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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00화 (100/158)

제100화

“…나도 여기서 보게 될 줄 몰랐는데.”

할리드가 낮은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약간의 침묵은 그가 당황했다는 의미였다. 마에타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람이 할리드라는 사실에 제 정신을 챙기기도 힘들어 보였다.

“내, 내 정신 좀 봐. 드, 들어와! 차를 내어 줄게. 이렇게 비 오는 날에 무슨 일이야, 정말.”

마에타는 손에 들고 있던 요리 도구를 뒤로 감추며 민망한 듯 안으로 그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낮은 테이블의 의자에 그를 앉히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 우당탕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할리드는 제 키에 잘 맞지 않는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마에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도 제법 나이가 있던 탓에 크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녀가 저를 못 알아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에타는 주방에서 조금 더 달그락거리다 나무 컵에 차를 하나씩 내왔다.

“네가 이렇게 잘 자랐을 줄 몰라서 당황했어. 이런 외진 마을까진 무슨 일이니?”

“유명한 약초사가 있다길래.”

할리드는 이제 자연스럽게 입에 붙은 하대를 입에 올렸고 마에타는 잠시 나무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입고 있는 옷들은 하나같이 보통 고급 옷이 아니었다.

마에타는 눈치껏 그것을 모르는 척 넘겼다.

“아…. 도타 할머님 말이구나? 할머님은 오늘 잠드셨어. 아침 다섯 시에나 깨실 거야.”

“기다리겠다.”

“기다리겠다고? 무슨 급한 일이야?”

할리드는 자세한 설명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마에타는 조금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결국 옛정에 지고 말았다.

“그럼 내일 아침에 할머님을 뵙고 바로 떠날 거니?”

“그래.”

마에타는 그에게 담요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할리드는 그걸 받아 다른 의자 위에 올려 두었다. 어차피 모닥불이 따끈하게 타오르는 상황이라 딱히 필요하지 않을 듯했다.

유명한 약초사를 찾아왔더니 마에타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마치 자신이 마에타를 만나야 한다는 것처럼, 그녀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할리드는 평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선 어쩐지 물어봐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에타에게 물었다.

“어쩌다 여기에 있지?”

“음….”

그녀가 쓰리게 웃었다. 현재 마에타는 할리드가 공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긴, 이런 시골 마을에선 외부 소식을 잘 듣지 못하기 마련이니.

“라이네리오 가문이 망하고 사용인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갔어. 그리고 나도 그중 하나였지.”

마에타는 이 마을에 온 후 죽은 듯 살았다. 고약해 보여도 마음씨 좋은 도타 할멈이 아니었다면 이 마을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없었으리라.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숨겨야 했던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 그런지 꽤 후련해 보였다.

“병 때문에 화를 내시고 패악을 부리시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내는 분이셨으니까.”

“…그랬나?”

할리드는 녹스의 어머니 올가를 떠올려 보았다. 녹스와 닮은 얼굴. 하지만 전혀 다른 성정. 그리하여 남은 것은 자신을 채찍질할 때 차갑게 내려다보던 그 암녹색 눈동자밖에 없었다. 할리드의 침묵에서 무언가를 읽은 마에타가 부리나케 말했다.

“내, 내가 눈치 없는 말을 했다. 그래, 그때 기억은 네게도 좋은 게 아니었겠지.”

“…….”

할리드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마에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넌, 잘 지냈니?”

“잘 지냈다고 하면 잘 지냈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어.”

“그래, 너도 너 나름대로 고생이 많았겠지. 지금은…. 뭘 하는진 모르겠지만 좋은 곳에서 지내고 있는 것 같구나.”

그 말에 할리드가 속으로 비딱하게 웃었다. 그때 마에타가 말했다. 할리드가 전혀 모르는 말을.

“도련님께서 널 한 번 찾았었는데 전혀 찾을 수가 없었거든. 혹시 기사라도 된 거니? 도련님께서 주신 추천장으로 어디 먼 귀족가에서 하인 노릇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잠깐.”

할리드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녹스가 나를 찾았다고?”

“어?”

“추천장을 써 줬다니?”

“하, 할리드. 녹스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어.”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너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쫓겨나고 나서 일 년 후쯤 널 찾으셨어. 물론….”

대답과 함께 마에타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마님께 들켜서 채찍질을 당하셨지만….”

“채찍질?”

“뭐라고 해야 할까….”

마에타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할리드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컵을 꽉 쥐고 있었다. 가볍게 떨리는 손은 금방이라도 나무 잔을 부술 것 같았다.

“할리드, 넌 도련님과 특별한 사이였어. 맞지?”

