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저는.”
녹스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할리드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앞에서 보여 주는 얼굴은 항상 저런 얼굴밖에 없었다.
할리드는 속이 울렁거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긴장을 하고 있다는건가? 그는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의 시선은 아래로 깔려있었고 황제의 말에 마치 ‘고민’을 하는 듯 했다. 할리드는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녹스는 자신의 것이다. 그날부터 그래왔다.
그는 반드시 제 품에 있어야 하고 무슨 짓을 해서든 자신의 품에 둘 생각이었다. 할리드의 시선이 집요하게 녹스에게 닿아왔다. 마치 씹어 먹을 것처럼. 잡아먹을 것처럼.
하지만 그럼에도 녹스는 자신이 할리드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유가 있었다. 잘못했던 것을 갚기 위해서. 녹스가 그에게 가진 것은 오로지 그 감정밖에 없었다.
“돌아, 돌아가고 싶, 습니다.”
“쯧.”
황제는 마뜩잖다는 듯 혀를 찼지만, 그 말에 할리드의 얼굴은 조금 달라졌다. 녹스는 단정해진 셔츠를 매만진 뒤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읏….”
부은 유두가 셔츠에 쓸려 조금 아팠다. 그리고 녹스에게 시선이 향해 있는 두 남자는 그의 신음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황제가 자신도 모르게 다시 녹스에게 손을 뻗으려 할 때, 할리드가 먼저 말했다.
“녹스, 이리 와.”
“…예.”
녹스는 책상을 돌아가 할리드에게 닿았고 할리드는 녹스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품 안에 차는 온기가 그를 안심시켰다. 분노처럼 어른거리던 불안감은 사라지고 안도감이 차오른다. 그건 만족감이었고 또한 일종의 승리감이었다. 자신의 것을 지켜낸 것에 대한 승리감. 그리고 다른 수컷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것에 대한 도취감.
그리고 황제에게 보란 듯 인사했다.
“제 것을 지금까지 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 조만간 또 보지, 비아 공작.”
할리드는 녹스의 팔목을 잡고 곧장 황제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녹스를 데리고 나오자 황제의 시종과 기사 그리고 부관들의 시선이 진득하게 들러붙어 왔다. 그리고 그 시선의 대부분은 녹스의 등에 붙어 있었다.
녹스는 그런 시선에 이미 무감각했다. 두 남자의 곁에 서야 할 때면 언제나 받아야 하는 그런 시선들.
할리드는 그를 데리고 1층으로 향했고 그곳엔 마차가 아니라 할리드의 말 한 마리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녹스는 그것을 보고 할리드가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알게 되었다.
역시, 마정석으로 본 그 장면 때문인가. 녹스가 잠시 말을 올려다보고 있자 할리드가 그의 허리를 잡아 왔다. 그리고 그를 훌쩍 올려 말 위에 앉혔다. 녹스가 중심을 잡고 앉자 그의 등 뒤로 할리드가 올라탔다.
“저택으로 돌아갈 거다.”
“아.”
할리드의 말에 녹스는 황제의 궁을 한 번 돌아보았다. 꽤 긴 시간을 궁에 있었던 것 같지만 아쉬운 마음 따윈 들지 않았다. 황제든 할리드든 그에게는 그저 버거운 상대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말이 출발했다. 녹스는 등에 닿는 할리드의 온기를 느끼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잔뜩 부어 셔츠에 쓸리는 감각이 불편할 뿐이었다.
말로 한참을 달려 도착한 저택은 녹스의 기억과 달라진 게 없었다.
잘 정돈된 정원도, 고풍스럽게 커다란 저택도 모두 그대로였다. 얼마나 그대로였냐면 정문 앞을 쓸고 있는 에나가 보였다. 녹스는 에나를 보고 잠시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할리드는 저택의 정문 앞에 말을 세우고 먼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이리 와.”
그리고 녹스를 향해 팔을 뻗었다. 녹스는 혼자서 충분히 말에서 내릴 수 있었으나 할리드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순순히 그에게 팔을 뻗었다. 녹스를 안아 내리자 할리드는 그제야 기분이 좀 나아진 듯싶었다.
할리드는 녹스를 내려놓고 녹스의 손목을 낚아채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주인님께서 오셨어!”
“공작님께서 벌써?”
“집사님! 하녀장님!”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예정보다 한참 이르게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집사가 헐레벌떡 내려와 그를 맞았다.
“고생이 정말 많으셨습니다. 공작님.”
“됐다.”
할리드는 녹스의 팔을 쥔 채 집사를 지나쳐 방으로 향했다. 할리드의 걸음엔 거침이 없었고 녹스도 그의 뜻에 따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할리드의 방에 도착하고서 녹스를 밀어 넣은 그가 말했다.
“옷 벗어.”
아, 녹스는 잠시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할리드는 자신을 안지 못한 지 꽤 되어 쌓일 대로 쌓여 있겠지. 그날 이후 황제에게 농락당할 대로 당한 몸이라 피로가 쌓여 있었지만 녹스에게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녹스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셔츠를 벗을 때는 셔츠에 유두가 쓸려 따끔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게 하의까지 천천히 벗어 낸 녹스가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할리드는 그의 주위를 돌며 아무 말 없이 녹스의 몸을 확인했다.
할리드는 펠티온이 녹스의 몸에 남긴 자국들을 확인하며 콧잔등을 구겼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그가 남긴 자국들을 쓰다듬었다. 손끝에 절로 힘이 들어섰다. 손톱 끝이 옅은 상처를 파고들었다.
