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
“그대가 왜 이렇게 나의 탈출에 정성을 들일까.”
“그건….”
“나를 버린 황제와 다르게 나름대로 도움을 준 내게 은혜를 갚는다고 보기엔 좀 과한 감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계속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째서 당신이 나를 탈출시키지 못해 안달인지. 왜 자꾸, 날.”
녹스의 눈매가 얇게 뜨였다.
“눈앞에서 없애 버리고 싶어 안달인지.”
녹스는 이어 말했다. 자신의 목에 무엇이 달려 있는 줄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만약 할리드가 이 대화를 본다면 보는 것이고 보지 못한다면 그것대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곧 이 지긋지긋한 것들을 모두 끝낼 생각이기 때문에.
“당신이 세운 공. 그거 당신이 한 게 아니지?”
“…무슨 말을!”
그가 역정을 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녹스는 뺨에 묻은 피를 소매로 훔치며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황제가 날 이용하고 버린 줄 알았지. 어차피 라이네리오 가문은 도로 쓸 수 없을 정도로 황태자파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었으니까.”
녹스는 일어선 그를 보며 설핏 그를 비웃었다. 아니, 자기 자신을 비웃는 얼굴이기도 했다.
“내가 넘긴 자료들을 네 공으로 하고 라이네리오라는 가문 자체를 없애 버린 거라고 생각했어. 아버지는 죽음으로. 나는 노예로.”
녹스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런데, 황제가 날 버린 게 아니었다면?”
발티아스 데론이 발작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쥐었다.
“내가 지금까지 네게 넘긴 정보들이, 습격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린 밀서가 애초에 녹스 라이네리오가 아닌 발티아스 데론의 이름으로 들어간 거라면?”
“아니야!”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녹스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대비는 너무나 또렷했다.
“그저 내가 멍청하게 널 믿고 있었던 거구나.”
녹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네가 내 공을 가로챘기에 날 자꾸 눈 밖으로 쫓아내고 싶었던 거야. 그대는.”
발티아스 데론이 헐떡였다. 그는 시뻘건 눈을 한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곧 하하 웃었다. 쩌렁쩌렁 마차 안이 울리도록.
“그래서, 네가 뭘 어쩔 거지? 이제 와 노예로 알려진 네가 뭘 할 수 있겠느냔 말이야. 이대로 곧장 황제에게 가 소상히 알릴 건가? 믿어 줄 턱이 없지! 넌 그 뱀 같은 라이네리오 공작과 한 핏줄이니까!”
“상관없어.”
“뭐?”
마치 그의 열기를 식히듯 쫙 끼얹어진 차가운 음성에 발티아스 데론이 말을 뚝 멈추었다.
“이젠 상관없다고.”
녹스는 마차에서 일어나 자신이 쥐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돌려받고 싶은 것은 없어.”
또.
“내가 해야 할 것은 전부 다 했어.”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
“너, 너 설마….”
발티아스 데론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알아챘어도 이미 늦었어.”
녹스는 검을 틀어쥐고 발티아스의 목을 콱 쥐었다. 그가 발버둥 쳤지만 제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비쩍 말라 빠진 인사였으니. 좁은 마차 안에선 도망칠 곳이 없었다. 발티아스 데론의 갈비뼈 사이로 검이 쑤욱 밀고 들어갔다.
후드득,
비명은 터지지 못했고 피는 흘러 바닥으로 쏟아졌다. 녹스는 쓰러지는 발티아스의 몸에서 검을 뽑아 들고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다시 한번 검을 치켜들었다.
“난 운이 나빴고,”
발티아스를 내려보는 녹스의 눈은 그저 검게 타 있을 뿐이었다.
“너도… 그냥, 운이 나빴을 뿐이야.”
콰직!
그의 머리에 검이 꽂혔다. 머리가 부서지고 두개골이 갈라져 피와 뇌수가 섞인 액체들이 질질 흐르기 시작했다. 녹스는 마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래 가고 싶었던 목적지를 불렀다.
“폐쇄된 라이네리오 가문의 저택으로 가.”
마차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마부는 의아해하면서도 빠르게 말을 돌려 라이네리오 가문으로 향했다. 녹스는 피투성이인 채로 마차 소파에 기대앉아 팔과 다리를 늘어뜨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베이고 찢긴 등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열기까지. 전부 다.
* * *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엘러딘 바이스가 지금까지 전해진 영상을 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와 할리드는 물론이고, 그 외 모든 사람이 입을 크게 벌린 채였다.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발티아스 데론이 지금까지 넘겨 왔던 정보가 전부 녹스 라이네리오의 것이라니요!”
