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이런 걸 읽느니.”
“검을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낫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이젠 읽으셔야 합니다.”
“…….”
할리드도 할 말이 없었는지 책을 한 번 펴 보기는 했다. 비록 시늉에 그쳤지만. 녹스는 오래전에 읽다 말았던 역사서를 꺼내 할리드를 데리고 창가의 자리로 향했다. 할리드도 얌전히 그를 따라 책상에 앉았다. 서로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이 책을 펴 들고 글자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얼마가 지났을까. 할리드는 조금씩 집중력을 잃고 흘깃흘깃 녹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녹스는 그 시선을 눈치챘지만, 그저 책의 글자만을 조용히 읽어 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시선을 신경 쓰면서 책을 읽는 척 노력하기 시작했다. 마치 어릴 적 같았다.
“집중이 안 되십니까.”
‘집중이 안 되나 보지.’
어릴 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니….”
‘아, 아니요…!’
그때와 똑같은 상황, 똑같은 대답 그리고 그때와 같지 않은 너와 나. 녹스는 어쩐지 입 안이 써서 고개를 들고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할리드는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이미 책에 흥미를 잃은 게 보였다. 눈이 딱 그랬다. 어렸을 때도 흥미가 없는 것에는 저런 표정을 짓곤 했으니까. 생각해 보면 참 웃겼다. 하인이 주인 앞에서 좋고 싫음을 티 냈다는 게.
‘내가 애지중지 기르긴 했었지.’
녹스는 문득 어린 날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자신도 할리드를 버리지 않았고, 할리드도 저를 이리 대하지 않았다.
녹스는 문득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오래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때로. 녹스는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허공에 멀거니 시선을 던졌다. 녹스를 살피던 할리드가 이런 그의 변화를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
“그냥….”
할리드가 목을 울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무언가 거슬린 모양이었다.
“밖에 나가고 싶나?”
“아….”
그거였군. 녹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조금도?”
“조금도.”
녹스의 힘 없는 목소리에 할리드의 음성이 조금 가라앉았다. 할리드는 녹스가 바라보고 있던 창밖을 똑같이 바라보다가 문득 이야기했다.
“저기 네가 잘 어울리던 하녀가 있군.”
“아, 에나가….”
에나는 잠시 정원에 앉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 자그마한 몸으로 뭐 그리 생각할 게 많은지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녹스는 문득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저택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몸이었고 에나는 보통 저택 안보단 바깥에서 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보아라.
그는 안에 있었고 에나는 바깥에 있었다. 에나는 정원에 한참을 앉아 있다 이내 터덜터덜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녹스는 아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할리드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안 됩니까?”
“…글쎄.”
안 된다는 소리였다. 녹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자신이 도망가려 했다는 누명을 쓰기 직전, 한참 같이 나다닌 것이 에나였는데…. 저번이 빌린 푼돈은 하녀장, 마를렌에게 말해 어떻게 돌려주긴 했었다. 그것을 수상히 여기지 않아 준 마를렌 덕분에 에나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다. 하녀장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준 걸지도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녹스에겐 고마운 일이었다.
그는 문득 제메일을 떠올렸다.
무작정 수도 밖으로 내보낸 자신의 사촌 동생. 아마 수도 밖으로 무사히 나갔다 해도 수많은 위험이 그 애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다행히 잘 먹어 또래보다 키는 컸지만, 그사이에 많이 말라 있었고 아직 성인도 아니었다.
아마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도 있을 거다. 그러나 자신은 그 아이를 지켜 줄 수 없다. 그 사실이 가슴 한쪽을 싸하게 만들었다.
‘결국 내가 살면서 제대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구나.’
아버지를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할리드를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고 황제에겐 버려지고 노예로서도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고. 그리고 제메일을 끝까지 책임 져 주지도 못하고.
녹스는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오래전엔 아버지와 같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 자체가 혐오스러웠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아버지가 싫고 더러운 것은 여전하지만 자기 자신도 그다지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존중받기엔 너무나….
도서관 한쪽 창가에 햇볕이 들이치고 있었으나 녹스와 할리드가 앉아 있는 곳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녹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할리드도 그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밖에 나가고 싶은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녹스를 내보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또, 언제 도망가려 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황제는 할리드에게 그가 도망가려 하지 않았음을 알리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는 아직까지도 일방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녹스 또한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의 의지가 꺾여 버렸기 때문이다. 할리드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끌어 올릴 수 있을까.
