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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99화 (99/158)

제99화

지금까지 했던 일을 용서받아야 했다. 아니, 용서받지 못하더라도 용서를 빌어야 했다. 네가 그렇게까지 괴로워하고 있을 줄을 몰랐다고. 아니, 알고 있었으나 외면하고 있었다고.

네가 아픈 것이 네게 나를 더 새겨 넣는 방법인 줄 알았다고. 거기까지 생각한 할리드는 문득 생각을 멈췄다.

결국 다 변명일 뿐이었다. 그는 씁쓸하게 미간을 구기고 주먹을 꽉 쥐었다. 황제는 그런 그에게 답했다.

“…깨어나기 전까진 내가 황궁에서 돌보도록 하지.”

“부탁드리죠.”

“그리고 할리드.”

“무엇입니까.”

황제는 어렵사리 입술을 열었다.

“지난번에 했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어.”

“……발티아스와의 대화에서, 짐작, 하고 있었, 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황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녹스가 말했던, 황제가 자신을 먼저 버렸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라이네리오 가문 내부의 정보를 빼돌려 왔던 건 발티아스가 아니라 녹스였을 테니까. 발티아스가 죽어 버렸으나 스스로 전부 말하고 죽었으니 그것을 의심할 일은 없었다.

할리드는 주먹을 꽉 쥔 채로 물었다.

“제게 왜 그런 거짓을 말씀하셨습니까.”

“내, 내…. 멍청한 질투심 때문이었지.”

그때 할리드가 몸을 확 틀고 황제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콱 밀쳤다. 곁에 있던 치료사가 무엄하다 소리쳤지만 할리드의 푸른 눈동자엔 분노가 가득했다. 그 분노는 황제를 향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향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가.”

그의 목소리는 북받쳐 있었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마치 잔뜩 운 사람처럼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

“무슨 짓을 했는데.”

할리드는 차마 말할 수 없다는 듯 멱살을 쥐었다가 밀치듯 손을 놓았다. 할리드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사실 여기서 펠티온의 탓을 하기엔 자신도 너무나 멀리 와버렸다.

자신이 그에게 한 짓을 보라.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 전부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지금 자신이 그에게 한 짓은 개짓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할리드는 조용히 자신의 눈을 가렸다. 눈물이 흐를 법도 하건만 눈가는 버석했다. 검이 있다면 자신의 몸을 찌르고 싶었다. 녹스가 떨어지며 꿰뚫렸던 그 자리를 그대로. 그렇게 하면 그나마 네 심정이 이해가 갈까.

‘아니, 아니겠지.’

할리드는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는 거칠게 호흡을 뱉으며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 나갔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얼마나 멍청했는지. 또, 얼마나 잘 휘둘렸는지에 대해 곱씹었다.

셔츠 깃이 구겨졌지만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녹스를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암녹색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 위로 흩어져 있었다. 펠티온은 그 머리를 정리해 주려다 곧 손을 거두었다. 그에게 도저히,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구렁텅이에 그를 밀어 넣은 것은 할리드일지도 모르겠으나 목을 조른 건 틀림없이 자신이었다.

“그리고.”

“…또 뭐가 남았습니까.”

할리드가 으르렁거리며 발음을 짓씹었다.

“그날, 녹스는 도망치려 한 게 아니야.”

할리드가 순간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나도 나중에 알았지. 그는 도망치려 한 게 아니라 살아남은 피붙이 하나를 도망시키기 위해 성문으로 향했던 거야.”

“…그 말은.”

할리드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맞아, 도망치려 한 적 없어.”

“왜, 왜 말하지 않았….”

“그대가 알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니, 사실은…. 속이고 싶었어.”

황제는 자조적인 미소를 입에 올렸다. 할리드는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녹스의 숨통을 쥐고 흔들었던 그 모든 일이 자신의 오해라니.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거라니.

할리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쌌다. 그대로 힘을 주니 숨이 막혀 왔다. 그가 한 번 한 번 내뱉는 것이 어려웠을 숨이.

할리드는 결국 기어코 후회를 흘렸다. 한 줄기 툭 떨어지는 눈물은 기만이리라. 어찌나 꼴사납던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했는지 깨닫게 된 남자에게 눈물을 흘릴 자격 따윈 없었다.

“허억, 허….”

할리드는 자신의 목을 조르던 손을 내려놓았다. 고작 이 정도로도 숨이 막히는데 그는 어땠을지 떠올리게 된다. 온 세상이 자신을 망가뜨리기 위해 덤벼드는 게 어떤 느낌인지 할리드는 모를 것이다.

어린 자신이 세상에 홀로 섰을 때와는 또 다른 것일 테다. 자신은 누군가의 손길을 받았지만 녹스는, 그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저 제 목을 쥐어 잡고 조르는 손들만이 있었을 뿐.

