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진심이 툭 하니 새어 나왔다. 그건 녹스도 마찬가지라서 설핏 웃었다. 그의 웃음에 할리드가 기민하게 반응했다. 고개를 들고 녹스의 얼굴을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다시 웃어 봐.”
“다시….”
다시라는 말에 녹스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아까처럼 자연스러운 미소는 지어지지 않았다. 할리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어떻게 해야 웃으려나.
할리드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아주 어렸을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도련님. 하고 그를 부르면 녹스는 항상 미소로 화답해 주곤 했다. 술을 마시지 않았으면, 취하지 않았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었다.
“…도련님.”
그 말에 취한 녹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할리드는 술에 취해 마치 애교를 피우듯 그의 셔츠 깃에 머리를 비볐다.
“…내 도련님.”
녹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낮에 떠올렸던 과거가 지금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취하지 않았다면 이런 허무한 놀이에 어울리지 않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 모두 술에 절어 취해 있었다.
“…응.”
할리드, 너도 어쩌면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녹스는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도련님이라 부르며 따르던 때를. 그가 날 미워하지 않고 나도 나를 미워하지 않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녹스는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도 할리드만큼은 똑바로 보였다. 자신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다 커 버린 할리드가.
“…할리드.”
“네, 도련님.”
녹스의 손이 부드럽게 할리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면 할리드는 그 손바닥에 제 머리를 비비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마치 말 잘 듣는 맹수처럼.
할리드는 고개를 들어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가 뺨을 비볐다가 다시 머리로 가져가는 등 어리광을 피웠다. 녹스는 설핏 웃음이 나와, 웃으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예쁜 내 할리드….”
할리드가 멈칫했다. 아주 오래전에 녹스가 자신의 도련님일 적에 아주 가끔 해 주던 말이었다. 예쁜 내 할리드.
할리드는 참지 못하고 그의 입술에 입 맞췄다. 입술을 벌리면 술의 향기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그럼에도 그는 입술을 붙여 혀를 섞었다. 녹스도 입을 벌리며 그가 들어오는 것을 반겼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밀고 들어오는 혀를 잘근잘근 물어 댔다. 넘어오는 타액을 삼켰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술 밖으로 흐르면 할리드가 잠시 입술을 떼고 그 자국을 핥았다. 녹스가 간지러워 미간을 좁히면 또 귀신같이 입술을 붙여 숨을 불어넣었다.
“하으, 하….”
“하….”
기나긴 입맞춤이 끝나고 나자 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을 몰아 내뱉었다.
“…도련님.”
할리드가 숨처럼 속삭였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주욱…. 항상, 이러는 게 꿈이었어요.”
당신과 닿아 입을 맞추는 거요. 그리고 당신의 몸을 지칠 때까지 삼키고 물고 빨고 핥는 것이요. 당신이 울 때까지 제 품에서 놓아주지 않는 게 꿈이었다고. 그는 어린 날의 욕망을 속삭였다. 네가 날 어리게만 보았던 나날 동안. 난 항상 이러고 싶었다고.
“알고 있었어요?”
“…몰, 몰랐, 어.”
“거짓말.”
할리드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밤의 맹수처럼 눈에 빛이 어른거렸다.
“도련님은 늘, 그러셨죠. 알아도 모르는 척.”
그의 음성은 조금 낮아져 있었고 깊게 갈라져 있었다. 할리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도련님을 좋아하는 걸 알고 계셨었잖아요….”
어릴 적의 할리드는 몰랐다. 하지만 바닥을 구르고 굴러 나이를 먹은 할리드는 깨달았다. 어릴 적의 자신이 얼마나 좋아하는 감정을 못 숨겼는지. 그래서 눈치 빠른 도련님이 내게 그렇게 빨리 질려 버린 걸까 하는 생각이 악몽이 되어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었다.
그때의 감정에 휩싸이자 할리드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원망이 불쑥 올라왔다. 내가 널 사랑하는 걸 뻔히 알면서. 그런데도, 그럼에도. 할리드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한다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면 아는 체 해주지 그랬어. 차라리 내 감정을 자르고 경고하지 그랬어. 그렇게 버리지 말고. 그렇게 내치지 말고.
그래서, 그간 그렇게 묻고 싶었던 말을 툭 내뱉었다.
“왜, 날 버렸어요?”
덜컥, 그 말에 녹스의 숨이 멈췄다. 그리고 이내 거칠게 뱉어졌다. 마치 한참 동안 숨을 눌러 참은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술 때문에 어지러운 시선. 머릿속에서부터 들려오는 것 같은 질문. 녹스의 눈에 지금의 할리드는 마치 어릴 적의 그것처럼 보였다.
녹스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할리드의 뺨을 쓸었다.
“미안, 미안해….”
“…만약.”
할리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시 그날이 온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다시, 그러지 않을 거라고 말해 줄 수 있어요?”
그의 음성이 절절히 끓었다. 하지만 녹스는.
“아니…….”
녹스가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나는 다시 그래야만 해….”
널 다시 버릴거야. 오해할 길도 없는 그 말에 이번엔 할리드의 숨이 멈추었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무엇을 기대했던 것인지…. 하, 헛웃음이 지어졌다. 취한 머리에도 지금 자신들이 말도 안 되는 연극 놀음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과거의 상처가 또다시 헤집어진 할리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이제 와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지.”
