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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95화 (95/158)

제95화

그의 등을 따라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할리드는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그의 등을 내리쳤다. 다른 쪽 손에 쥐고 있는 반지의 존재감이 너무도 컸다. 고작 이 작은 걸 가지겠다고 그 위험을 무릅쓴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큭, 읍…!”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 태도 역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프면 아프다, 비명을 지르고 자지러졌다면 채찍질은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익숙하다는 듯 혹은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 신음을 참으며 버티고 선 등에선 일종의 고집이 느껴졌다.

녹스는 어머니가 저를 때릴 때를 떠올렸지만, 할리드는 녹스가 이 반지에 가지고 있는 애착 따위로 해석했다. 두 사람은 특별한 일이 없다면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만 같았다.

짜악, 짝-!

“공작님…!”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하녀장 마를렌이 낮은 목소리로 허나 다급하게 할리드를 멈춰 세웠다. 할리드가 새파란 눈으로 대답했다.

“뭐지?”

“더 이상 때리면…. 죽습니다.”

할리드는 이성을 잃고 내리치던 채찍을 내리고 잠시 녹스를 바라보았다. 이미 반쯤 쓰러진 그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의 등에서 흘러나온 피는 바닥을 적셨으며 녹스의 등 피부는 전부 벗겨져 붉은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채찍 또한 녹스의 피로 축축해진 상태였다.

“허억, 헉….”

녹스는 여전히 양팔을 붙잡힌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반쯤 무너진 몸, 고개를 푹 숙인 채 헐떡이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할리드는 그 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느끼는 게 질투심인지 아니면 자괴감인지 혹은 배신감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어. 만약 과거에 2황자와 녹스 사이에 무언가 있었더라도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자신에게 배신으로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어째서인지 속에서 계속해서 울컥, 울컥 올라온다.

내가 너 하나만을 바라고 또 바라는 동안 넌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았었나? 그때 날 보던 눈빛은 그저 어린 하인에게 베푸는 온정이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순 없는데. 할리드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기어코 한 번 더 채찍을 내리쳤다.

짜악-!

“아윽…!”

숨만 헐떡이던 녹스의 입에서 이제야 비명다운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미 등은 걸레 짝이 된 후였다. 피부가 찢어지고 그 안의 붉은 속살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로 찢기고 찢긴 상처는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상처 사이사이서 피들이 꿀럭이며 상처를 벌려 내고 기어 나왔다. 그리고 뚝,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털썩.

결국 기절한 녹스가 바닥으로 쓰러졌고 녹스의 팔을 붙잡고 있던 하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설프게 그의 팔을 부축했다. 하지만 아예 정신을 잃은 자를 일으켜 세우기란 어려운 일이라서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못난 꼴을 보였다.

“물러나.”

사용인들은 이내 그의 명령에 따라 물러났다.

“제 방에 가둬 놔.”

마를렌이 입술을 꾹 물고 대답했다.

“예….”

“치료사는 따로 필요 없다.”

그러자 마를렌이 잠시 그를 한 번 올려다보다 곧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이후로는 내 허락 없이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알겠습니다.”

할리드는 핏덩어리가 뭉쳐 있는 채찍을 바닥에 내던지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지금 당장은 녹스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황제와 밀어를 속삭였을 녹스의 모습 같은 것이 머릿속에서 멋대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의 질투는 추했다. 너무도 추해서 새카맣기까지 했다. 그렇게 할리드가 자신의 방으로 사라지고 녹스는 하인들의 부축을 받아 원래 지내던 작은 방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대로 두기엔 등의 상처가 너무나 심했다. 하지만 치료해 주지 말라는 주인의 명이 있었기에 하인들은 저 심한 상처를 두고 그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를 침대에 엎드리게 뉘어 놓고 나가는 하인들 사이로 하녀장 마를렌이 서 있었다. 마를렌은 남들 모르게 약통 하나를 협탁 옆에 숨기듯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곧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양 사라졌다.