녹스는 구원받을 틈 없이 자신의 품 안에서 뒤틀리고 뒤틀리다 결국 몸을 던졌다. 그의 심정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알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할리드는 주제넘게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 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할리드가 사납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절 거짓으로 속이고 진실을 가린 값은 녹스에게 갚으십시오.”

“…….”

황제는 길게 침묵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할리드는 창백하게 시신처럼 누워 있는 녹스를 가만히, 조용히 내려다보다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갔고 황제와 치료사만이 방 안에 남았다.

“나가.”

황제의 한마디에 치료사는 고개를 깊게 숙이고 바깥으로 나갔다. 황제는 의자를 끌어다 침대 가까이에 앉았다. 그리고 평온히 자는 것 같은 녹스를 바라보며 속으로 몇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쩌면 응답해 주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마음에서.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몸을 던졌다.

그가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살아야 할 이유라면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든 만들어 볼 테니 제발. 눈을 떴을 때. 다시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부관.”

그의 부름에 대기하고 있던 부관이 답했다.

“예.”

“성문 밖으로 도망간 라이네리오의 어린아이를 찾아.”

“도망간 라이네리오의 어린아이라 하심은?”

“그때, 녹스가 도망시켰던 그 아이.”

“알겠습니다.”

황제는 그 명령만을 내리고는 새하얗게 질려 있는 녹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미지근한 온도는 여전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자의 온기. 그저 이 세상에 붙들려 있기만 한 그 자그마한 온기에 황제는 손가락을 끌어다 관절에 입 맞췄다. 찡그려지는 눈가로 가증스럽게도 눈물이 맺혔다.

“내 몰랐어….”

황제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날 살린 줄, 미처 모르고 있었어.”

황제가 눈을 감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대가 날 한 번 살렸으니.”

그의 눈엔 고집스러운 빛이 비쳤다.

“나도 그대를 살리지.”

그게 그대가 원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하지만 그의 기도에도 녹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사흘, 나흘,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록.

* * *

후두둑, 후두둑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수도 밖의 외진 마을에선 외부 손님을 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오늘, 커다란 로브를 쓴 장신의 사내가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마을의 유일한 여관을 하는 로버튼은 자신보다 머리 한 개 반은 큰 남자를 보고 긴장했다.

“무, 무슨 일이요?”

“방 하나, 목욕은 나중에.”

“예? 예에, 가, 감사합니다. 손님.”

덩치가 큰 손님은 금화 하나를 내던지고 곧장 열쇠를 들어 방으로 올라갔다. 거스름돈은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외지인이라 여기 물가를 모른다고 생각한 여관 주인은 거스름돈을 날름 받아먹을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올라가서 짐만 풀고 곧장 내려왔다. 로버튼은 훅 굳었다. 혹시 주지 않은 거스름돈을 받으러 온 걸까.

덩치 큰 외지인은 그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거스름돈을 깜빡…!”

“여기에 유명한 약초사가 있다지.”

“예, 예?”

“유명한 약초사.”

“아, 도타 할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도타 할멈?”

“예, 예. 올해 구십이 되는 어르신인데 어찌나 건강한지. 전부 약초를 달여 먹고 그렇다고들 해서 가끔 수도에서도 찾아오십니다.”

“안내.”

“아, 안내 말입니까?”

“그래.”

“하, 하지만 제가 여기 일을 봐야 해서.”

“거스름돈은 됐어.”

“어이쿠, 그러면 가야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로버튼은 허둥지둥 비가 올 때 입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바깥으로 나섰다. 외지인, 할리드는 여관 주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늦은 밤이라 깨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괜찮아.”

그렇게 마을에서 한참을 걸어 외곽으로 나왔을 때, 저 멀리 나무 집이 보였다. 나무 집은 작았지만 제법 따뜻해 보였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았을 때, 아직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밤중에 찾아가면 욕을 해 대며 신발을 던지는 터라. 아차.”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살펴 오십시오!”

여관 주인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할리드는 작은 나무 집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

하지만 안에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쿵쿵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할리드는 검 손잡이를 잡았다. 안 되면 문을 부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막 검을 빼 들었을 때.

“누구…. 꺄아악!”

안에서 누군가 나왔다. 그리고 검을 빼든 할리드를 보고 혼비백산하며 뒤로 물러섰다.

우당탕, 쿵탕. 낮은 테이블에 엎어진 여자가 서둘러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나 싶더니 이내 주방으로 뛰어가 넓적한 요리 도구를 꺼내 들었다.

“여, 여기 도둑이야! 강도야!”

할리드는 난리를 치는 여자의 목소리와 얼굴이 어쩐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곧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에 설마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에타?”

그러자 난리를 치던 여자가 손을 뚝 멈추었다.

“…당신, 나를 어떻게 알아?”

할리드는 후드를 벗었다. 비에 젖어 눅눅해진 백금발, 그리고 새파란 눈. 그것 외엔 어릴 적의 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에도 마에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누구세요?”

할리드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할리드.”

“하, 할리드? 네가? 그 자그맣던?”

“그래.”

“네, 네가 살아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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