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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05화 (105/158)

제105화

세 사람 사이에 차디찬 공기가 내려앉았다. 아주 간만에 제정신인 녹스 라이네리오는 자신이 제정신이 된 대가로 황제가 돌아 버린 건지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황제는 단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저거 진심이구나. 진정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녹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황제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모두가 동의한 일이야.”

“그 모두에 저는 들어가 있지 않나 봅니다.”

“…….”

녹스는 찬찬히 생각했다. 복권, 복권이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미 황제와 공작의 성노예라는 사실이 지나가던 개새끼조차 알 정도로 퍼진 이 상황에서 복권이라.

녹스는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웃었다. 그 싸늘한 미소에 펠티온과 할리드의 얼굴이 굳었다.

“제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으십니까?”

녹스는 한숨을 내쉬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일 분, 오 분, 십 분. 그렇게 긴 침묵이 이어졌다. 펠티온과 할리드는 녹스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딱 십 오 분. 십 오 분이 되었을 때 녹스의 입이 열렸다.

“알겠습니다.”

펠티온이 고개를 들었다.

“복권을 시키시겠다니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통보이자 명령이지 않습니까. 녹스의 입가에서 미소가 내려갈 줄을 몰랐다.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잘 생각했어.”

“제게 복권을 명령하신 만큼 저 역시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제게 면제권을 내려 주십시오.”

“…면제권?”

“예.”

녹스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두 남자의 어깨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바짝 긴장했다는 증거였다.

“불가합니까?”

“아니, 가능해.”

대답은 번개처럼 나왔다.

“하하.”

녹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두 분께서 제 손짓, 행동 하나하나에 그리 신경을 쓰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왜, 제가 스스로 몸을 던진 게 그리도 충격적이셨습니까?”

두 남자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녹스는 생각이 나는 대로 지껄였다.

“아니면, 설마 이제 와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그대들은 날 장난감 취급하고 손안에서 편리하게 굴릴 수 있는 물건처럼 다뤘는데.

“하긴, 그럴 리가 없지.”

녹스가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그러자 지독한 무표정이 만들어졌다.

“그렇지 않습니까?”

녹스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온도는 너무나 낮아서 조금이라도 닿는다면 얼어 버릴 것 같았다.

“…그래.”

할리드는 입을 열지 않았고 황제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자신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해 봐야 얄팍한 동정일 것들.

“마지막으로.”

녹스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제게 검을 하나 내려 주십시오.”

“…검을?”

황제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검을 가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일은 없을 겁니다.”

녹스는 뻔히 보이는 그들의 속내를 읽고서 말했다. 어차피 감출 생각도 없었겠지만. 녹스가 짧게 혀를 차고 창문틀에 기대어 섰다. 두 남자가 흠칫거리며 한 발자국,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녹스는 대번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면 그들은 녹스의 표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대답만.”

“…알겠네.”

“감사합니다.”

녹스는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은 표정으로 감사를 말했다. 조소에 가까웠던 미소는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였다. 녹스는 비웃고 싶었다. 그게 저 두 남자든, 아니면 여기까지 온 자신이든. 녹스가 침묵하자 세 사람 사이엔 말이 오가지 않았다. 애초에 둘은 녹스 앞에서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무어라 말한단 말인가. 어차피 그에겐 모든 게 가소로울 것이고 모든 게 변명이자 기만으로 보일 텐데.

“복권 시기는….”

“지금은 회복에 전념하겠습니다. 그 이후 최대한 빠르게.”

녹스가 말했다. 황제는 의외라는 듯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만이 답이었다.

“나가 주십시오.”

“녹스, 나는….”

그때 할리드가 입을 열었다. 녹스는 뒤돈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

녹스는 할리드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마치 명령하듯 말했고 할리드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심정이 어떻든 녹스는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도 누군가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딱히 그럴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더더욱.

녹스는 창가에 서서 그저 눈이 내리는 걸 바라보았다. 할리드와 펠티온은 그런 녹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곧 달칵, 문을 열고 사라졌다. 이 방엔 다시 녹스만이 남았다. 황제와 공작이 떠났으니 이제 곧 치료사라는 이름의 감시인이 붙겠지. 녹스는 그것이 못내 불편했다.

하아, 숨을 내쉰다. 녹스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보기 흉한 흉터들이 자잘하게 자리해 있었다. 숨쉬기가 아직도 힘들다.

