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할리드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아이는 생각했다. 아, 너무 큰 욕심을 부렸다. 주인과 한 침대에 눕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하인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옷깃을 쥔 아이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녹스는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이내.
스윽, 사락.
구두를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이의 오른쪽에 옆으로 누워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꼴을 구경했다. 녹스는 솔직히 조금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아이의 얼굴색이.
“아직 어린애구나.”
“그런, 가요?”
“재워 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 건 어린아이지.”
녹스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할리드는 제가 아주 어린아이는 아니지 않냐며 반박하고 싶었지만 혹여 녹스가 침대에서 떠날까 봐 침구를 코끝까지 올렸다.
녹스는 정말 할리드를 재우려고 하는지 아이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할리드는 눈을 똑바로 뜨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슬슬 감기는 눈꺼풀을 주체할 수 없었다.
녹스는 안간힘을 쓰며 눈을 뜨고 있으려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또 한 번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라고 했는데 왜 또 자지 않겠다고 이렇게 버틸까. 설핏 웃음이 났다.
“쉬, 자야지.”
가만가만 속삭이자 할리드가 녹스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머리를 비볐다. 멈칫, 녹스의 손이 멈췄다가 다시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티고 버티던 아이는 결국 창밖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 잠에 들었다. 녹스는 잠든 아이의 눈꺼풀을 바라보았다. 얇고 긴 속눈썹 아래로 그늘져 있었다.
“예쁜 내 할리드.”
그가 가만히 속삭였다. 아이가 짧게 어리광을 피우듯 으음, 소리를 내곤 녹스 쪽으로 돌아누워 품으로 파고들었다. 깨어 있나, 싶었지만 할리드는 맨정신으로 그럴 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녹스는 잠시 제 품 안에 들어와 있는 할리드에게 손대지 못하고 있다가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등에 손을 대 가볍게 끌어안았다. 아이들 특유의 따뜻한 체온이 품 안에 가득 찼다.
녹스는 그런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할리드의 머리카락 위로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쪽 소리도 없이 아주 가볍게. 살짝 대었다 떼어 내는 행동에 가깝게.
“잘 자, 할리드.”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인 말을 아이는 듣지 못했다.
녹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아직 옮겨 써야 할 책과 읽고 외워야 할 것이 산더미였지만 조용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할리드 옆에 누워 있으니 천천히 수마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조금만 자고 일어나야지. 녹스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품 안에 파고든 아이의 체온이 높았던 탓일지도 몰랐다.
평화롭고 안온한 일상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때. 우리가 서로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던 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때.
녹스는 눈을 떴다.
* * *
시간은 흘러가기 마련이다. 녹스의 병실에 향을 피운 지 얼마나 되었을까. 날씨는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고 슬슬 차던 기운은 이제 완연한 겨울을 불러내었다.
가지에 겨우 달라붙어 있던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은 전부 떨어졌고, 꽃들 역시 모조리 졌다. 아직 눈은 내리지 않건만 회색 구름이 쌓인 제국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떨굴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게 멈춰 버린 것 같은 하늘 아래에서 두 남자가 기다리던 소식이 들렸다.
“녹스 라이네리오 님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뭐라고?”
할리드는 서류를 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모든 걸 내던지고 황성으로 가기 위해 자리를 벗어나 아래층으로 뛰었다. 옷을 갈아입거나 머리를 다듬을 시간 따윈 없었다. 그는 겨울임에도 셔츠 한 장 차림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곧장 황성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언제쯤 눈을 떴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황궁에서 곧장 서신을 보낸 듯합니다.”
“녹스….”
그가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되새길 때 보좌관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분의 상태가….”
하지만 할리드는 그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일갈했다.
“직접 가서 확인하겠다.”
할리드는 두 손을 꽉 쥐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차가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뛰듯 내려 성큼성큼 치료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치료실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의 걸음은 점차 느려졌다.