저런 심한 상처에 잘 들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것은 저것뿐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녹스는 기절한 상태로 계속해서 잠을 잤다. 몸이 한계에 다다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일어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그런 것인지는 녹스 본인도 잘 알지 못할 테다. 하지만 새벽녘쯤 녹스는 다신 뜨고 싶지 않았던 눈을 조용히 떴다. 문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훌쩍, 훌쩍, 훌쩍.

아이가 코를 먹는 소리였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녹스는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에나, 그 아이다. 자신을 배신하고 모르는 척했던 그 작고, 잔인했던 아이. 녹스는 침대에서 일어날 기운조차 없었다. 하지만 문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생생히 들렸다.

“미, 미안해요. 녹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가 잘못, 히끅, 했어요.”

아이는 온 힘을 다해서 용서를 빌고 있었다. 녹스는 여기서 자신이 화를 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나 그에겐 화를 낼 작은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은 모랫바닥처럼 퍼석퍼석하게 갈라지는 음성이었다.

“괜, 찮아….”

그 소리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차마 떠나가지 못하고 문 앞을 계속 서성이는 듯했다. 아마 열쇠가 없어서 들어오지 못하는 거겠지. 아니면 들어올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 못하거나.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녹스….”

“그러니, 에나. 가….”

“녹스 하지만….”

“에나.”

그는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이내 차갑고 짧게 툭 뱉어냈다.

“꺼져.”

흐윽, 아이의 울음이 목 끝까지 치받았지만 녹스는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참 동안 녹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에나는 문 앞에서 몇 번을 서성거리다 울며 사라졌다. 녹스는 에나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증오하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뇌가 미지근한 물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제게 말을 거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냥, 다 모든 게 전부.

녹스는 그렇게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이 찾아든다. 고통스러운 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제 의미 따위 없는 세상에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잠에 빠져들며 녹스는 느꼈다.

아, 이제 다 되었구나. 모든 게. 예전의 것도. 이제 전부.

* * *

그다음 날, 할리드는 황궁에 회의 일정이 있어 황실로 가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할리드가 황제에게 으르렁거리고 온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할리드는 복식을 챙겨입고 계단을 내려오다 저 멀리 있는 녹스의 작은 방문이 보였다.

“…….”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하녀장 마를렌이 답했다.

“노예는 저 방 안에 있습니다.”

“치료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할리드는 그 말을 끝으로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하루 정도 지났으면 치료해도 괜찮다는 말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련만 조금도 그런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마를렌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녹스의 방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이런 삶을 견딜 수 있나? 그녀는 항상 녹스를 보며 그리 생각해 왔다.

이걸,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있을까?

그녀의 의문은 곧 해결될 것이다. 곧.

본디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때, 아무도 무언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할 때.

* * *

황제는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무언가 보고를 받고 있었다. 오늘 있는 회의는 펠티온을 황제의 자리에 올려 준 귀족들의 정기적 회의로 현 정계의 모든 권력자가 모이는 정기 모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발티아스 데론이 또 참석하지 않는다 전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눈을 빛냈다.

“그놈이 지금 어디 있다고?”

그러자 황제의 시종이 눈을 내리깔고 보고했다.

“비아 공작저 부근에서 정기적으로 나타나 시간을 보내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짓일까.”

황제가 헛웃음을 켰다. 발티아스 데론. 자신을 위해 라이네리오 공작가에서 목숨을 걸고 정보를 물어다 준 고맙고도 안타까운 놈.

“오늘도 그걸 위해 정기 회의까지 빼먹었다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놈이 대체 내게 무얼 숨기고 있을까.”

할리드 비아에게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닐 거고. 그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그럴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때.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의 궁까지 들러 자신을 만나지 않고 돌아갔을 때. 그가 누구를 만났을 수도 있다.

그러자 곧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금 비아 공작저에 있으면서 그때 황궁에 있던 사람.

‘녹스.’

라이네리오 가문에서 정보를 빼 오던 발티아스 데론. 그리고 라이네리오 가문의 하나뿐인 외동아들이었던 녹스 라이네리오. 둘 사이에 무언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 겁 많은 발티아스 데론을 이렇게 움직이게 만들었나.”

펠티온은 자신의 턱을 짚었다. 아직까지 확실하게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사실이 계속 신경에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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