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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94화 (94/158)

제94화

화들짝 놀란 아이가 손을 거두었다. 녹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녀장인 마를렌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인이 없는 층을 직접 점검하기 위해 나온 모양이었다. 마를렌은 두 사람을 살폈다. 그리고 곧 에나가 손에 쥐고 있는 금반지를 보았다. 마를렌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건 주인님의 것이잖니, 에나. 그게 왜 네 손에 있지?”

“그건…!”

녹스는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서둘러 두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입을 여는데 에나가 그에게 틈을 주지 않고 순식간에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가 노예에게서 빼앗았어요!”

에나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 있었다. 동공은 확장되어 있었고 입은 어설프게 올라가 있었다. 녹스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에나가 두 걸음 물러서며 마를렌에게 고했다.

“노예가 이걸 몰래 빼, 오는 걸 봤어요. 하녀장님…!”

녹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궁지에 몰린 아이가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충분히 이해하고는 있었다. 허나, 그로 느껴지는 배신감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나는 생각했다. 여기서 자신이 반지를 훔쳤다는 걸 걸리면 추천장도 없이 쫓아내질 게 뻔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약값은 앞으로 더, 더 필요할 텐데. 여기서 잘릴 수는 없었다. 추천장이 없으면 다른 가문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울 테다.

하, 하지만 녹스는. 녹스는 노예니까. 주인님이 아끼는 노예니까 괜찮지 않을까? 이기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히 지배했다.

“정말인가요?”

녹스는 잠시 굳은 채로 에나를 바라보았다. 에나는 녹스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고 하녀장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자신이 훔친 금반지를 마를렌에게 넘겼다. 마를렌은 반짝거리는 금반지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이건 무슨 반지지?’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는 반지였다. 그리고 그건 비아 가문의 인장이 아니었다. 금반지는 깨끗했지만 제법 오래되어 보였고 또, 눈에 익은 모양이었다. 일단 마를렌은 녹스에게 물었다.

“왜 반지를 훔쳤지?”

마를렌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어린 하녀의 반응도 이상했다. 하지만 녹스는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만약 이것이 거짓말이면 단박에 반박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는데도.

녹스는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무언가 콱 박힌 것도 같았다. 에나가 자신을 배신해서? 아, 맞아. 그나마 마음 붙일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에나였을 텐데. 그런 아이가 자신을 배신했다.

하지만 아이가 자신을 배신했음에도,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될지 뻔했으니까. 마치, 할리드처럼….

그래. 어린 날의 할리드처럼 쫓겨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녹스가 가볍게 헐떡였다. 어린 날, 숨넘어갈 듯 매를 맞던 어린아이가 떠올랐다. 녹스는 말 할 수 없었다. 그냥, 그냥…. 자신의 탓으로 넘기면 아이는 무사할 것이….

“이게 무슨 일이지?”

녹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할리드의 목소리였다. 이제 막 황궁에서 돌아온 할리드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러자 마를렌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곤 반지를 내밀며 말했다.

“그것이….”

할리드는 어째서인지 그 반지를 보자마자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빨리 말해.”

“노예가 이 반지를 빼돌리다 하녀에게 발각되었다고 합니다.”

“…이 반지를?”

할리드가 설핏 웃었다가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할리드는 그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단순한 금반지가 아니었다.

그 반지는, 황제가 녹스가 준 것이라며 제게 전달한 그 반지였다. 이젠 없는 라이네리오 가문의 반지 말이다. 할리드는 사납게 웃으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 와 녹스가 자신의 가문에 향수를 느껴 이 반지를 빼돌리려 했을 리는 없다.

할리드의 머릿속엔 방금까지 황제가 했던 말들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어릴 때의 실수였을 뿐이라고. 이제 다 정리된 일이라고 말했던 황제와 다르게 녹스, 너는 정리가 다 되지 않았던 것일까.

‘이젠 겨우 노예니까. 편리하게 다룰 수 있는.’

가벼웠던 황제의 말씨가 떠오른다. 할리드는 이를 악문 채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라이네리오의 반지라….”

할리드가 그 반지를 거두어 가며 말했다.

“네가 황제 폐하께 줬던 그 반지를 내가 가지고 있단 걸 어떻게 안 거지?”

녹스가 잠시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게 그 반지인지는 몰랐다. 다만, 그것보다 지금은 자신이 황제에게 반지를 준 적이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아는 것이 놀라웠다.

“…그걸, 어떻게.”