눈을 뜬 그에게 뭐라고 하지? 그가 일어나자마자 자신을 왜 살렸냐며 원망부터 하면 어쩌지? 현실적인 질문들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녹스에게 무어라 말을 해 줘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를 살릴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할리드의 걸음이 치료실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과 똑같은 모양으로 멈춰 선 사람을 발견했다.
펠티온, 그였다. 웃기게도 두 남자는 똑같은 이유로 같은 곳에 멈추어 서 있었다. 자신과 똑같은 표정. 할리드는 제가 굉장히 형편없는 표정을 짓고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리드와 펠티온은 잠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의 두려움이 눈동자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폐하.”
“할리드.”
“들어가지 않으실 거면 비켜 주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어떻게든 용기를 먼저 낸 자는 할리드였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리고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듯 하,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끄덕임보다 말이 조금 더 늦게 나왔다. 할리드는 천천히 문에 다가섰다. 그리고 조금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아.
창가에 서 있는 녹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랫동안 누워 있느라 말라 버린 뒷모습은 그의 눈물을 부르기에 충분했으나, 그를 이렇게 만든 제가 여기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를 향한 조롱이고 기만이리라. 할리드는 어떻게든 눈물을 참아 냈다.
끼익, 덜컥.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천천히 녹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할리드는 녹스가 자신을 바라볼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궁금했다. 아니 두려웠다. 하지만 겨우 바라본 녹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그가 예상했던 것,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원망, 슬픔, 증오.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순수한 놀라움.
“할리드…?”
그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원망의 빛 따위는 비치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의문만을 담고 있었을 뿐이다. 할리드는 그 목소리에 잠시 굳어 버려 멈추었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 부를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하지만 그 의문은 녹스의 다음 말에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할리드, 맞지?”
녹스의 시선은 맑았다. 그리고 약간의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할리드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 그때의 그다. 자신의 온전한 도련님일 때의….
할리드는 뇌가 멈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자신을 부르는 단정한 목소리. 그 모든 것이 한 가지 결론에 그를 끌어다 놓았다. 아, 그가 기억을 잃었다.
녹스는 할리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섰다. 머뭇거리며 그에게 시선을 옮기는 듯하더니 이내 그를 올려다보았다.
“잘 컸구나.”
“…도련, 님.”
“날 아직 그렇게 불러 주는 건가?”
내 예쁜 할리드. 그렇게 불러 주던 목소리가 남았다. 할리드는 순간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씹어 삼키곤 녹스를 마주 보았다. 녹스의 눈동자가 검게 빛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는 잘 모르겠어. 그래도 네가 이렇게 잘 커서 다행이야.”
그의 눈빛엔 안도가 서려 있었다. 할리드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아무런 말도 못 하다가 이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래, 그런 것 같아. 오래 기다렸니?”
“……아닙니다.”
할리드는 답을 하곤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녹스는 할리드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몇 번이고 손을 쥐었다 펴더니 천천히 할리드의 손을 잡았다. 할리드의 몸이 크게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고?”
그의 목소리는 마냥 처연했다. 마치 잘못한 사람처럼.
“무엇을….”
“널 그리 버린 것을,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며 살진 않았어?”
그 말에 할리드는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상태의 녹스가.
“아니, 아닙니다. 결코, 절대….”
조금은 기꺼웠다. 어리석고 나약하고 비겁한 할리드.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떠돌았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이 무슨 마음이었는지 모르고 당신을 원망하며 살았다고. 그래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고.
당신이 여기 이렇게 누워 있었던 것조차 내 탓이라고. 그 말을 지금 제 눈앞에서 검은 눈을 빛내며 말하고 있는 그에게 차마 전할 수 없었다. 모조리 숨기고 싶은 과거였다. 차라리 그가 기억을 하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겁하고 비열한 할리드. 그런 할리드에게 녹스가 답했다.
“그래?”
검은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본다.
“그런데….”
설핏 올라간 입꼬리가 마치 뒤틀린 것 같아 보였다.
“나한테 왜 그랬지?”
할리드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커졌다.
녹스의 비명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