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차도는?”
“없습니다.”
“그런가….”
펠티온은 자신의 부관에게 녹스의 상태를 보고 받으며 복도를 걸었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는 녹스가 그렇게 된 뒤, 곧장 발티아스 데론 후작저부터 급습하여 뒤집어엎었다.
발티아스 데론이 후작이 된 후 어떻게 가문을 관리했는지를 살펴보니 절로 의문이 들 정도였다.
고작 가문을 다스리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가 그때 그렇게 치밀하게 정보를 빼 왔다고? 그릇이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자신을 구했다 믿은 거지?
왜 그걸 지금까지 몰랐을까. 펠티온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발티아스 데론의 저택을 뒤엎던 중 금고 하나가 발견되었다.
발티아스의 침실 액자 뒤에 숨겨져 있던 금고엔 알 수 없는 서류들이 가득했다. 거기엔 라이네리오에서 빼 온 것 같은 자료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는데 문제가 있다면.
‘발티아스 데론과 필체가 다른데.’
내용은 다 아는 것이었다. 발티아스 데론이 제게 다 알려 준 내용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필체가 다를까. 황제는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라이네리오 공작가에서 압류한 서류들을 살폈다.
필체가, 같았다.
끝을 뾰족하게 빼는 정갈한 필체는 녹스 라이네리오의 것이었다. 그 글씨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정보가 녹스의 것이라는 걸 명확히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러나 늦었다. 너무도 늦어 버렸다.
황제는 생각했다. 자신이 어리석었노라고. 그리고 너무 늦었노라고.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녹스가 치료받고 있는 치료실로 향했다.
치료실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녹스의 몸은 전부 회복되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직까지 의식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황제는 황궁의 모든 치료사를 불러 그를 치료하게 했지만, 진전은 조금도 없었다.
“오셨습니까. 폐하.”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문에 치료사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펠티온은 그에게 눈길을 한 번 주고는 안쪽에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곳엔 녹스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황제는 눈을 찌푸리며 웃곤 침대 앞 의자에 앉았다.
“평온해 보이는군.”
그건 죽은 사람 같다는 의미였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펠티온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지금이 가장 평온한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지금이?”
황제는 희게 질린 녹스의 뺨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뺨 근처까지 다가간 손끝은 차마 닿지 못하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에게 닿는 것조차 지금의 자신에겐 죄악이리라.
“…눈을 떠.”
황제가 힘없이 속삭였다.
“그래야 내가 네게 갚지….”
황제는 기도하듯 두 손을 쥐고 고개를 숙여 이마를 대었다. 자신의 손은 차가웠고 이마는 뜨거웠다. 온기가 미지근하게 옮겨 갔다. 그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미동도 없는 녹스를 한 번 내려다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치료실을 벗어나자 그의 뒤편으로 보좌관들이 따랐다.
“내가 시킨 일은?”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녹스의 핏줄이야. 겁먹지 않게 해. 상처 나는 일도 없게 하고. 다시 녹스에게 돌아갈 아이니까.”
“예, 아. 그리고.”
“뭐지?”
“할리드 비아 공작님께서 돌아왔습니다.”
“할리드가?”
“예.”
“어서 응접실로 데리고 와.”
“알겠습니다.”
황제는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그가 돌아왔다는 것은 어떤 방법이든 찾았다는 소리였다. 응접실의 문을 여니 할리드 비아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택을 들르지도 않은 듯 지저분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게 보였다. 황제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찾았나?”
“일단은….”
할리드는 입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잘 깎지 못한 수염,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그가 얼마나 애타게 방법을 찾아다녔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일단 해 볼 만한 건 찾았습니다.”
“해 볼 만한 것?”
할리드는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주머니를 풀어 꺼내 놓았다. 거기엔 처음 보는 마른 풀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드리마’라는 풀이라고 하더군요.”
“…‘드리마’?”
“‘도타’라는 약초사를 찾아갔었습니다.”
할리드는 그렇게 말하며 그때 당시를 회상했다.
‘몸은 회복되었는데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라.’
도타 할멈은 그를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살아 그리 좋은 꼴은 못 봤나 보군.’
‘…….’
할리드는 그 말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하다 겨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도타 할멈은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보내 주는 게 그 치에게는 더 좋을 수 있어.’
‘……그럴 순 없습니다.’
‘쯧쯧, 산 사람의 욕심이지.’
‘부탁드립니다.’
‘그렇게도 살리길 바라는가.’
할리드는 자신의 마지막 희망인 도타 할멈을 애원하듯 바라보았다. 도타 할멈은 결국 마에타에게 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내 오라고 했다. 마에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도타 할멈이 꺼내 오라고 한 것을 가지고 왔다.
‘좋은 꿈을 꾸게 해 주는 풀이지.’
‘좋은 꿈?’
