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녹스 라이네리오를 꾸준히 건드려 온 건 발티아스 데론이었어.’
그가 입술을 손톱으로 꾹 눌렀다. 손톱 모양을 따라 붉게 물드는 것을 모른 채 그가 사납게 웃었다.
그는 이번 한 번만 보아 넘어가겠다 생각하며 입술을 누르던 손을 떼어 냈다. 세 번, 그는 나름대로 자비로운 주인이었다. 그 정도의 기회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몰랐다. 이번 한 번이 마지막이 될 줄을.
황제의 시종이 집무실을 나서자 차례차례 그의 측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즈음에… 할리드, 그가 도착했다.
그의 측근들은 각자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비어 있는 자리를 곧바로 눈치챈 듯 서로 물었다.
“발티아스 데론 후작은 어디를 갔지?”
그러자 황제의 시종이 둘러댔다.
“몸이 좋지 않아 오늘 불참한다는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쯧, 벌써부터 이렇게 분열되어서야.”
“정말 몸이 좋지 않은 듯합니다. 다음에는 꼭 참여하겠다는 의사가 함께 도착했습니다.”
황제는 그 대화를 듣다가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느긋이 말했다.
“일단 시작하도록 하지.”
“예.”
그렇게 그를 뺀 다른 사람들끼리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보통 무력을 써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거의 의견을 내지 않는 할리드는 조용히 말들을 흘려듣고 있었다.
잠시 제 이름이 호명될 때나 시선을 움직여 상대방을 바라보았지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황제는 영 삐딱한 할리드를 보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녹스라는 존재 때문에 둘 사이가 삐거덕거리는 걸 느끼고 있는 참에 더 피로도를 높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번에 백작가를 무너뜨리고 그가 관리하던 영지는 전부 비아 공작의 소유로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다만 그곳들을 공작께서 직접 관리하시기에는 힘드실 듯하니… 관리할 사람을 따로 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있는 자들을 그대로 쓰는 것보단 새 사람들을 채워놓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엘러딘 바이스가 슬쩍 눈치를 살폈다. 아마 별거 없는 방계 인물 하나를 은근슬쩍 찔러 넣으려는 수작이겠지. 할리드는 그 모든 게 귀찮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다 정해서 서류만 올려.”
그러자 엘러딘 바이스가 방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러다 문득 할리드는 자신의 품 안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걸 느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마정석에 신호가 오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마정석은 총 세 개였다. 녹스의 감시를 맡은 감시병과 나누어 쓰고 있는 것과 녹스를 볼 수 있는 것. 그리고 황제와 연결된 것. 허나 황제와 연결된 것이 지금 울릴 리는 없고, 그건 녹스와 연결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녹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먼저 신호를 보낼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럼 남은 것은 녹스를 감시하는 감시병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할리드가 미간을 와작 찡그린 채 품 안에서 마정석을 꺼내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할리드 쪽으로 모였다. 할리드는 마정석에 마력을 불어넣고 물었다. 아니, 그가 묻기도 전에 비명이 터졌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공작 각하!”
“뭐?”
할리드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다시 물었다.
“각하의 노예가…! 끅!”
뚝.
그것을 마지막으로 연결이 끊겼다. 할리드와 황제는 똑똑히 들었다. 각하의 노예, 그것은 녹스를 뜻하는 말이다.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녹스가 뭐 어쨌다는 거지?”
할리드는 일단 녹스와 연결된 마정석을 꺼내 들었다. 그곳에 마력을 불어넣자 마정석 위로 빛이 퍼지며 커다랗게 녹스의 모습을 비추어 냈다. 그는 어째서인지 검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이게 무슨…!”
방금까지만 해도 할리드와 연결되었던 감시병의 몸에 꽂혀 있었다. 끄득, 쑥. 몸을 찌른 검이 쑥 빠져나오고 피가 순식간에 그의 뺨에 튀었다. 하지만 그의 몸과 셔츠는 이미 피투성이였다. 이미 몇 명의 사람을 베었다는 의미였다.
“기어코 탈출할 셈인가?”
그가 짓씹었다. 어제 채찍을 맞고 기어코 이곳을 무력으로라도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은 건가? 하지만 어제 그는 몇 대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채찍을 맞아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듯이 피를 흘렸다.
고작 어제,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그는 침대 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함이 옳았다.