황제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가만히 영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녹스의 행동.
녹스가 검으로 발티아스의 가슴을 찌르고 이어 머리를 박살 내는 장면이 그들의 눈에 담겼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잠깐, 잠깐. 급습이 있을 거라고 알려 주었던 것이 녹스 라이네리오였다면 그는….”
노예가….
“조용!”
황제가 소란스러움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내가 지금 들은 소리가 도대체 무슨 말이지? 할리드, 할리드. 자네는 이해가 가나?”
할리드는 굳어 있었다. 그 어떤 표정이나 말도 내보이지 못한 채 멍청이처럼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제 마음 깊숙한 곳에 있던 불안감이 나지막이 제게 속삭였다. 영원히 가질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 네 품 안을 빠져나갈 것이라고. 그런 것들이 미친 듯이 그의 심장을 울려 댔다.
“가, 가야…. 가야 합니다.”
할리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소파의 팔걸이를 짚었다. 그는 지금 분명 폐쇄된 라이네리오 가문의 저택으로 간다고 했다. 할리드는 미친 듯이 불안했다. 그 높고 넓은 저택에서 그가 무엇을 할지 미친 듯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황제의 집무실에 모인 자들은 이어지는 영상들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상황은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 *
오래간만에 보는 라이네리오 가문의 저택은 볼품이 없었다. 정원은 손질되지 않아 마치 더러운 머리카락들이 엉켜 있는 것처럼 보였고 쇠창살 문은 낡은 쇠사슬로 묶어 놓아 그보다 더 지저분했다. 마차를 몰던 마부는 녹스가 피투성이로 내리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발티아스 데론, 그도 사람 복은 없는 모양이었다.
철컹!
녹스는 검을 들어 녹슨 쇠사슬을 잘라 냈다. 한때는 라이네리오 기사단의 단장이었으니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끼이익, 하고 오래된 쇳소리가 들렸다. 녹스는 정원에서 저택 정문까지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아, 결국엔 이다지도 망가지기 쉬운 것을. 마치 자신처럼.
녹스는 이 저택과 자신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문을 열고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먼지가 가득 쌓인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라이네리오 저택은 총 다섯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가장 높은 층을 어머니께서 쓰고 계셨다. 녹스는 자신의 방이 아닌 어머니의 방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주 간만에 어머니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아….”
방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병색이 완연해질수록 패악을 부리곤 했으니까. 그는 천천히 그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의 마지막이 어땠을지를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그때 일 이후로 녹스의 머릿속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희미해진 상태였다.
발티아스 데론이 어머니를 죽였다고 했을 때, 살려 달라 빌었다는 그 말을 했을 때. 그때부터 어머니는 자신이 아는 어머니가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녹스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검을 침대 위로 던지고 피가 튄 재킷을 벗었다. 뺨에 튄 핏자국을 지우고자 문질렀더니 도리어 번지기만 했고 흰 셔츠로 튄 자국들은 아예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최대한 정갈하고 싶었다.
이제 자신의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그 마지막엔 결국 엉망이 되겠지만 지금만큼은 과거 자신이었던 녹스 라이네리오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부정하고 부정했지만 결국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인 녹스 라이네리오. 그것이 필요했다.
녹스는 곧장 어머니의 방에서 가장 큰 창문을 찾아 그 창틀에 다리를 올렸다. 그 아래를 내려다보니 화단과 화단 사이를 나누는 뾰족한 창살이 보였다. 녹스는 그 아래를 보며 안도했다. 두 번째 기회까지 필요 없겠구나.
그는 다시 한번 제 옷을 정리했다. 피가 튄 팔의 셔츠를 걷고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모든 것들을 창틀에 올려놓았다.
하늘이 보였다.
녹스는 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에 대한 원망조차 없었다.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쁜 것 같지도 않았다.
녹스는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어쩌면 보고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 또한.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어.”
녹스는 마지막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창틀에 발을 올렸다.
그는 어머니의 방을 한 번 돌아보았다. 긴 시간도, 누군가의 비명도 필요 없었다. 그에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제가 내던지려고 하는 건 그저 한때 살아 있었던 자의 몸뚱어리일 뿐이었다.
그가 허공을 밟았다.
몸이 기울어진다.
바닥이 꺼지는 감각이 들었다.
날리는 암녹색 머리카락.
영원일 것 같은 찰나.
그리하여.
추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