‘그래, 보통 악몽을 꾸는 자들에게 처방하는 약재인데. 그 치에게도 필요할 듯해.’
‘그걸로, 그가 깨어날 수 있습니까?’
‘모르지. 일단 해 보는 거야.’
할리드는 마에타가 가지고 나온 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어라도 시도해 보는 게 낫다. 지금까지 어디를 돌아다녀도 무언가 답을 내놓은 사람은 없었다. 할리드는 테이블 위의 주머니를 꾹 쥐어 챙겼다.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차도가 있으면 돈이나 더 보내.’
도타 할멈은 어쨌든 약초사였다. 사람이 죽어 가면 살려 내야 하는 사람. 그렇기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에게 그대로 방법을 내밀었다. 할리드는 그것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수도로 돌아왔다. 황제는 그에게 설명을 다 들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시도해 보는 수밖에.”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네.”
“아닙니다. 어차피….”
전부 제 탓 아닙니까. 그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황제도 그가 차마 내뱉지 못하는 말에 공감했다. 네 탓이다. 내 탓이다. 결국엔 우리의 탓이다.
할리드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치료실로 향했다. 황제 또한 그와 함께 다시 치료실을 방문했다. 녹스는 언제나처럼 평온하게 누워 있었다. 모든 걸 끝낸 시체처럼 보인다는 뜻이었다.
할리드는 입술을 꾹 깨물고 도타 할멈이 알려 준 대로 유리그릇에 마른 풀을 담고 거기에 불을 붙였다. 마른 풀에 불이 붙자 희미한 향내가 나면서 천천히 사그라들 듯 타들어 갔다.
풀이 다 타고 은은하게 불씨만 남자 방 안엔 온통 향만 가득히 남았다.
“…향이 사라질 때마다 갈아 주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기다려 보는 수밖에.”
황제가 말했고 할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자리를 비워 많은 일이 밀려 있었지만 할리드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녹스가 깨어날 때까지 풀에 불을 붙이고 풀에서 나는 향을 맡듯 천천히 호흡했다. 좋은 꿈을 꾸게 해 주는 풀. 부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가 꿈에서만큼은 괴롭지 않길 바랐다.
* * *
어린 할리드는 항상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봄이 오면 늘 조금씩 졸았다. 그리고 그걸 모르는 척 해 주는 건 녹스의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할리드는 뒷짐을 지고 선 채 쓰러질 듯 휘청댔다. 어떻게든 자지 않으려는 듯 눈꺼풀엔 쌍꺼풀이 진하게 져 있었다. 녹스는 방에서 그날 봐야 할 책의 내용을 종이에 옮기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녹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할리드가 깜짝 놀란 듯 크게 눈을 떴다.
“할리드, 이리 와.”
“죄, 죄송해요. 도련님…!”
마치 혼이 나기 직전의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녹스는 그런 아이에게 어떤 말로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손짓했다. 할리드는 녹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다지 화가 나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일하는 중에 조는 하인이 어디 있겠나. 드디어 도련님께 한 소리 듣는다고 생각했다.
할리드가 조심스럽게 녹스에게 주춤주춤 다가섰다. 녹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할리드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계속 졸지 말고 잠깐 자.”
“네, 에?”
할리드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아이는 당황한 듯 보였지만 녹스는 태연하게 할리드를 자신의 침대로 데리고 갔다. 할리드는 얼굴이 벌게져선 고개를 저었다.
“아, 아, 안 졸게요.”
“그래 놓고 졸 거 다 알아.”
할리드가 쩔쩔맸지만 녹스는 아이의 말은 전혀 듣지 않겠다는 듯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 할리드를 침대 위에 앉혔다. 하지만 그것이 무색하게 아이는 침대에 엉덩이가 닿자마자 벌떡 일어나 말했다.
“제, 제가 도련님 침대에 감히 어떻게….”
“침대는 그냥 침대일 뿐이야.”
녹스는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할리드에게는 그냥 침대가 아니었다. 무려 도련님이 주무시는 침대가 아닌가. 그러니까 도련님 향기도 많이 나고. 그의 몸이 푹 감싸이는 그런 곳이란 말이었다.
“세수, 세수라도 하고 올게요.”
녹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심코 명령하듯 말했다.
“누워.”
묘하게 고압적인 그 모습에 할리드는 저도 모르게 냉큼 침대에 앉아 풀썩 누워 버렸다. 가로로 누워 버린 그 모습에 녹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아 아이의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발 벗어야지.”
“네, 네.”
할리드는 제 구두를 주섬주섬 벗고 침대에 바르게 누웠다. 녹스는 그런 아이의 목까지 침구를 끌어 덮어 주고는 다시 책상으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툭, 아이의 손이 녹스의 옷깃을 잡아 왔다.
“…가, 같이.”
녹스는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
“가, 같이 누워 주시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