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결과적으로 다시 할리드에게 헐레벌떡 달려간 치료사는 녹스의 환복이 끝날 때쯤 알겠다는 대답을 받아 돌아왔다. 녹스는 할리드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웃겼다. 아니, 사실 웃기지도 않았다.
‘어차피 제 내킬 때만 그러니까.’
녹스는 할리드가 감정에 둔하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오로지 감정이 강하게 차오를 때만 분출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러다가 또 뭐가 수틀리면 제멋대로 굴지도 모른다. 뭐, 자신이 복권되고 나면 그 짓거리는 못 하겠지만.
녹스는 사용인이 정리해 준 셔츠 깃을 한 번 더 매만지고는 아주 오래간만에 방 밖으로 나갔다. 처음 일어났을 때는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벅차더니 이젠 움직이는 데 문제는 없었다. 예전처럼 움직이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만…. 녹스는 엇비슷하게나마 회복할 자신이 있었다.
그가 복도를 나서자 하나 남은 기사가 흘깃 눈치를 보다 따라나섰다. 녹스는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어차피 저쪽도 자신을 호위한다는 사실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으리라. 그가 그렇게 복도를 걷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가시나요?”
저택의 하녀장, 마를렌이었다.
“외출을 좀.”
마를렌은 허락을 받았냐는 질문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저녁 식사는 하던 대로 준비할까요.”
언제 돌아올 거냐는 물음을 나름 세련되게 할 줄 안다.
“그래요.”
녹스가 답하자 마를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는 그녀를 지나쳐 저택의 정문으로 가 마차를 탔다. 눈이 오는 터라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녹스는 겉옷을 여미며 마차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계속 올 것 같았다.
덜컹, 덜컹.
마차는 눈길을 몇 번이고 덜컹거리며 굴러갔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어느 광장에 도착했다. 레드몬 광장. 귀족들보다는 평민들이 많이 나다니는 곳으로 눈이 오고 있음에도 수많은 사람이 광장을 오가고 있었다. 기사는 왜 이곳으로 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 녹스가 마차에서 일어나자 냉큼 튀어 나가 문을 열었다.
녹스는 발판을 밟고 내려와 잠시 찬 바람을 맞았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발밑에 눈이 쌓였음에도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녹스는 그 광경을 잠시 눈에 담았다. 자신과 다르게 살아 있는 것을 보는 눈빛이었다. 녹스는 일단 사람들 사이사이를 지나며 걷기 시작했다.
한 번씩 누군가와 어깨를 스칠 법도 한데 그는 그런 것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그림자처럼 지나다녔다. 오히려 누군가와 부딪히는 건 그를 따르는 기사였다.
엇, 어어. 잠시만. 이런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녹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할리드가 멋대로 붙여 놓은 거, 따라다니는 것도 알아서 하겠지.
잡동사니를 파는 상인을 지나 겨울에 나는 약초나 야채 따위를 파는 상인을 지나고 잡화점과 주점 따위를 지나니 슬슬 한적한 길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사는 용케도 저를 놓치지 않았는지 뒤에서 헥헥댔다. 가쁜 숨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주변을 살폈다. 낡은 펍과 여관 따위가 널려 있었다. 녹스는 충동적으로 여관을 잡을까 생각했다. 오늘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할리드는 무슨 생각을 할까. 또 내가 도망갔으리라 생각하려나.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찾아 사람을 풀지 아니면 이제 저택에 앉아 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지.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 이젠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지조차 않았다.
녹스는 거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내리는 눈을 가만히 맞고 있으니 머리 위로 눈송이가 자잘하게 쌓였다. 따뜻한 숨이 차갑게 얼어 입김을 만들어 냈다. 녹스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마침 어느 펍 앞이었다. 녹스는 펍의 문 앞에 섰다. 가지고 있는 돈은 없지만 입은 옷에 쓸데없이 붙어 있는 금 단추는 많았다.
끼익-.
그렇게 펍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데 문 앞에 누군가 있었다. 자연히 몸을 트는데 문이 좁은 탓에 자연히 녹스의 어깨가 상대방의 어깨에 부딪혔다.
후두둑.
그 순간, 상대방이 들고 있던 무언가가 떨어졌다. 녹스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심결에 나온 것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직접 줍는 귀족은 없는 편이다.
“아.”
상대방은 별말 없이 허리를 숙여 자신이 떨어뜨린 것을 줍기 시작했다. 뒤늦게 반응한 녹스가 기사를 돌아보았다. 기사는 처음엔 그 뜻을 알지 못해 눈만 껌뻑이다, 이내 주우라는 뜻이란 걸 알았다.
“죄송합니다. 앞을 똑바로 못 봤습니다.”
남자가 떨어뜨린 건 펍에서 쓰는 것 같은 잡다한 물건들이었다. 기사가 그것을 주워 상대방의 팔 위에 얹어 주었다. 상대방은 물건을 다 주운 뒤에 허리를 펴고 답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그렇게 시선이 마주쳤다. 녹스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아니,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다. 이 남자는 분명….