“하.”

할리드는 기분이 더러웠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기분이 더러웠고 이렇게 몰래 이 반지를 빼돌릴 정도로 녹스가 그에게 무언가 감정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거슬렸다.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했지?”

할리드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간 겪어 온 녹스의 성격을. 그렇기에 기회를 주듯 말했다.

“저는, 저는….”

“애초에, 네가 한 일이 맞나?”

녹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서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다. 에나의 사정을 말하고 그 아이가 훔쳤다고. 그 아이가 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녹스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예.”

“허.”

“제가, 제가 훔쳤습니다.”

에나가 입술을 꾹 깨무는 게 보였다. 녹스는 헛웃음을 켰다. 그것이 할리드에게 어떻게 보일지도 모르고. 에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녹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졌다.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할리드의 이마에 한 줄, 힘줄이 돋았다. 그는 속이 아주 뒤틀려 보였다. 그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엉켜 들었다.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냥, 오래전에 받아 뒀던 게 지금 생각났을 뿐이야.’

‘물어도 답해 주지 않을 거야.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니까.’

‘만약 녹스 쪽에서 날 먼저 원하면?’

‘어린 날의 실수라는 거지.’

그 모든 말들이 만드는 상황, 그리고 어리석은 짓인 걸 알면서도 황제에게 주었던 반지를 다시 손안에 쥐고 싶어 하는 녹스의 행동.

그 모든 것은 할리드의 머릿속에 일종의 ‘가정’을 만들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 그가 어쩌면, 펠티온에게 마음을 주었던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끔찍하고도 엇나간 가정을.

이성을 내다 버린 할리드는 녹스를 죽일 듯 바라보았다. 그래, 내 소유 안에 있지만 네 마음은 또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렇게 새삼 새로 일깨워 주는구나.

“채찍을 가져와.”

“예?”

마를렌이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 그러자 할리드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하인들을 전부 홀에 모아라. 그리고 채찍을 가져와.”

“예, 예…. 알겠습니다.”

“녹스.”

“예…. 윽!”

할리드가 녹스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목이 자연히 조여 와 녹스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몰라. 하지만 지금 넌 내 소유야.”

“그게, 윽. 대체 무슨 말….”

“됐어. 너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했으니까.”

할리드는 녹스의 멱살을 잡은 채 거칠게 아래로 내려갔다. 녹스의 걸음걸이가 절로 비틀거렸다. 계단을 내려갈 때에는 중심을 잡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그리고 홀에 닿았을 때, 할리드는 녹스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주인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녹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제대로 돌려줄 수 있게 되는군.”

할리드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분노에 들끓었다. 뒤늦게 저택의 사용인들이 무슨 일이냐며 몰려들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뒤로 ‘삐-’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녹스는 입을 달싹거리며 손을 덜덜 떨었다.

그래, 그날. 과거에 제 손에 의해 버려졌던 그날의 할리드의 몫을 이제야 내가 갚을 수 있게 되는 건가? 이것으로 그때의 내 죄가 조금은 가벼워질까.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그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날뛰었다. 사실은 난 잘못하지 않았다고. 방금 네가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최소한 지금 이 상황의 내겐 죄가 없다고. 내가 네게 잘못했을지언정….

이렇게까지 날 대해선 안 된다고. 넌 날 사랑했고.

“채찍을, 가지고 왔습니다. 공작님….”

“…….”

사실은 나도 널 사랑했노라고.

“저 노예를 붙잡아라.”

두 남자 사용인이 양쪽에서 녹스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할리드에게 등을 보이게 만들었다. 녹스는 숨을 헐떡였다. 내가, 내가 이런 취급을 받는 이유는 네게 죄를 지어서라고. 하지만, 할리드. 이젠 내가.

짜악-!

“윽……!”

할리드가 직접 그의 등에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몸이 움찔거리며 움직였지만 할리드는 망설이지 않고 채찍을 들었다.

짜악, 짝!

연달아 채찍이 내려쳐졌다. 하인들이 그 모습에 소곤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노예가 공작님의 물건을 훔치려 했다네. 뭐? 그럼 당연히….

저래도 싸지.

모두의 시선 가운데 녹스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할리드가 휘두르는 채찍에 맞고 있을 뿐이었다. 짜악! 소리와 함께 길고 가느다란 상처가 그의 등 위를 가로질렀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채찍은 잔혹하게 그의 등을 할퀴더니 기어코 피를 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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