하지만 할리드는 몰랐다. 녹스는 어릴 적 어머니에게 채찍을 맞은 다음 날에도 허리를 반듯이 펴고 사교계에 나서야 했던 것을. 녹스의 얼굴빛은 창백했고 또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녹스가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확인한 그가 자신이 바라보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정석이 그가 바라보는 곳을 비추었다. 그곳엔 가문의 인장이 없는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녹스는 스스럼 없이 그 마차에 올라탔다.
별달리 특별할 것 없는 마차 안에는.
“이리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들이 예상치 못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발티아스 데론 후작.”
녹스의 영상을 보고 있던 모든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발티아스 데론…?”
“저놈이 왜?”
녹스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발티아스 데론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도망갈 수 있게 도와준다고 했었으니까.”
“…….”
발티아스 데론은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 * *
녹스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등 전부가 불로 지진 듯, 칼로 찌른 듯 뭐라 정확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안한 표정으로. 마치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그는 자신의 등에 들러붙어 있는 셔츠를 떼어 내듯 벗었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딸려 있는 작은 옷장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자신이 맨 처음 입고 왔던 옷. 검은 조끼, 그리고 약간은 바래진 셔츠. 그 옆으론 구두까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금까진 이 방의 옷장을 열어 볼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 과거에 제가 입었던 옷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지금 입고 있는 옷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급 소재의 옷은 과거 자신이 있었던 위치를 다시금 떠오르게 해 주었다. 녹스는 아랑곳 않고 나머지 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 옷을 입기 시작했다. 다시는 입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그 옷을. 녹스에게 지금 이 옷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덜컥, 밖에서 잠긴 문은 분명 귀찮은 걸림돌이 되긴 했지만.
쾅!
어느 정도 검술과 처세술을 익힌 녹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런 작은 자물쇠 따위. 녹스는 그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새로 갈아입은 셔츠의 등 뒤가 벌써부터 피로 젖어 들었다. 돌아다니던 사용인이 놀라 화드득 달아났다. 아마도 집사나 하녀장에게 알리기 위해 가는 모양이었다. 녹스는 그것을 무시하고 저택의 정문을 통과해 경비병들이 지키고 선 창살 문 앞에 섰다. 그들이 녹스를 알아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곳에 나와 있지?”
“공작님께서 바깥으로 나오지 말란 명령을 내리신 것 같은데.”
그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녹스를 다시 저택 안으로 돌려놓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 났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 녹스가 상대방이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고 단번에 목을 친 것이다. 툭, 하고 동료의 목이 떨어지고 나서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다시 한번 검이 경비병의 가슴에 꽂혔다. 검이 폐에 꽂혔는지 그 경비병은 컥 소리와 함께 피를 토해낸 뒤 그대로 고꾸라졌다. 녹스는 눈을 한 번 도륵 굴렸다. 날 뒤쫓아 다니는 감시병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감시병을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제게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녹스는 기민하게 눈치챘고 그가 할리드에게 연락하는 틈을 타 그에게 따라붙어 그대로 제압했다.
할리드와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해도 저랑은 상관이 없었다. 저들은 자신이 도망갈 줄 알고 성벽을 지킬 테지만 녹스가 갈 곳은 다른 곳이었으니까.
그는 죽어 버린 눈동자로 자신이 죽인 경비병들을 바라보다 이내 끼익, 하고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마차를 발견했다. 녹스는 그것이 누구의 마차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언젠가 제게 도망치라고 이야기하던 남자. 그 어떤 신호도 주지 않고 그 말만을 두고 사라져 버린 남자. 발티아스 데론.
녹스는 그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곧장 말했다.
“이리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는 말이 없었다.
“내가 도망갈 수 있게 도와준다고 했었으니까.”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성문을 향해 가는 것이리라. 녹스는 슬며시 웃었다. 하지만 눈이 거멓게 가라앉아 미소처럼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얼 말이냐.”
“도망가게 해 준다는 말만을 남긴 당신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아 공작가에 첩자를 심은 건 아닐 테고. 아마도 내가 언젠가 홀로 밖으로 나오리라 믿었던 거겠죠.”
녹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쥐새끼처럼. 주변을 전전하면서. 먹이 하나를 받아먹기 위해.”
“네놈….”
“그러다 보니 계속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