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과거의 녹스가 2황자에게 반지를 주었다. 그리고 이어 버려졌다고 말했다.
녹스가 펠티온을 황제라 칭하지 않고 2황자라고 불렀으니 과거에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할리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없는 사이, 그와 녹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러면 그건….
쓸데없는 상상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자신의 반지를 내미는 녹스와 그것을 받아 드는 2황자 펠티온. 할리드의 상상은 가볍게 녹스의 얼굴에 이전에 보았던 미소를 덧씌웠고 펠티온은….
촤악-
그가 욕조에서 일어섰다. 황제는 단 한 번도 녹스에 관해 이야기한 적 없었다. 거의 형제처럼 지냈던 두 사람이다. 물론 형제처럼 지냈다고 해서 둘 사이에 비밀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할리드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찾아가 봐야겠어.’
그는 스스로 물기를 닦고 욕실을 나섰다. 그의 의복을 챙기는 하인들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흘깃 침대 위를 보니 녹스는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녹스를 깨워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지만 동시에.
‘만약 2황자와 깊게, 마음이라도 나눴던 거라면.’
그걸 그에게 직접 확인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균열 난 마음의 틈을 파고들었다. 녹스의 입으로 그와 마음을 나눴었노라고 대답하는 꼴을 본다면 나는.
할리드의 턱이 단단히 다물렸다.
할리드는 그 눈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옷시중을 받아 의복을 챙겨입은 후 자신의 방을 나섰다. 끼익, 탁. 그가 하인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섰다.
방에서 나온 할리드는 가장 먼저 황제를 만나 보기로 했다. 만약 2황자 시절 녹스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라면 황제인 그가 가장 잘 알 테니까. 할리드는 녹스의 입으로 자신이 없었던 과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황제에게 사실 확인을 하고 그를 더 얽매고 싶었다. 과거 따윈 다신 머릿속에 떠올릴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기억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오로지 제 것으로.
그렇게 황궁으로 향한 할리드는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는 얼굴을 한 황제와 독대할 수 있었다.
“그런 태도로 가 버리고선, 이렇게 빨리 날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왜, 경고라도 하러 왔나?”
황제는 할리드의 맞은편에 앉아 실실대며 농담을 뱉었다. 아니, 반은 진심인 것 같았다. 오래도록 함께 지내 온 만큼 눈빛만 봐도 대강 기분을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저도 찾아오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할리드는 황제 맞은편에 앉아 무릎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이다가 주먹을 꽉 쥐고선 물었다. 그리고 마음을 먹자마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폐하께서 녹스를 버리셨습니까.”
“…….”
황제가 슬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그 반응이 어떤 의미든 간에 할리드에겐 그것이 말하기 곤란한 것으로 비쳤다.
“녹스가 2황자 시절, 폐하께서 자신을 버렸다 말했습니다.”
“…녹스가?”
황제는 가만히 생각했다. 할리드가 이렇게 찾아와 물을 정도면 녹스가 확실히 그렇게 말했다는 뜻일 거다. 하지만 황제는 2황자 시절 녹스와 큰 접점이 없었다. 라이네리오 공작가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건 꿈도 못 꿨던 일이었다.
가주였던 녹스의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황태자를 다음 황제로 밀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딱 한 번 그와 엮였던 일이라면….
‘그 반지.’
제게 모욕을 주었을 때. 그때뿐이었다. 황제는 문득 할리드가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확인하고자 온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반지. 버려졌다는 말.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삼류 소설 같은 내용이 있었다.
황제는 짐짓 입을 다물고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는 지금 제 품에 있던 녹스를 빼앗겨 꽤 심통이 난 상태였다. 게다가 할리드, 그는 요즘 녹스를 품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지. 그 사실이 그의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이 인식하지 못할 만큼 은근하게.
“오래전의 일일 뿐이야.”
그래서 할리드에게 약간의 거짓말을 했다. 그것이 녹스를 위해서였냐고 묻는다면 아니. 그저 자기 자신의 소소한 분풀이를 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 한 번 풀자고.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할리드가 미간을 찡그렸다.
“어린 날의 실수라는 거지.”
황제는 느긋하게 웃었다. 할리드의 속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두 사람에게 자신이 모르는 과거가 있다고? 할리드는 두 손을 꽉 쥐고 황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황제는 자세히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다리를 꼰 채 할리드를 평이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자세하게 말해 줄 것이 없다는 게 맞았지만, 황제는 지금 할리드의 속을 조금, 아주 조금 뒤집어 놓고 싶었을 뿐이었다.
“우린 서로에게 맞지 않았어. 그게 다야.”
아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놓고 잘도 녹스를 안으셨군요.”
“이젠 겨우 노예니까. 편리하게 다룰 수 있는.”
황제가 웃는 낯으로 말하자 꽉 쥔 할리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두 사람 사이에 그런 비밀이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할리드는 귀족 사회를 전혀 모른 채 자라났고 황제와는 비밀스럽게 만나는 게 다였다.
그러므로 녹스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어떻게 자랐는지 그리고 또 누굴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이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군.”
“그래서 그러셨습니까?”