“…….”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그때 당시에 도련님이 너만 특별 대우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

할리드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때 두 사람은 정말 순수하게, 서로를 아끼던 사이가 맞았으니까.

“마님이 그걸 아셨어.”

마에타는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먼 옛이야기를 전했다. 그가 진작 알았어야 할 옛날 이야기들을.

“더러운 남편도 그리고 아끼는 자식도 네게 빠져 있다는 사실을, 마님은 참을 수 없어 하셨어.”

마에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도련님은 널 공작님의 손아귀에서 빼내려 했었고. 비록 그 방법이 좋은 방법이었다곤 할 순 없지만….”

마에타는 무릎 위 두 손을 꽉 쥐었다.

“도련님이 세운 계획에 마님이 끼어드는 건 없었을 거야. 만약 도련님 뜻대로 됐다면 네가 그렇게 처참하게, 쫓겨날 일도 없었겠지.”

물론, 결국 도련님께서 널 쫓아낸 건 맞지만 그런 비극을 원하신 건 아니라는 말이야. 마에타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럼에도 할리드는 그녀가 하는 말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녹스가 자신을 쫓아낸 게 그런 이유라고? 내가 걸레짝이 되어 쫓겨난 게 녹스의 의지가 아니였다고.

그리고, 자신을 찾으려다 똑같이 채찍을 맞았다고. 할리드의 커다랗게 떠진 눈이 풍랑을 맞은 배처럼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네게 할 말은 없겠지. 네가 쫓겨나는 데 아무런 말도 못 했으니까.”

마에타가 안타까운 눈으로 말했다.

“하지만 도련님을 너무 미워하진 말아. 그때, 도련님도 너무 어렸어. 그게 네게 위안이 되진 못하겠지만.”

“…….”

할리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멀거니 바닥만 바라보았다. 들어선 안 될 것을 들어 버린 기분이기도 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을 진전시키고 싶지 않은 듯 머리는 딱딱하게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녹스는 라이네리오 공작의 손아귀에서 자신을 빼내기 위해 저를 내쳤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 사이에 올가가 끼어들어 저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가 자신을 다시 찾았다는 사실도 그는 오늘에서야 처음 안 것이다.

누군가 머리를 세게 한 대 치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녹스가 날 찾았다고….”

그래서 그 귀한 몸에 그렇게 채찍 자국이 남을 때까지 채찍을 맞았다는 사실에 온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리가 식었다. 그 귀한 몸에 채찍질을 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숨을 멈추고 한 손으로 제 눈가를 가렸다.

마에타는 그걸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꾹 쥔 주먹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도련님은, 녹스 도련님은 혹시 돌아가셨니?”

“그는….”

거기선 살아남았지만 결국 스스로 몸을 던졌어. 할리드는 입을 열었다가 결국 다물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신의 아래에서 무슨 짓을 당했는지. 할리드는 차마 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무릎 위에 올라간 두 손을 꽉 쥐었다.

“…하긴, 너도 자세히 아는 건 없겠지. 미안해.”

“…….”

할리드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에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가게?”

“…잠시 머리를 좀, 식히고 오지.”

“그래, 너도 생각이 많겠지. 차를 새로 끓여 올게. 다녀오렴.”

끼익, 할리드가 오래된 나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섰다. 비가 오고 찬 바람이 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마가 뜨끈뜨끈했다.

녹스, 녹스 라이네리오. 네가 내게 해 준 게, 나를 위해 움직인 게 몇 번인지. 그리고 그걸 난 왜 전혀 몰랐는지.

그는 빗물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참을 서 있었다. 머리가 조금도 식혀지지 않았다.

‘내 예쁜 할리드.’

어렸을 적 녹스가 자신을 부르며 손을 뻗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마지막에 내뱉었던 모진 말들도 결국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게 속을 후벼 팠다.

그때 네가 그 말을 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왜 그때 난 내 감정에 매몰되어 네 표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을까.

녹스 라이네리오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데. 지독한 무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으면 않았지, 억지로 거짓을 말하던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때의 나는, 널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게 속을 콱하니 막았다.

할리드는 자신이 녹스에게 지금까지 무슨 짓을 했는지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눈매는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빗속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옆으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녹스….”

너무 늦었지만 제발,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하늘에 기도했다. 네가 눈을 뜨기를. 그리하여 어리석은 내게 불같이 화내더라도 네 앞에서 무릎 꿇고 빌 수 있기를 소원한다.

그는 녹스가 눈을 뜨기를 바랐다. 자신을 저주하고 경멸해도 좋으니 그 검게 탄 눈만이라도 다시 보여 주길, 빌고 또 빌었다.

그것이 녹스 라이네리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 될지도 모르고. 다시 눈 뜬다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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