“술이나 한잔할까?”
대낮이라는 건 둘 사이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술이라는 말에 창밖에 고정되어 있던 녹스의 시선이 할리드에게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됐어. 너랑 술 내기하자는 것도 아니니까.”
할리드는 읽는 둥 마는 둥 하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서관을 나서는 그의 등 뒤로 녹스가 따랐다. 그들은 할리드의 방으로 향했다. 녹스의 방은 이제 명분상 존재할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녹스는 항상 할리드의 방에서 지내고 있었으니까.
“술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내와 주셨으면 합니다.”
녹스가 방으로 들어가기 전 지나가던 하녀에게 말했다. 하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사라졌고 녹스는 할리드가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할리드는 맞은편에 앉아 창문가로 들어오는 햇빛을 맞고 있는 녹스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듯하지만 빛을 받으면 녹빛으로 빛나는 암녹색 머리카락. 그리고 오로지 검게 보이는 눈.
그의 눈은 원래 저런 빛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 깨달았던 사실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생각을 끊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하녀가 손쉽게 집어먹을 수 있는 간단한 요리와 위스키를 내왔다. 크리스털로 된 잔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으며 옅은 주홍빛 술은 달콤한 냄새를 풍겼다. 녹스는 손을 뻗어 술병을 쥐고 할리드의 잔에 술을 채웠다. 크리스털 잔에 담긴 술이 빛을 받아 색이 연해졌다.
할리드는 녹스의 손목을 바라보다 이내 술병을 빼앗듯 쥐고는 그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녹스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이내 술잔을 두 손으로 쥐었다. 할리드의 콧잔등이 찡그려졌다.
하지만 무어라 이야기를 덧붙이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녹스는 두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할리드는 녹스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녹스가 천천히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알싸한 맛이 목구멍을 지났다. 너무나 오래간만에 마시는 술에 녹스가 미간을 조금 찌푸리자 할리드가 물었다.
“입에 맞지 않나?”
“아닙니다. 너무 오래간만이라.”
“그렇군.”
할리드는 그렇게 말하며 녹스가 따라 준 잔의 술을 모두 비웠다. 녹스가 그것을 보다 그와 속도를 맞추기 위해 남은 술을 천천히 비웠다.
할리드의 시선이 녹스의 목울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술을 넘길 때마다 움직이는 울대를 느린 시선으로 훑던 그는 이내 입맛을 다시곤 스스로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침묵을 친우 삼아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텅 비어 버린 관계처럼.
* * *
녹스는 조금 졸린 듯했다. 술을 마저 마시기 위해 잔을 쥐려 했지만 얼핏, 헛손질을 했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용케 잔을 똑바로 쥐었다. 그리고 잔에 든 술을 그대로 넘겼다.
맞은편에 앉은 할리드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미간을 슬쩍 찡그린 채 술잔을 쥐고 있었지만 술잔이 대충 세 개 정도로 보이는 상태였다. 너무 빨리 그리고 많이 마신 탓이었다. 그건 둘 다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에 대화가 없으니 술만 계속해서 동났고 지금 마시는 위스키의 도수는 너무나 높았다.
녹스가 꾸벅꾸벅 졸면서 잔을 내려놓았다. 할리드는 제 눈앞의 술잔이 한 개인 건 몰랐지만 녹스가 졸고 있다는 건 눈에 잘 보였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안아 들었다. 그러다 한 번 크게 휘청거렸다.
녹스가 반사적으로 할리드의 목에 팔을 감았다. 할리드는 자신의 목을 꾹 감아 오는 팔에 제대로 서서 그를 침대로 데리고 갔다.
비틀비틀, 걸음이 비뚤어졌다. 할리드는 콧잔등을 잔뜩 찡그리다가 침대에 무릎이 걸려 툭 넘어졌다. 녹스가 먼저 침대에 등이 닿았고 그 위로 할리드의 몸이 겹쳐졌다.
“윽….”
“잠깐….”
할리드가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이내 녹스의 몸 위로 제 몸을 다시 겹쳤다. 녹스는 묵직한 감각에 일단 할리드의 몸을 감싸 안았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평소보다 닿는 체온이 높았다. 할리드는 녹스의 목덜미에 제 입술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막상 자리를 깔아 놓으니 어찌나 할 말이 없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