그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녹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고 돌아갈 수도 없다는 걸. 녹스는 할리드를 버렸고 할리드는 녹스를 학대했다. 그렇기에 이미 늦어 버린 것이다. 할리드는 다시 한번 녹스의 손바닥 깊숙이 입을 맞췄다. 어리석은 내 도련님, 멍청한 내 노예. 어차피 이젠 내 손안에서 놀 수밖에 없는 가련한 놈.
“너는… 네가 멍청하게 굴어서 이 꼴이 난 거야.”
녹스의 손가락이 조금 오그라들었다. 나를 버려놓고 넌 괜찮았던 모양이다. 그때가 다시 와도 나를 버리겠다는 말은 결국 그걸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할리드의 그리움은 곧 원망으로 바뀌고 할리드는 이를 세워 녹스의 손바닥 안쪽을 물었다.
“나를 버리고.”
피가 나도록.
“2황자까지 버린 이후로 네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어.”
녹스는 그 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말 그대로 그저 변명일 뿐.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맞아. 네 말이 맞아. 그래도 말이야.
나는, 나는 그러니까. 나는….
“버리고 싶어서 버린 적 없어….”
녹스의 눈가에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비쳤다.
“너를….”
그 말에 할리드가 멈칫했다.
녹스는 욱신거리는 손바닥을 끌어다 다시 한번 눈을 가렸다. 꼴사납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2황자에겐 그저, 버려졌을, 뿐이야….”
울음 섞인 목소리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할리드는 그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2황자에게 버려졌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녹스….”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난데….”
녹스는 머리가 너무나 어지러웠다. 눈앞이 흐릿했다. 먼저 손을 내밀고, 거절당하고. 기어코 그에게 이용당하다 버려진 것은 내가 어리석은 탓일까 아니면 황제의 모진 성정 탓일까. 그리하여 녹스는 결국 눈을 감았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며 녹스는 그렇게 기절하듯 잠들었다.
할리드는 술에 취한 머리로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2황자에게 버려진 거라니?
녹스의 몸이 축 늘어진다. 할리드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며 애쓰다 그의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오는 졸음에도 녹스가 했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 말이 대체 무슨 말일까. 쓰러져 누워 녹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비치는 눈가. 젖은 속눈썹. 가맣게 가라앉은 눈 밑과 예전보다 창백해진 피부.
할리드는 어두운 방 안에서 녹스의 얼굴을 시선으로 훑고 또 훑었다.
점점 눈이 감긴다. 온갖 생각이 술에 절여져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몸이 물에 젖은 기분. 머리는 허공에 뜨는데 몸은 가라앉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렇게 할리드는 술기운에 져 눈을 감고 말았다. 이내 두 사람의 숨소리가 겹쳐졌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이 찾아왔다.
* * *
눈을 뜬 할리드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찌르는 듯 아픈 머리에 이마를 붙잡았다. 헝클어진 머리가 손가락에 엉겨 왔다. 할리드는 고개를 돌렸다. 제 옆에서 자고 있는 녹스가 보였다. 할리드는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 속에서 자신이 어제 한 짓을 떠올렸다.
‘도련님.’
그는 자신의 머리를 한 대 후려갈겼다. 미쳤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할리드는 꼬여 있는 머릿속을 달래려 일단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술을 잔뜩 마시고 잠든 녹스는 아직 일어나지 못한 듯싶었다. 어제의 일 탓에 얼굴 보기가 껄끄러웠다. 먼저 씻고 나가는 편이 좋을 거라는 생각에 할리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어떤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2황자에겐 그저, 버려졌을, 뿐이야….’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난데….’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댕강 잘려 앞뒤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2황자가 먼저 자신을 버렸다고 한 녹스의 말 하나만큼은 희미하게 떠올랐다. 또,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말도 기억났다. 할리드는 잠시 멈칫거리며 녹스를 내려다보았다.
‘2황자가 먼저 자신을 버렸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이지?’
게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건 무슨 말이야. 녹스. 할리드는 자신이 아는 선에서 그 말을 추측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문득, 어느 날 황제가 내밀었던 것이 기억났다.
반지, 그 반지.
그저 어렸을 적 스쳤던 인연일 뿐이라면서 내밀었던 그 라이네리오 가문의 반지.
할리드는 일부러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것을 꺼내 들었다.
‘그냥, 오래전에 받아 뒀던 게 지금 생각났을 뿐이야.’
‘물어도 답해 주지 않을 거야.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니까.’
황제의 그 미련 넘치는 말, 그리고 바로 이어졌던 말들.
‘만약 녹스 쪽에서 날 먼저 원하면?’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어떻게 단정 짓지?’
황제와 녹스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건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할리드는 머리가 아파져 잠시 관자놀이를 짚었다. 반지를 줄 정도의 사이.
그는 이제 이마가 아니라 가슴 한구석이 뻑적지근하게 불편한 게 느껴졌다. 추측하면 할수록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할리드는 일단 머리를 헝클이고는 하인을 불러 목욕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할리드는 뜨거운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몸을 담그고 계속해서 생각했다. 2황자가 자신을 먼저 버렸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