“읏…!”
녹스의 신음을 들은 할리드가 아차 싶었는지 손을 떼어 냈다. 할리드는 지금 녹스에게 고통을 줄 생각이 없었다.
할리드는 녹스의 등을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곧게 뻗은 등. 억지로 잡힌 것 같은 손자국. 이에 물려 남은 피딱지와 억지로 울혈이 남도록 빨린 자국들.
그리고 그 아래로 종아리를 조이고 있는 삭스 가터와 발목을 가린 양말. 할리드는 아랫입술을 한 번 꾹 물었다가 녹스를 안아 들고 곧장 침대로 향했다.
녹스는 그가 곧장 자신을 안을 거라 생각했지만 할리드는 그를 침대에 눕히고 시트를 당겨 몸을 덮어 줄 뿐, 본인이 올라탈 생각은 없어 보였다. 녹스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할리드는 손을 들어 녹스의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보라색과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는 멍 자국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날, 펠티온이 남긴 손자국이었다. 지독하기 짝이 없었다.
할리드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그의 목울대에 코를 묻었다. 녹스가 고개를 살짝 들었고 할리드는 마음껏 숨을 들이마시며 그동안 맡지 못했던 녹스의 체취를 제 안에 쌓아 갔다.
할리드는 느른한 맹수처럼 녹스의 옆에 제 몸을 뉘었다. 입술은 목울대를 타고 미끄러져 이내 목덜미로 내려섰다. 녹스는 할리드의 숨결이 너무 가깝게 느껴진다 생각했다. 이렇게 안고 있으면서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건 처음이라. 그의 숨결을 가만히 느끼고 있는 게 너무 낯설었다.
할리드는 격정적이고 직선적이다. 자신과 몸이 닿으면 무작정 몸을 섞으려 드는 것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할리드는 무언가 달랐다. 따뜻하게 닿아 오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대로 느껴지는 온기는 묘한 안정감을 불러왔다.
‘무슨 생각인지.’
녹스는 그가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당장 자신을 안을 생각은 없는 것 같다고 여기고는 눈을 감았다. 어쩐지 조금, 졸음이 몰려왔다. 황궁에 있는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탓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할리드는 녹스의 숨소리가 천천히 그리고 고르게 나기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 잠이 들었나.
할리드가 잠시 녹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잠든 얼굴, 아니 거의 울다 지쳐 기절하듯 잠든 얼굴만 보았던 할리드는 깨달았다. 그가 이렇게 편안한 얼굴을 할 수도 있었구나.
“…한동안은 쉬게 둬도 괜찮겠지.”
황제의 손아귀 안에서 하얗게 질려 가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절로 이가 갈렸다. 그 뒤 마정석을 망가뜨렸는지 녹스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할리드는 주먹을 한 번 꾹 쥐었다 폈다.
부스럭-
그때, 녹스가 잠시 뒤척였다. 할리드는 그를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괜찮아. 더 자….”
그가 속삭이면 뒤척이던 몸이 잠잠해졌다. 할리드는 오랫동안 녹스를 안지 못한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편안히 제 안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에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오로지 제 앞에서 긴장만 하던 그가 제 품 안에서 처음으로 편안한 얼굴로 잠들었다는 사실이 그의 기분을 쉬이 움직였다.
‘그래, 이 멍이 다 나을 때까지는….’
조금은, 조용히 지내도 괜찮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한동안 둘은 굉장히 평화로운 때를 보냈다. 할리드는 녹스를 억지로 안으려 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녹스도 꽤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선지 할리드는 녹스가 다시 저택 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이미 어항 속 물고기처럼 방 안에 익숙해진 녹스는 눈만 껌뻑일 뿐, 열린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예전처럼 몇 시간이고 허공만 바라볼 뿐. 출전 이후 일정이 없는 할리드가 끌어내지 않았더라면 아마 하루 종일 침실에 앉아 있었겠지.
“도서관을 좋아했잖아.”
할리드는 그렇게 말하며 녹스를 도서관으로 데려갔다. 녹스는 생각했다. 내가 도서관을 좋아했었나? 녹스가 그의 말을 듣고 떠올렸다. 그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집 안에 갈 수 있을 만한 곳이 그곳밖에 없어 근처를 떠돌았을 뿐, 특별히 좋아했던 기억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
그래도 어렸던 할리드와 조용히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건 좋아했던 것 같았다. 할리드는 자신을 흘끔거리고 자신은 책을 읽는 척하며 할리드의 기척을 살폈던 그 어린 날에나 조금.
할리드는 녹스를 책장 앞으로 잡아끌었고 녹스는 그에게 그대로 끌려 책장 앞에 닿았다.
“주로 어떤 걸 읽지?”
“보통….”
녹스는 책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예법서 하나를 꺼냈다. 할리드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녹스는 물끄러미 할리드를 바라보다 그 책을 그에게 내밀었다.
“…나보고 읽으라는 건가?”
“…….”
녹스는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그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고 할리드는 하는 수 없이 그 책을 받아 들었다. 당연하게도 할리드는 예법에 약했다. 춤도 출 줄 모르고. 귀족 사회에 대해 아는 게 적었다.
그러니 이런 책이라도 읽어 채우는 편이 좋았다. 이 책은 날짜를 보아하니 최신에 나온 것이라 괜찮으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