시간이 갈수록 기억이 안정되면서 자해하는 횟수는 줄었지만 녹스는 숨이 불편할 때마다 제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을 여전히 느끼고 있었다. 그래야 숨 쉴 수 있었으니까. 녹스는 다시 숨을 깊게 들이켰다. 폐 속으로 깊게 스며드는 숨이 차가웠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라….”

설핏 웃음이 나왔다. 들이켠 창밖의 숨보다도 차가운 미소였다.

귀족들은 자신이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똑똑히 보았다. 아마 다시 귀족으로 돌아간다 해도 본래 자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그나마 나은 사실도 하나 있었다. 자신이 복권된다는 것은 어쨌든 신분이 회복된다는 것이고 신분이 회복되면….

“제메일.”

그 아이를 다시 데려올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은 진창을 산대도 그 애의 앞길 정도는 닦을 수 있을 텐데.

방법은 많다. 어차피 녹스는 자기 자신을 버린 지 오래였다. 이것저것 수단을 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단의 제약이 사라진다면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짓이라도.

어차피 버린 몸.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뜬 녹스의 눈동자는 차가운 녹색으로 일렁였다.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의 눈이었다.

* * *

“외출하고 싶습니다.”

“외, 외출이요?”

치료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녹스는 침대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꿍꿍이가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정신과 건강이 온전치 않은 상황에서 저택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하니 덜컥 걱정부터 드는 것이다.

그에게 일이 생기면 조져지는 건 아무래도 아랫것인 자신들이었으니까.

“무슨 일을 하고 싶은 건 아니고 답답해서 말입니다.”

녹스는 아직까지도 치료사나 사용인들에게 하대하지 않았다. 곧 복권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한데도 그랬다. 치료사는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님이 허하지 않으신대도 일단 해 보는 시늉이라도 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치료사가 자리를 비우자 사용인 하나가 자리를 채웠다. 사용인은 주춤거리는 모양 하나 없이 문 옆에 얌전히 섰다. 녹스는 한숨을 내쉬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이 너무 많이 말랐다.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탓이다. 그는 쯧, 혀를 찼다. 일단 복권 전에 몸과 체력을 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회복해 놓긴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자신이 버틸 수 있을 테니까. 녹스는 주먹을 꽉 한 번 쥐었다 폈다.

그리고 그 시각, 집무실에 있던 할리드가 치료사에게 물었다.

“외출?”

“아, 예. 별 뜻이 있으신 건 아니고 답답하다고….”

“…….”

할리드는 잠시 움직이던 펜을 멈추고 고심했다. 할리드는 녹스가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막지 않았으나 녹스는 오로지 방 안에서만 생활했다, 삶의 의욕 따윈 보이지도 않았다.

‘…차라리 움직일 기운이 생겨서 다행인 건가.’

다만 저택 밖으로 나가고 싶다니. 복권 시켜 준다는 지금에 와서 그가 도망갈 거라는 생각은 안 한다. 그리고 사실, 도망간다고 해도 그에게 녹스를 붙잡을 명분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할리드는 그가 황도를 떠나는 게 싫었다. 도망간다면 붙잡지 않을 자신도 없었고. 그는 펜 끝을 툭, 툭, 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할리드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치료사가 목을 스윽 움츠렸다.

“여, 역시 안 된다고 전달….”

“아니, 괜찮아.”

할리드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그렇게 말했다.

“잠깐의 외출 정도는, 괜찮아.”

치료사가 고개를 다시 빼었다. 의외의 대답이라 그런 걸 수도 있고 녹스의 그럼 그렇지, 라는 눈빛을 대신 받지 않을 수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어쨌든 치료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외출 준비를 하겠습니다.”

“대신.”

할리드가 펜 끝으로 치료사를 가리켰다.

“기사를 붙여.”

“기사를 말씀이십니까.”

“그래. 녹스의 몸이 예전 같지 않고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기사를 두엇….”

“다섯.”

“예?”

“다섯을 데려가.”

“아, 예. 예…. 알겠습니다.”

치료사는 명령을 받고 자연스럽게 문밖을 나섰다. 일단 기사를 데리고 가야 하니 기사단을 들러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치료사는 할리드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다섯의 기사를 골라 녹스의 방으로 돌아갔다. 녹스는 그 꼴을 보더니 미간을 찡그리지도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명만 빼고 돌아가십시오.”

“……하지만.”

“불만이면 직접 찾아오라고 하시고.”

그 말에 치료사가 당황했다. 그러나 녹스는 건조한 얼굴로 사용인에게 환복을 부탁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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