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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04화 (104/158)

제104화

“그거 놓으세요! 제발요!”

하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다른 하녀는 서둘러 할리드를 부르러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녹스가 저택으로 돌아온 후, 이런 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졌다.

“녹스!”

녹스가 또다시 자해를 한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할리드가 녹스에게 다가가 손에 들린 화분 조각을 억지로 빼앗았다. 얼마나 세게 조각을 쥐었는지 녹스의 손아귀도 전부 찢겨 붉게 물들어 있었다.

“녹스, 제발….”

“제발, 뭘?”

녹스가 무감하게 물었다.

“내게 뭘 더 바라는데.”

그의 목소리는 인형처럼 고저가 없었다.

황궁에서 다시 눈을 뜬 녹스는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추락한 노예의 얼굴로 눈을 떴고, 어느 날은 어린 도련님의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할리드가 어디 있는지 아나?”

도련님의 얼굴을 한 녹스는 새벽녘에 소식을 듣고 온 할리드를 반겼다. 설핏 웃으며 다 큰 할리드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며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네가 이렇게 컸다는 게 신기해.”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까요.”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났구나.”

녹스는 그 말을 하곤 입을 다물었다. 할리드는 그저 녹스가 침묵하는 줄 알았으나 그 침묵이 한참을 이어지자 무언가 이상함을 알았다.

주륵.

녹스의 입 밖으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할리드는 그 모습을 보고 다급하게 녹스의 턱을 쥐어 당겼다. 그리고 억지로 입을 열게 했다.

선명한 잇자국이 남아 피로 붉어진 혀가 있었다. 녹스가 제 턱을 붙잡은 할리드의 팔을 꽉 틀어쥐었다.

“나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잊을 수 있을까.”

너를, 그리고 이렇게 망가진 나를. 그게 그렇게 오래 걸린다면, 괴로울 정도로 오래 걸릴 거라면 차라리 지금 목숨을 끊는 게 낫지 않겠어?

녹스가 그렇게 속삭였다. 할리드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억지로 안아 들고 치료사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치료가 끝나면 녹스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물었다.

“할리드, 표정이 이상해.”

할리드는 결국 녹스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가겠노라 선언했다.

녹스가 도련님의 얼굴로 눈을 뜰 때엔 마치 정해진 것처럼 할리드를 찾았기 때문이다.

늦은 밤, 잠시 궁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할리드를 찾아 정원을 떠돈 적도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던 황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뜻 모를 소리를 했다.

“내가 한동안 바쁠 테니 그대가 데리고 살피는 게 낫겠지.”

할리드는 황제의 말에 의미를 두지 않았고 황제 또한 제 말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온 녹스는 어느 날은 할리드와 정원을 거닐었고 또 어느 날은 발작하는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스스로 몸을 해쳤으며 할리드를 향해 빌었다. 제발 죽게 해 달라고.

할리드, 주인님. 내 예쁜 할리드. 엉망으로 섞인 호칭들이 입 밖으로 쏟아졌다. 녹스의 손톱 아래는 항상 자신이 긁어낸 살점이 굳어 있었다.

“녹스. 치료, 치료부터 하자.”

할리드는 녹스의 두 손을 붙잡았다. 하녀들은 피를 잔뜩 머금은 카펫을 치웠다. 다급히 불려 온 치료사가 할리드의 손에 붙잡힌 녹스의 상처를 치료했다.

살이 아무는 감각은 끔찍했다. 죽음에서 멀어질수록 절망만이 짙어졌다. 녹스는 숨을 헐떡이다가 이내 힘이 빠진 듯 늘어졌다. 할리드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지금의 녹스에겐 그와 닿는 것을 거절할 기운조차 없었다. 그저 눈동자를 한 번 도르륵 굴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 여기가 몇 층이더라.’

안타깝게도 그리 높은 높이는 아니었다. 뛰어내려도 다리만 좀 부러지고 말 거라는 소리였다.

녹스는 축 늘어진 채 할리드의 손에 침대로 옮겨졌다. 그는 가만히 누워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죽을 수 있을까. 할리드가 자리를 비울 때는 없을까. 뭐, 할리드가 자리를 비워 봤자 사용인들이 막아서겠지마는, 할리드는 할 일도 없는지 제 곁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그리고 녹스는 그것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할리드.”

“…그래, 녹스.”

“제발 꺼져.”

“…….”

“지금 내 눈앞에서 꺼져 주면 오늘 하루는 얌전히 있을게.”

“…그러지.”

할리드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녹스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 이대로 심장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 한 번의 자해를 끝마치고 나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그냥 이대로 누군가 목을 졸라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기꺼이 턱을 들고 그 죽음을 받아들일 텐데.

녹스는 눈을 감았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죽음에 가까운 것은 잠,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녹스는 억지로 오지도 않는 잠을 청했다.

어쨌든 오늘 하루 얌전히 있겠다는 말을 했으니까. 그렇게 녹스가 천천히 잠에 빠지자 사용인들은 숨을 돌렸다.

한 번 잠에 빠진 녹스는 쉬이 일어나질 않았다. 사용인들은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잠시 방을 나섰다.