하지만 할리드는 여기서 애매하게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녹스에게 선택하라고 했던 것 말입니다.”
황제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그래. 말 그대로 날 선택했던 건 녹스의 뜻이었으니까.”
완벽한 거짓까지는 아니었다. 실제로 제게 반지를 떨어뜨렸던 그 행위가 어떤 행동이었는지 황제는 이제 와 알고 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면 날 선택 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
어리석은 할리드는 녹스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어리석어졌다. 질투에 눈이 멀어 그가 자신에게서 도망갈까 전전긍긍하고 결국 그의 목덜미를 틀어쥐어 강제로 제 곁에 두기밖에 하지 못하는 머저리.
“아니면 언젠가 말이야.”
“…….”
“녹스가 필요 없어졌을 때 꼭 내게 버려주길 바라.”
“…남이 버린 것을 주워다 쓰는 취미는 없으신 걸로 아는데요.”
“그게 녹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우린 말 그대로 꽤 ‘특별’ 했으니까.”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황제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때를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을 거야. 녹스는.”
황제는 그런 그의 점을 콕 집어 건드린 것이다. 그 또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다고 먹칠을 하려는 얕고 이기적인 생각.
“그 애가 네게 묶여 있는 이유는 그저 과거의 죄책감뿐일 테니까.”
할리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황제는 그런 그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할리드는 무례하게도 인사도 남기지 않고 떠났고 황제는 그가 떠나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한심한 짓인지.”
황제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떼를 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참을 수 없었던 건… 감추지 못할 질투심 때문일 거다. 그게 녹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고. 황제는 그 언젠가 깊이 후회하게 될 일을 어렵지 않게 해냈다. 정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 * *
녹스가 눈을 뜬 건, 그때쯤이었다. 멍하게 눈을 뜬 녹스는 어제 일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할리드와 함께 침대에 엎어졌던 기억은 나는데 그게 정말 다였다. 무슨 말을 했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따위는 전부 잊은 채였다. 녹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씻곤 옷을 걸쳤다. 그리고 잠시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할리드가 없는 지금, 문밖으로 나가도 될까에 대해 고민하였다.
“하….”
그는 곧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다시 저택을 돌아다녀도 된다는 허락이 있었으니 정원으로만 나가지 않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온몸이 찌뿌둥해 조금 움직이는 게 나을 성싶었다.
그렇게 녹스는 저택 안을 의미 없이 돌아다녔다. 그의 걸음은 곧았으나 정처 없었다. 목적 없이 저택 안을 돌아다니다 보니 적지 않은 사용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녹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다들 못 본 척 그를 지나쳤다. 녹스는 어쩐지 자신이 이 저택 안을 떠돌아다니는 유령 같은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스는 그렇게 1층과 꼭대기 층을 오가다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 다시 할리드의 방으로 향했다. 타박, 타박. 발걸음 소리는 오로지 녹스 하나 것이었다. 아니 하나여야 했다.
타다닥-
빠른 걸음 소리가 할리드의 방 쪽에서 들려왔다. 정확히는 할리드의 방 옆, 드레스 룸 쪽에서.
녹스는 계단을 마저 올라가 의아한 얼굴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그의 드레스 룸에서 나오고 있었다.
“…에나?”
“…노, 녹스?”
에나는 종종 녹스의 말동무를 하러 올라왔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녀가 방금 드레스 룸에서 나왔다는 게 문제였다. 주인의 드레스 룸은 본디 허락받은 사용인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으니까.
‘호기심에 들어가 봤나?’
크게 경을 칠 일이지만 제 눈에만 보였으니 괜찮을 듯했다. 녹스는 가볍게 일러 주기 위해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어쩐지 아이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아이는 무언가를 꼭 쥐고 가슴 깊이 안고 있었다. 아이에게 다가가던 녹스의 걸음이 멈칫 멈췄다.
“에나, 너 지금….”
아이의 손에 쥐어진 건 금반지 하나였다. 녹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언뜻 보이는 반지의 모양이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에나, 쉿. 진정해.”
녹스는 일단 침착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할리드의 명령으로 최상층엔 사용인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을 알고 있는 건 녹스뿐이라는 이야기다. 요 근래 어째서인지 부쩍 어두운 얼굴을 보였던 아이다. 녹스는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일단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자세를 낮추고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나쁜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어. 하지만 들키면 정말 큰일 날 거야. 에나. 이쪽으로 와. 그리고 돌려줘.”
에나가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녹스를 바라보았다.
“어, 엄마, 엄마 병세가 더 악화되었어요. 치료사 말로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이대로 이번 달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대요.”
“……에나.”
“그, 그래서. 그래서…….”
“쉬, 착하지. 괜찮아. 이 일은 아무것도 모를 거야. 아무도.”
녹스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부드러운 말씨로 말했다. 아직 수습할 수 있었다.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고 녹스는 에나를 고발할 마음이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벌인 실수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울먹이며 천천히 녹스에게 다가와 녹스의 손에 반지를 놓아두었다. 아니, 놓아두려 했다.
“두 사람, 뭐 하고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