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자신을 망가뜨리고 다시 살려 낸 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비명.
그 비명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제와 시종들이 뛰어 들어왔다.
녹스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제 뺨을 긁어내렸다. 누워 있는 동안 길어 버린 손톱 끝이 살점을 긁어냈다. 할리드는 녹스의 두 팔목을 잡고 어떻게든 녹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녹스!”
“내 이름 부르지 마!”
녹스가 절규했다. 두 눈은 검었고 그 눈동자에선 원망이란 이름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녹스는 두 팔을 빼내기 위해 뒤로 물러났지만 할리드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밧줄을 쥔 것처럼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 할리드는 녹스의 뺨에 비친 피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정해!”
“이거 놔.”
녹스는 짓씹듯 말했다. 녹스는 눈물이 떨어지는 검은 눈동자로 할리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날 살렸어?”
“……나는.”
“내가 갚을 건 다 갚았잖아.”
“녹스, 제발.”
“내가 선택한 내 끝이었어.”
“녹스 라이네리오.”
“그래!”
녹스가 순간 강하게 힘을 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녹스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커다랗게 뜨인 눈엔 빛이라곤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그의 등 뒤로 창문이 보였다.
녹스가 뒷걸음질 치며 점점 창문과 가까워졌다.
할리드의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기 시작했다. 온몸이 불안감으로 가득 찬다. 혹여, 그가 다시 한번 죽으려 들까 봐.
“라이네리오로 죽을 수 있었어.”
“내가, 내가 널 어떻게 죽게 둬.”
“그럼, 내가 계속 네 인형으로 살아야 했나?”
“한 번만,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무슨 기회?”
녹스가 몇 걸음 더 물러섰다. 창문이 그의 등 뒤로 닿았다. 할리드는 순식간에 목 끝까지 차오르는 불안감을 느꼈다. 할리드는 당장에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무엇이든 할 테니까.”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는데.”
발음을 씹는 음성이 선명했다. 네가, 나한테, 지금, 대체, 뭘 해 줄 수 있는데.
“네가 지금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어.”
녹스의 검은 눈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고 넌 그걸 모르는 척하는 거야.”
할리드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핏발이 선 눈으로 녹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녹스가 다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내가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
“그럴 수 없었어.”
“내 죽음까지 가지려는 건 너무하잖아.”
“……몇 번이든 살려 낼 거야.”
녹스의 눈에 차오르는 것은 절망이었다. 아, 내 몸은, 내 죽음은 결국 또 그에 의해 결정되는구나. 녹스는 할리드를 바라보다 허리를 숙였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흘러넘친 눈물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할리드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로 바닥을 적시는 눈물만 바라보았다. 이기적인 제 생각으로는 절망하는 그를 위로할 수 있는 건 제가 아니었다. 아니, 아마 그를 위로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을 테다. 올곧이 홀로 남겨진 그에게 손을 내밀 자격이 자신에겐 없었다. 얼굴이 속절없이 일그러졌다.
“네가 죽게 둘 순 없어….”
내가, 내가 갚을 게 있단 말이야. 할리드는 차마 그 말도 잇질 못했다. 그 말을 듣던 녹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잠시 흐려졌다. 시선은 먼 곳을 보는 듯했고 그는 곧 침음을 흘렸다.
“아….”
곧 녹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검게 탄 눈은 여전했지만 놀란 듯 커진 녹스의 눈은 또다시.
“표정이, 표정이 왜 그래. 할리드?”
예전, 도련님의 것이었다.
할리드는 잠시 숨을 멈췄다. 할 말을 잃어 입을 다물고 있자 창가에서 걸어온 녹스가 무릎을 꿇고 있는 할리드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왜…. 아니야. 방금 내가 뭐라고 했었지? 왜 그런 표정이야?”
할리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턱이 덜덜 떨렸다. 할리드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그의 정신은 온전치 못하다. 그는 그제야 그걸 알아챌 수 있었다. 녹스는 혼란스러운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내가 방금 네게 무슨 말을 했지?”
녹스는 스스로 해답을 찾기 위해 제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할리드는 그가 그렇게 하게끔 둬서는 안 됨을 깨달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되짚던 녹스는 순간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 아, 짧은 음성이 터졌다.
“아, 아아-!”
녹스의 비명이 다시금 터졌다. 녹스는 미친 듯이 아픈 머리에 몸을 완전히 웅크렸다. 기억의 충돌이 일어났다. 왜 날 살렸어? 할리드가 날 어떻게 대했더라? 내가 지금까지 어떤 일들을 견뎠더라.
순간, 자신이 사랑하던 할리드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할리드가 저를 사랑했던 기억도 함께 선명해졌다. 자신이 아이를 버린 그 장면마저도 너무나 또렷했다.
그 모든 기억이 얼기설기 설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누군가 머리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헤집는 감각이었다. 괴롭고 또 강제로 휘둘리는 그 감각.
“아악-!”
