금 움직이는 짐승처럼 속삭이는 듯했다. 녹스는 빨갛게 화상 자국이 남은 팔을 내밀었고 황제는 연초를 쥔 채 멍청하게 서 있었다. 자신이 그의 도움으로 안온한 잠을 이루고 있을 때,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팔목을 지지고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하면 머리가 아득해졌다.
황제는 떨리는 손으로 쥐고 있던 연초를 물렸다. 하지만 이번엔 녹스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
연초가 타들어 가며 내는 가느다란 연기 사이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치익, 그리고 살이 짧게 타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녹스가 제 손을 빌려 태연하게 팔목 안쪽을 지지는 모습에 계속해서 손을 떨었다. 피부가 타는 옅은 냄새와 소리가 그의 후각과 청각을 기민하게 찔렀다.
녹스는 태연한 얼굴 아래로 이를 악물었다. 내리깔린 눈과 그 위로 드리운 속눈썹, 이를 악물어 가볍게 힘이 들어간 턱까지 전부 황제의 눈에 들어왔다.
황제는 뒤늦게 녹스의 손을 뿌리쳤다. 꺼진 연초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졌다.
“내 호의를, 이렇게 돌려주는 인물은 또 처음이군.”
“글쎄요. 제가 처음은 아닐 것 같은데.”
녹스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답했다.
“…단 한 번도 누구에게 기대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자 녹스가 무심결에 물었다. 그 목소리엔.
“기대를 하셨습니까?”
감히, 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황제는 눈앞에서 불이 확 터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래, 감히. 내가 네게 기대를 했다.
어쩌면 조금이나마 내어 준 그 애정에.
“제게?”
그런 짓을 해 놓고도? 그런 말이 뒤편에 붙은 것만 같다고 펠티온은 생각했다.
모든 게 착각이었다 라는 말 만큼 잔인한 것은 없었다. 황제는 화가 난 사람처럼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화상이 남은 그의 팔뚝을 콱 움켜쥐었다.
“아…!”
아직까지 남아 있는 후끈거림에 녹스가 짧은 침음을 흘렸다. 황제는 하하, 유쾌하지 못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히’라는 말은 내가 해야 할 말이지.”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감히 내가 내려 준 애정을 그따위로 돌려줄 생각을 하다니. 황제는 이상하게도 머리로 열이 몰린다고 생각했다. 내가 녹스에게 정말 기대를 했나?
그러나 곧 인정해야 했다. 이 애가 내게 야트막한 애정을 내어 줬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그에 응했다고 여겼다. 한 걸음 다가왔다고 여겼고 그만큼 가까워졌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착각이었다.
녹스라는 이름의 노예가 감히, 황제의 애정을 농락했다. 펠티온은 녹스라는 장난감이 저를 기만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