“에스테리온 론더.”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불린 남자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녹스를 확인하곤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상대방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데서 뵙는군요.”
“그렇네요.”
녹스가 답했다. 과거 나누었던 대화가 자연히 떠올랐다.
‘저는 곧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러니 이걸 걸치고 계십시오.’
‘쓰고 버리셔도 상관없습니다.’
자신의 셔츠가 다 뜯겨 테라스에서 오도 가도 못 할 때 코트를 빌려주었던 남자. 에스테리온 론더. 그때는 나름 태가 나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오래되어 보이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빌렸던 코트는 어떻게 되었더라. 그것을 떠올리던 녹스는 무심코 미간을 찡그렸다. 그 이후 있었던 일은 그다지 떠올리고 싶은 기억이 아니었다.
“빨리 내다 버리고 와!”
펍의 주인인 것 같은 늙은 남자가 소리쳤다. 에스테리온 론더는 찡그림 하나 없이 실례, 라는 말과 함께 녹스를 지나쳤다. 녹스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펍 안으로 들어섰다.
에스테리온 론더, 분명 그를 처음 본 곳은 황궁 파티장 안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가 귀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펍에서 펍 주인에게 저런 소리를 듣고 있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호기심, 아. 그런 게 솟았다. 아주 오래간만에.
녹스는 펍 주인에게 다가섰다.
“저 사람은 여기서 일하나?”
“예?”
펍 주인은 잠시 녹스의 옷차림을 살폈다. 값비싸 보이는 옷을 입은 것을 보자마자 늙은 남자는 눈썹을 내리며 웃어 보였다.
“아. 예. 예. 혹시 거슬리셨습니까? 돌아오면 혼을 내겠….”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그냥….”
녹스는 그 남자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아주 충동적으로 소매에 달린 금 단추를 뜯었다.
“잠시 빌려줬으면 해서.”
옷에서 뜯어 낸 금 단추가 늙은 남자의 손에 쥐어졌다. 늙은 펍 주인은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비볐다.
“예. 얼마든지 가져다 쓰십시오!”
녹스는 늙은 펍 주인이 무슨 대답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펍 구석의 허름한 의자에 앉았다. 기사가 눈치를 보기에 저기, 멀찍이 앉으라며 손짓했다.
“대충 아무거나 먹으면서 기다리십시오.”
기사는 머리를 긁적이다 일단은 알았다며 멀찍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펍 안은 제법 따뜻했다. 주방의 열기와 펍 왼쪽에 있는 벽난로에서 타는 장작 덕분이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끼익, 문이 열리고 그 남자가 다시 돌아왔다. 에스테리온 론더. 그는 주방으로 돌아갔다가 주인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곧 녹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녹스와 눈이 마주치자 꾸벅 인사를 해 왔다. 녹스는 인사하는 대신 손짓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에스테리온 론더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는 딱히 불쾌해 보이지도, 유쾌해 보이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냐는 말에 녹스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게, 무슨 바람으로 내가 그쪽을 불렀을까. 녹스는 답하는 대신 말했다.
“앉으시죠.”
에스테리온 론더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덕분에 잠시 한숨 돌리겠군요.”
“여기서 일합니까?”
“예.”
“귀족이실 텐데.”
귀족이 평민들이나 할 법한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은 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에 봤다 하여 쉽게 입 밖으로 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녹스는 물었고 에스테리온은 잠시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성의 없이 답했다.
“귀족이란 이름만 달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을 텐데요.”
“그건 그렇죠.”
“뭘 좀 드시겠습니까.”
“뭘 먹을 생각은 안 들어서.”
“저는 좀 먹어야겠습니다. 그쪽을 핑계로 요리를 좀 받아 와도 되겠습니까.”
남자는 제법 뻔뻔하고 평이했다. 녹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스테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주인과 무언가 말을 주고받더니 곧 맥주 두 잔을 가지고 받아 왔다.
“요리는 곧 나올 겁니다.”
“일하는데 술 마셔도 됩니까?”
“안 될 건 뭐 있습니까. 물 한 모금 마신 지 3시간이나 지났습니다. 물 대신 술도 나쁘진 않겠죠.”
“꽤 부려 먹나 봅니다.”
“주는 돈이 그렇게 아까운지 한시도 가만히 두질 않죠. 그보다 얼마를 줬길래 저 두꺼비가 저렇게 얌전합니까.”
“두꺼비?”
늙은 남자를 한 번 흘깃 바라보았다. 그렇게 들으니, 두꺼비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녹스는 시선을 돌려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한 번에 반이나 비운 그는 잔을 툭 내려놓았다.
“글쎄요. 금 단추 하나가 얼만지는 배운 적이 없어서.”
“저랑 좀 노닥거리자고 금 단추를 하나 내밀었다고요?”
“그런 셈이죠.”
“그걸 절 주지 그랬습니까. 그럼 온종일 말동무를 해 줄 수도 있는데.”