비명, 또 비명. 녹스의 손톱이 이제 제 목을 할퀸다. 할리드는 그가 자신의 몸을 해칠 수 없도록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녹스가 괴로운 듯 몸부림쳤다.
“할리드, 할리드!”
“녹스. 진정, 진정해. 제발…!”
“내가 널 버렸어.”
“녹스 잊어, 잊어버려.”
“내가 버려서 내게 그랬어?”
녹스가 그에게 안긴 채로 고개를 들어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어느 쪽이 현실이지? 어느 쪽이 진짜야? 할리드 말해 봐.”
할리드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토해 내지 못했다. 겁쟁이. 비겁자. 할리드란 남자는 정말로 최악이었다.
“어느 쪽이…! 헉, 허억.”
녹스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놀라 커다래진 눈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펠티온은 치료사를 향해 소리쳤다.
“빨리, 진정시킬 방법을 찾아라!”
“강제로 재워야 할 듯싶습니다.”
할리드는 헐떡이며 늘어지는 녹스를 안아 들어 침대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직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녹스는 자꾸만 자신의 뺨과 목덜미를 긁어 댔다.
손톱 사이로 피가 긁혀 나왔고 핏물이 셔츠의 깃을 적셨다. 할리드는 다시 그의 손을 꾹 잡아 내렸다. 잡힌 녹스의 팔도 잡은 할리드의 팔도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녹스가 말했다.
“네가 내게 뭘 했지?”
“…하면 안 되는 짓들.”
녹스는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단편적인 기억들이 뇌를 쑤시고 들어오는 듯싶다가도 어느 순간 쑥 빠져나갔다. 기억이 엉켰다. 나는 널 사랑했고 너는 날 증오했고 버렸고 목을 졸랐고 또….
녹스는 할리드의 손을 뿌리치고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긴 손톱이 두피를 긁었다. 피가 배어 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웅크려 있던 녹스는 순간 퍼뜩 든 생각에 정답을 찾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잔뜩 확장된 동공이 보였다.
“할리드.”
목소리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차라리 차분했다면 덜 두려웠을 텐데. 할리드는 그 밝은 목소리에 얼굴을 굳혔다. 녹스는 자신이 뿌리쳤던 할리드의 손을 잡았다.
“나 좀 죽여 줘.”
“…….”
“할리드, 할리드. 아니.”
녹스가 웃었다.
“주인님.”
할리드의 턱이 덜덜 떨렸다. 녹스의 눈은 커다랗게 뜨여진 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말을 뱉고 있었다. 녹스가 침대 위에서 무릎 꿇었다.
“저 좀 죽여 주세요. 내 목숨이 네 것이라면 끊는 것도 네가 할 수 있잖아.”
녹스는 절벽에 매달린 사람처럼 말했다.
“이미 가지고 놀 만큼 가지고 놀았잖아.”
빌 듯 모았던 손이 할리드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갚을 것도 다 갚았잖아.”
녹스는 핏발 선 눈으로 입술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할리드는 차마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제발.”
녹스가 마치 쥐어짜는 듯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나 좀 죽여 줘. 부탁이에요. 주인님, 제발, 제발….”
녹스가 고개를 숙였다. 할리드는 그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황제는 이 참담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끼어들 틈도 없었고 끼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그를 저렇게 만든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해도 저 숨 막히는 곳에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방법은.”
펠티온이 겨우 음성을 내어 물었을 때 치료사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강제로 진정시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래.”
고개를 숙인 녹스의 뒤로 치료사가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목 뒤에 가볍게 손을 대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녹스는 스르륵 힘이 빠진 사람처럼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할리드는 그가 쓰러지자마자 허억, 숨을 내뱉었다.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숨을 몰아 내쉬며 쓰러진 녹스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등 뒤에서 펠티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상태가 어떻지?”
“기억이 온전치 못한 것 같습니다. 현재와 과거의 기억이 뒤섞인 거죠.”
“치료 방법은.”
“이런 경우, 시간만이 답입니다.”
“…….”
할리드는 원치 않게 다시 쓰러져 잠든 녹스를 내려다보다 그를 침대 위에 바로 눕혔다. 황제는 착잡한 얼굴로 녹스를 내려다보다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어떻게든 돌려놔.”
“알겠습니다.”
두 남자는 서로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말은 필요치 않았다. 자신들이 한 짓거리가 이렇게 돌아왔다. 이제 와 후회해도 시간을 돌릴 방법 따윈 없었다. 황제의 입술에서 옅게 피가 비쳤다. 넋을 놓은 할리드는 녹스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사이서 녹스는 다시금 평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 * *
와장창-!
“녹스, 녹스 님!”
하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녹스의 손엔 깨어진 화분의 조각이 들려 있었다. 하녀가 비명을 질렀지만 녹스는 자신의 손목을 찢어 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손목에서부터 피가 타고 흘렀다. 얼마나 깊게 베였는지 후두둑 쏟아진 피가 카펫을 푹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