그렇게 해가 지고 늦은 밤이 되면 녹스는 모든 잠을 소모하고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검은 눈동자가 빛없이 깜빡였다.

“…아.”

작은 침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을 맡은 하녀는 방 안 구석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녹스는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방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지금 막 눈을 뜬 녹스는 자신이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방 안은 숨이 막혀 빠져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녹스의 귀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그것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구두 소리였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익숙한 소리. 녹스는 잠시 홀린 듯, 그 구두 소리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와 지하에 닿았다. 그리고 어느 방을 보았다. 녹스는 그 방을 알았다. 아, 이곳은.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나를 버렸던 곳이다. 그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것을 기억해 냈다.

끼이익-.

녹스는 문을 열었다. 그러면 덩그러니 빈 상자들이 쌓여 있는 먼지 가득한 지하 방이 나왔다. 녹스는 문의 안쪽을 보았다. 누군가 긁어 놓은 자국이 선명한 문. 녹스는 그 자국이 자신이 낸 것임을 떠올려 냈다. 녹스는 천천히 지하 방으로 들어섰다.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기어코 정신을 잡지 못하는구나.’

아, 녹스는 그 구두 소리가 왜 익숙했는지 뒤늦게 눈치챘다. 그것은 어머니의 발소리였다. 녹스는 천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그래. 어머니의 말씀이 맞다. 자신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냥 미쳐 있었던 거다. 모든 게 환상이고 자신은 미쳐 있고. 이 모든 게 전부 다 가짜였으며 지금 제가 여기서 무릎 꿇고 있는 이 순간마저 그냥 제 꿈속일지도 몰랐다.

저는 그냥, 아버지가 목이 잘렸던 그 날에 같이 목이 잘린 걸지도 몰랐다. 녹스가 바닥에 머리를 쿵, 처박았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났지만 통증 따윈 느낄 수 없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손톱이 까뒤집힐 정도로 바닥을 긁었다.

“어머니, 저 좀.”

숨을 헐떡이자 먼지가 목 안을 긁어내렸다.

“저 좀 죽여 주세요….”

어머니, 어머니. 제발. 저를 같이 데려가시지 그랬어요. 아니면 어린 그날에 정신 차리지 못할 놈이라며 채찍으로 때려죽이기라도 하시지 그랬어요. 결국 이렇게 될 거. 모든 걸 다 아시는 어머니께서 애초에 끊어 놓지 그러셨어요.

“나 좀, 누가. 제발.”

뒤집힌 손톱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그때,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녹스는 그저 고개를 처박은 채로 있었다. 문이 열리고 다급한 호흡이 들렸다.

“녹스……!”

갑작스럽게 사라진 녹스 탓에 저택이 한바탕 뒤집혔다. 할리드까지 일어나 정원과 저택을 전부 뒤졌지만 녹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할리드는 그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설마, 설마 저기로 갔을까. 저긴. 저긴. 할리드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홀린 듯 계단으로 내려가자 자그맣게 열린 문틈이 보였다. 그 틈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저 좀 죽여 주세요. 나 좀, 누가. 제발. 누군가에게 비는 듯한 목소리는 깊게 갈라져 있었다. 애원하고 있었다.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는 자의 음성은 듣는 이의 정신마저 긁어내렸다.

할리드는 무릎 꿇은 녹스를 안아 들었다. 아, 밤이 지났으니 하루가 지난 거 아닌가. 그러면 하루 동안 가만히 있겠다는 약속을 어긴 건 아니네. 녹스가 축 늘어진 채 그렇게 생각했다. 할리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녹스 거기서 뭘 봤어. 뭘 들었어. 그리고 예전의 넌 거기서 대체 무얼 생각한 거지? 물을 수 없는 말들만 가득했다.

뒤집어진 손톱들은 다행히 치료가 되었다. 할리드는 피투성이인 녹스의 손을 젖은 천으로 직접 닦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녹스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할리드가 입술을 씹었다. 답할 수 없어서. 답해선 안 돼서.

* * *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반 뼘은 되는 것 같았다. 유달리 혹독한 겨울이 되리라는 말이 돌았다.

녹스는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덮고 있는 담요는 황제가 하사한 것이었고 그가 입고 있는 것은 할리드가 준비한 것이었다. 녹스는 아무런 빛도 없는 눈으로 쌓이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녹스 님.”

마를렌, 그녀의 목소리였다. 녹스가 고개를 돌렸다. 마를렌은 노예가 순식간에 제 윗사람이 되었음에도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를 극진하게 모셨다.

“곧 황제 폐하께서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

그의 얼굴엔 조금의 표정도 없었다. 시체의 얼굴이 저렇지 않을까. 마를렌은 자신이 할 말만을 남기고 떠났다. 녹스는 살짝 열린 창문에서 들어오는 찬 바람을 느끼며 저주스럽게도 제가 살아 있음을 알았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저벅저벅하고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녹스는 그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숨통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녹스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그가 숨을 내뱉자 끼익, 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들어왔다. 녹스는 어두운 눈으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펠티온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몸이 어떻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하십시오.”

“앉아서 들어.”

“괜찮습니다. 그냥 말씀하십시오.”

“……그래.”

차가운 답에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너를 복권시킬 거다.”

“…허.”

녹스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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